고요해지기 위해 씁니다 - 한 줄 필사로 단정해지는 마음
조미정 지음 / 해냄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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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SNS에 올릴 새로운 콘텐츠, 업무에서 내놓아야 할 아이디어, 관계에서 건네야 할 적절한 말들. 창조의 압박감 앞에서 백지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하지만 필사는 다르다. 이미 완성된 문장 앞에서 우리는 창조자가 아닌 조용한 동반자가 된다. 그러나 펜을 드는 순간, 시간의 속도가 달라진다. 급하게 타이핑하던 손가락은 천천히 움직이는 손목에게 주도권을 넘겨준다. 글자 하나하나가 종이에 스며드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 문장을 온전히 경험한다. 읽을 때는 스쳐 지나갔을 단어들이 손끝을 통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이번에 읽은 신간 '고요해지기 위해 씁니다'라는 제목처럼, 필사는 역설적인 행위다. 움직임을 통해 고요에 이르고, 타인의 말을 빌려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간다.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침묵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필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필사를 하다 보면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분명 다른 이의 글을 베끼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그 문장이 내 마음의 소리처럼 느껴진다. 카뮈의 "아직은 아무것도 아니오"라는 말을 써 내려가면서, 나 역시 무언가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다. 헤세의 문장을 따라 쓰며 내 안의 데미안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것이 필사의 마법이다. 타인의 언어를 통해 내 안에 잠들어 있던 감정과 생각들이 깨어난다. 백 년 전 작가의 문장이 오늘 내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문학이 시공을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필사를 통해 몸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글을 쓸 때의 두려움과 필사할 때의 든든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창작의 부담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언어와 교감할 수 있는 시간. 좋은 문장을 음미하며 그것을 내 손으로 재현해내는 즐거움.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우리는 점차 언어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키워간다.

필사에는 특별한 리듬이 있다. 책에서 문장을 읽고, 펜을 들어 노트에 옮기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반복적인 동작. 이 단순한 패턴이 명상과 같은 효과를 만들어낸다. 마음이 산란할 때일수록 이 리듬의 힘이 크게 느껴진다. 한 글자씩 써 내려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호흡을 고르게 된다. 급하게 치달리던 마음이 펜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가라앉는다. 외부의 소음은 여전하지만, 그 소음들이 더 이상 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한다. 필사하는 순간만큼은 오롯이 나와 문장만이 존재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배운다. 고요함이란 모든 소리를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소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찾는 것이라는 사실을. 필사는 그런 중심을 만들어가는 연습이다.

필사를 하다 보면 완벽하지 않은 글씨체와 마주하게 된다. 삐뚤어진 줄, 고르지 않은 글자 크기, 때로는 오탈자까지. 하지만 이런 불완전함이 오히려 필사의 매력이다. 인쇄된 활자와는 다른, 손으로 쓴 글자만이 가진 따뜻함이 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완벽을 추구하느라 지쳐있을 때, 필사는 불완전함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삐뚤어진 글씨 속에서도 진심을 읽을 수 있고, 서툰 손길에서도 정성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말한다. "나는 틀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이 겸손한 인정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의 시작이 아닐까. 필사를 통해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실수도 과정의 일부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필사는 근본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다. 조용한 공간에서 나와 책, 그리고 펜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고독한 시간이 결코 외롭지 않은 이유는, 문장을 통해 작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을 베끼면서 그의 고뇌를 함께 느끼고,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을 따라 쓰며 그녀의 섬세한 감성에 동조한다. 시공을 초월한 만남이 일어나는 것이다. 혼자이지만 혼자가 아닌,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은 시간이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서 우리는 고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고독이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깊이 있는 만남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자신과의 진솔한 대화, 좋은 책과의 깊은 교감은 모두 고독한 시간에서만 가능하다.

필사는 마음의 정원을 가꾸는 일과 같다. 좋은 문장들을 하나씩 심어가며 내면의 풍경을 바꿔간다. 거칠었던 마음의 땅이 점차 부드러워지고, 메마른 감성에 촉촉한 습기가 돈다. 어떤 날은 카뮈의 철학적 사유를, 어떤 날은 헤세의 서정적 감성을 심는다. 동양의 지혜와 서양의 사상이 한 권의 노트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렇게 모인 문장들이 내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발아한다. 작가는 "춥고 시린 날을 대비해 노트에 차곡차곡 모은 문장들이 장작처럼 불을 지펴 당신을 따뜻하게 데워줄지 모른다"고 했다. 필사를 통해 모은 문장들이 삶의 어려운 순간에 위로와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필사는 고요를 향한 여행이다.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고요한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 한 글자씩 써가며 점차 내면의 평화에 이르는 수행이다. 이 여행에는 목적지가 없다. 완벽한 고요에 도달하겠다는 목표보다는, 매일매일 조금씩 더 평온해지는 과정 자체가 소중하다. 아직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무언가가 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걷는 길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든다. 좋은 문장을 만나 그것을 자신의 노트에 옮겨 적는다. 그 작은 행위 속에서 마음이 조금씩 고요해져 간다. 이것이야말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소중한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필사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 소박한 행위 속에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고요해지기 위해 쓰는 것, 그리고 쓰면서 고요해지는 것. 이 아름다운 순환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휴식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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