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레킹의 원리 - 신비한 자연과 직립보행의 만남
이환종.조태봉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종종 삶의 속도에 지쳐간다. 빌딩 숲 속에서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바라보며,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우리 안에서 무언가가 갈증을 호소한다. 바로 '걷기'에 대한 원초적 욕구다. 이번에 읽을 기회가 있었던, 이환종과 조태봉이 공저한 『트레킹의 원리』는 트레킹 기법을 전수하는 매뉴얼을 넘어서, 걷기라는 행위가 지닌 철학적 깊이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는 종합적인 인문서다. 43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트레킹이 레저 활동만이 아닌, 인간 존재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생명 활동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저자들은 트레킹의 근원을 인류의 진화사에서 찾는다. 수백만 년 전부터 우리 조상들은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걸었고, 이러한 보행 유전자가 현재의 우리에게도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전자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책 속 인용구는 다소 자극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현대인이 느끼는 트레킹에 대한 갈망은 단순한 취미나 유행이 아니라, 수천 세대에 걸쳐 축적된 유전적 정보가 요구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해석이다. 특히 '바이오필리아(Biophilia) 가설'을 통해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나무와 녹지가 사람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면서 인지력을 증강시킨다는 과학적 사실은,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이 왜 산과 들로 향하는지를 명확히 해준다. 저자들은 리처드 도킨스의 '밈(meme)' 개념을 차용해 트레킹을 분석한다. 밈이란 유전자와 구별되는 문화적 복제의 기본 단위로, 트레킹 문화 역시 하나의 강력한 밈으로 작용하여 현대 사회에 확산되고 있다는 관점이다. 이러한 접근은 트레킹을 개인적 취향의 영역에서 끌어올려, 인류 문화사의 맥락에서 바라보게 한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트레킹이 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다.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이 아무런 인지 활동을 하지 않을 때 활성화되는 뇌의 특정 부위가 평소 연결되지 못하는 뇌의 각 부위를 연결시켜 통찰력을 이끌어낸다고 설명한다. 이는 니체의 "진정 위대한 모든 생각은 걷기로부터 나온다"는 명언과 일맥상통한다. 걷기라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가 오히려 창의적 사고와 깊은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독일 철학자 틸리히의 구분을 인용하여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이라고 정의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트레킹은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자신과의 진정한 대화가 가능해진다는 해석이다. 몽테뉴의 말을 빌려 "휴식의 의미를 홀로 있는 고독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 대목에서는, 현대인들이 놓치고 있는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트레킹이 신체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책은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폐와 심혈관 기능 강화, 지방 제거, 면역력 강화, 두뇌 건강 향상, 뼈 건강, 근력 및 근지구력 향상, 우울증 치료, 암 예방 등 트레킹이 가져다주는 건강 효과는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다. 특히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각종 성인병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자연스럽게 해소할 수 있는 가장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점에서, 트레킹은 개인의 건강관리는 물론 사회적 의료비 절감에도 기여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닌다.
트레킹의 구체적인 기술과 방법도 이야기 해준다. 올바른 걷기 자세부터 시작해서 트레킹 폴 사용법, 독도법, 배낭 꾸리기, 백패킹 실전, 극한 상황 대처법까지 실전에서 필요한 모든 정보를 망라한다. 특히 트레킹 폴 사용법을 평지, 오르막길, 내리막길, 돌다리나 계곡 건널 때 등 상황별로 세분화해서 설명한 부분은 매우 실용적이다. 또한 발에 물집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트레킹용 양말 안에 얇은 폴리에스테르 양말을 함께 신으라는 조언 같은 세심한 팁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초보자들에게는 든든한 지침서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나 당장 트레킹을 시작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무작정 히말라야나 안데스 산맥으로 떠날 수는 없는 법. 저자들도 강조하듯이 "집 주변과 가까운 산책로를 걷거나 산행을 떠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동네 뒷산이나 근린공원의 산책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트레킹 코스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목적지의 웅장함이 아니라 걸으면서 자연과 교감하고 자신과 대화하는 자세다. 저자들이 강조하는 트레킹의 핵심은 "최소한의 준비물로 몸과 마음의 자유로움을 얻는다는 마음"이다. 물질적 소유욕을 줄이고 자연과의 순수한 만남에 집중하라는 철학적 메시지다. 트레킹은 소비 지향적인 현대 문화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비싼 장비나 호화로운 숙박시설 없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에서 소개하는 "현상학적 태도"는 트레킹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편견을 버리고 일어나는 현상을 중심으로 의식을 개입하여 직관을 발휘하는 태도는, 트레킹을 통해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다. 산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 - 새소리, 바람소리, 나무의 냄새, 돌멩이의 질감 - 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일상에서도 보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E.M. 포스터는 "기차나 자동차는 육체의 수동성과 세계를 멀리하는 길만 가르쳐주지만, 걷기는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고 했다. 트레킹의 본질을 정확히 포착한 표현이다. 트레킹은 단순히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해가는 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