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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민주주의를 경험한 나라 - 분열의 정치를 넘어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시간 ㅣ 서가명강 시리즈 41
강원택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8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2024년 12월 3일, 우리는 예상치 못한 충격을 경험했다. 민주화 이후 40여 년간 공고히 다져왔다고 믿었던 민주주의의 토대가 한순간에 흔들렸다. 그날 밤, 많은 시민들이 느꼈던 당황감과 분노는 정치적 사건에 대한 반응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의 안전망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근본적인 불안이었다. 비상계엄이라는 극단적 상황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는 얼마나 튼튼한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이어져 온 민주적 질서가 이렇게 쉽게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런 위기를 다시 겪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강원택 교수의 <벼랑 끝 민주주의를 경험한 나라>를 읽으며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돌이켜보면, 우리 정치에서 '대화'라는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다. 정치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지지층을 향해 더 큰 소리로 외칠 뿐이다. SNS와 유튜브의 시대가 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알고리즘은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을 골라서 들려주고, 우리는 점점 더 좁은 세계 안에 갇혀간다. 정치적 스펙트럼이라는 말도 이제는 무의미해 보인다. 마치 동전의 앞뒤처럼, 우리 편 아니면 적일 뿐인 세상이 되어버렸다. 중간지대는 사라지고, 회색은 용납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흑백으로 나뉘어야 하고,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면 배신자로 낙인찍힌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타협하고 양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아니면 우리 시민들 스스로가 먼저 변해야 하는 것일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처럼 서로를 적으로만 바라보는 정치 문화가 계속된다면, 12월 3일과 같은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지금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화와 타협이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시대가 그랬다. 물론 그들의 모든 결정이 완벽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보여준 사면 조치들은 지금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절에는 정치지도자들이 상대방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았다. 견해 차이는 있어도 대화의 테이블에는 함께 앉을 수 있었다. 서로를 정당한 경쟁상대로 인정했고, 때로는 국익을 위해 어려운 결정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문화가 사라졌다. 상대방과의 대화 자체를 배신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지지층이 원하는 말만 하게 되었고, 진정한 리더십은 실종되었다. 정치가 시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 자신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새로운 미디어 환경도 이런 분열을 가속화했다. 과거에는 몇 개의 주요 언론사가 정보의 흐름을 통제했다면, 이제는 누구나 쉽게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올 수 있게 되었고, 기존 언론의 독점적 지위도 약화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문제들도 생겼다.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만큼 빠르게 확산되고, 선정적이고 극단적인 내용일수록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소비하게 되었고, 이는 사회 전체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특히 정치 관련 콘텐츠에서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냉정한 분석보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내용이, 균형 잡힌 시각보다는 일방적인 주장이 더 인기를 끈다. 미디어 생태계 자체가 분열을 조장하는 구조로 변한 것이다.
12월 3일 사태는 우리 정치 제도의 한계도 명확히 드러냈다. 특히 대통령 중심제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한 사람이 가진 권력이 너무 크고, 그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물론 국회가 신속하게 계엄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국가 전체가 위기에 빠질 수 있는 구조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권력의 분산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하고, 국회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 동시에 양당 구조를 넘어선 다당제로의 전환도 고려해야 한다. 두 개의 거대한 정당이 모든 것을 독점하는 구조에서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어렵다. 선거제도 개혁도 시급하다. 지역구 중심의 선거제도는 지역 갈등을 조장하고, 소수 정당의 원내 진출을 막는다. 비례대표 확대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가 국회에서 들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제도 개혁만으로는 부족하다. 결국 민주주의의 주인은 시민이다. 우리 스스로가 변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제도를 만들어도 소용없다. 무엇보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높여야 한다. 선거 때만 잠깐 관심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도 정치인들의 활동을 지켜보고 평가해야 한다. SNS에서 떠도는 단편적인 정보에 의존하지 말고, 직접 찾아보고 판단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또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도 대화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극단적인 목소리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흑백논리로 재단하려는 시도를 경계해야 한다.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쉬운 해답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시민 교육의 중요성도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단순히 정치 제도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치와 원칙을 내재화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역사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과정을 거쳐 민주주의를 이루어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민주주의가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동시에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도 중요하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고, 다양한 관점에서 사안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 12월 3일의 충격은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민주주의는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끊임없이 노력하고 지켜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