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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내가 원한 것
서한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뜨거운 여름날 여름을 주제로 한 산문집을 읽어 보았다. 서한나의 <여름에 내가 원한 것>을 덮고 나니, 마치 한여름 오후 에어컨이 고장 난 방에서 나온 것처럼 온몸이 뜨겁다. 책은 계절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삶의 태도에 관한 고백서였다. 작가가 말하는 '여름의 상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작가가 여름을 "무언가를 향한 안달복달과 그 후에 오는 소강상태"라고 정의했을 때, 나는 순간 움찔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간절히 원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그것을 얻거나 잃은 후에 오는 허탈감. 그 반복되는 리듬이 여름의 본질이라니 말이다. 우리는 흔히 여름을 뜨겁고 화려한 계절로만 생각하지만, 서한나는 그 이면의 권태와 나른함도 함께 포착한다. 밤새 뒤척이다 잠든 후 오는 늦은 오후의 무기력함, 무언가를 기다리지만 정작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는 막막함. 이런 감정들이 여름이라는 계절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는 것을 그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 역시 여름이면 늘 무언가를 기다리는 기분이 된다. 특별한 만남이나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들. 그 사이의 간극에서 느끼는 애매한 감정을 작가는 너무나 정확하게 포착해냈다.
"사랑의 시작은 그와 헤어지고 그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오래 멈춰 서 있었다.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 만남이 아니라 이별 후 그리움이라는 역설. 하지만 생각해보니 그게 맞다. 진짜 사랑은 상대가 없을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작가는 과거의 연인과 함께 들었던 노래, 함께 달렸던 길이 그 사람 없이는 더 이상 같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랑은 결국 기억을 재편하는 작업이고, 일상의 모든 것에 그 사람의 흔적을 새겨넣는 일이다. 그리고 이별 후에는 그 모든 것들이 아프게 남는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어떤 사람과 함께 자주 가던 카페에 혼자 갔을 때의 어색함, 그 사람이 좋아했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밀려오는 복잡한 감정들. 사랑이 끝난 후에도 세상은 그 사람의 흔적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작가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모르는 언어로 하는 사랑 고백 같았다"는 표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는 통찰. 눈빛으로, 침묵으로, 아주 작은 몸짓으로 전해지는 감정들이 오히려 더 진실할 때가 있다. 하지만 작가는 동시에 "모든 것을 말로 확인하는" 자신의 성향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확신을 원하지만 확신할 수 없는 관계의 모호함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간절함. 이런 솔직함이 이 책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누구에게나 방어벽이 있으며 그것을 무너뜨리지도, 들여다보지도 않으며 산다".. 마치 차가운 물을 끼얹은 것 같았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실망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보호하는 법을 배우는 것.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친밀감의 가능성도 함께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현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보다 자신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다는 것, 그것도 하나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이런 태도에서 나는 작가의 성숙함을 본다.
"여름밤은 아무리 써도 닳아지지 않는다"는 표현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여름밤의 그 특별한 마법 같은 것. 시간이 무한히 늘어나는 것 같은 착각,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작가는 이런 감각을 포착하는 데 탁월하다. 습한 공기 속을 걸어 들어가는 기분, 자전거를 타고 천변을 달리는 사람들, 전화를 하며 같은 길을 반복해서 걷는 학생. 여름밤의 풍경들이 하나하나 살아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습기가 싫다고 말하지만 정말은 습기가 좋은" 우리의 이중적인 마음과 맞닿아 있다. 작가가 "공간에 얽혀 있는 기억이 너무 무섭다"고 말할 때, 나는 깊이 공감했다. 어떤 장소에 가면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경험.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면서 현재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기억들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고시마의 바다, 남해의 운동장, 태국의 어느 섬. 이런 공간들은 지명만이 아니라 감정의 지도가 된다. 작가는 이런 장소들을 통해 자신의 사랑과 그리움을 구체적인 형태로 남겨둔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여름의 상태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였다. 작가에게 여름은 하나의 삶의 철학이다. 권태와 매혹이 공존하는 복잡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과거의 기억을 그리워하면서도 현재를 포기하지 않는 것,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여름이 아닌 계절에도 여름밤의 냄새를 찾아다니는 작가의 모습에서, 나는 잃어버린 감각들을 되찾으려는 인간의 애틋한 노력을 본다.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찾아 헤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일이다.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섞이는 것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싶다. 타인과 섞이고, 과거와 현재가 섞이고, 기대와 실망이 섞이는 것. 작가는 그런 혼재 상태를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여름에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아니,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다. 노천에서 사람 구경을 하고, 습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누군가를 만나러 먼 곳까지 가는 것. 이 모든 행위들이 결국은 세상과 섞이려는 시도들이다. 안전한 거리를 포기하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짜 경험을 추구하는 것인 것 같다. 이제 끝이 없을 듯한 무더위도 지나가고 가을이 오고있다. 가을이 기다려 진다... 계절이 바뀌어도 이 온도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여름의 상태로 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삶의 모든 순간을 감각적으로, 충만하게 경험하겠다는 선언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