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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성의 함정
무라카미 야스히코 지음, 김준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8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재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숫자로 말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학생들은 편차치로 자신의 가치를 측정당하고, 직장인들은 성과 지표로 평가받으며, 환자들은 확률과 리스크로 자신의 미래를 계산한다. 이러한 '객관적' 지표들이 진리를 대변한다고 믿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일본의 사회학자가 제기하는 이 근본적 질문은 현대인이 직면한 실존적 고민의 핵심을 건드린다. 저자는 <객관성의 함정>에서 새로운 관점의 객관성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객관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교적 최근의 발명품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객관적'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주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의미의 객관성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때, 우리는 객관성을 절대적 진리가 아닌 특정한 시대적 산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객관성의 역사는 권위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17세기 과학혁명 이전까지 서구 사회에서 진리의 최종 심급은 신과 교회였다. 성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이 절대적 권위를 지녔던 시대에, 갈릴레오와 같은 과학자들의 발견은 기존 질서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었다. 하지만 신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새로운 형태의 진리 검증 방식이 필요했고, 초기에는 권위 있는 학자들의 증언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흥미롭게도 초기 과학 연구 성과의 검증 모델은 재판에서 차용되었다. 17세기 런던 왕립협회에서는 권위 있는 학자가 실험에 입회하여 그 신빙성을 증언함으로써 진리를 판단했다. 이는 '인간의 증언'을 '사물의 증거'보다 우선시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점차 이러한 인간 중심적 검증 방식은 한계를 드러냈고, 기계에 의한 측정이 더욱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기계적 객관성의 확립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객관성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먼저 존재했고, 사진과 같은 신기술은 그러한 요청에 부응하는 수단이 되었다. 사진 기술 자체는 위조와 수정이 가능했지만, 그것이 '객관적'인 것으로 여겨진 것은 기계적 객관성에 대한 강한 욕망 때문이었다. 19세기 말 물리학자 앙리 푸앵카레의 통찰은 객관성 개념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그는 과학의 객관적 가치가 "사물의 진정한 성질"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진정한 관계"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개별 대상에서 법칙성으로, 구체적 사물에서 추상적 관계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결국 자연과학은 자연의 리얼한 질감을 놓치고 수치화된 자연만을 다루게 되었다.
자연과학에서 시작된 객관화의 흐름은 곧 사회과학과 인간 연구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는 자료 수집, 자료 비판, 사실 기술이라는 체계적 방법론을 통해 역사학을 '과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사회학 역시 비슷한 시기에 객관성에 근거하는 학문으로 성립되었다. 이로써 인간의 삶과 사회는 사람들로부터 분리되어 객관적 관찰과 측정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교육 현장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본의 편차치 제도는 1957년 한 중학교 교사가 진로 지도의 객관적 지표로 도입한 것이 시초였다. 원래 교사들의 주관적 판단을 보완하려는 목적이었지만, 편차치는 점차 독자적 생명력을 갖게 되어 교육의 목적 자체가 되어버렸다. 영어를 배우는 목적이 영어 사용이 아니라 영어 시험의 편차치 향상이 되는 것처럼, 수단이 목적을 대체하는 전도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단지 교육 분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대학에서 교수들은 논문 편수와 연구비 확보액으로 평가받고, 학부는 수치적 목표 달성률로 평가받는다. 개인부터 조직,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서 수치에 근거한 계획 수립과 평가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전면적 수치화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통계의 지배 아래 놓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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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의 니시나리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풀뿌리 운동들은 수치와 경쟁이 아닌 다른 원리로 조직되는 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곳의 다양한 커뮤니티들은 강압적 규범이나 경제적 가치가 아닌 개개인의 목소리와 작은 바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어린이 식당, 장애인 지원 단체, 다문화 가정 지원 네트워크 등이 서로 연결되어 촘촘한 안전망을 형성한다. 이러한 커뮤니티의 특징은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연령, 장애 여부, 국적 등의 기준으로 지원 대상을 나누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받아들인다. 이는 기존 제도의 '틈새'에 떨어진 사람들을 구제하는 역할을 한다. 정부의 복지 제도가 세분화된 기준으로 인해 배제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작은 커뮤니티만으로 모든 사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제도적 차원에서의 변화가 필요하다.
객관성의 함정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타인과 관계를 맺는 방식, 자신의 가치를 정의하는 방식과 직결되어 있다. 수치와 통계가 제공하는 정보가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인간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객관성과 주관성, 일반성과 개별성, 법칙과 우연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편차치로 환원될 수 없는 각자의 흥미와 재능, 통계로 포착되지 않는 개별적 경험의 가치, 확률 계산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만남의 소중함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아무도 외면당하지 않는 세계'를 만들 책임이 있다. 그것은 수치적 우수성이 아닌 존재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는 세계, 경쟁이 아닌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 효율성보다 돌봄을 중시하는 세계다. 이러한 사회는 먼 미래의 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작은 실천들을 통해 만들어갈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다. 객관성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숫자 너머에 있는 인간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 통계 뒤에 숨겨진 개별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 그리고 모든 존재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객관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