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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긋다 - 서예와 캘리그라피에서 인생을 배우다
이경화 지음 / 머메이드 / 2025년 7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메마른 사막에 서 있는 듯한 기분, 숨 쉴 틈 없이 내달리는 일상 속에서 문득 멈춰 선 순간, 저는 제 자신이 흐릿해져 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정작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계획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지만, 제 마음의 스케줄은 텅 비어 있었고, 그 공허함은 끊임없이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연극 무대 위의 배우처럼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수록, 가면 뒤에 숨겨진 진짜 '나'는 점점 더 희미해져 갔습니다. 어둠 속을 헤매는 듯한 그 답답함 속에서, 저는 비로소 제 삶에 ‘쉼표'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경화님의 <선을 긋다>. 그때,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서예'였습니다. 단정하게 놓인 붓과 묵, 그리고 새 하얀 화선지의 모습은 마치 고요하고 넓은 호수와 같았습니다.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제 세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 단순함이 저를 이끌었습니다. 처음 붓을 잡았을 때의 어색함과 서투름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 손끝에서 떨려 나오는 선들은 제 마음처럼 불안하고, 삐뚤빼뚤하며,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미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붓이 화선지에 닿는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이 멈추고 오직 붓과 제 호흡만이 존재하게 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제 안에 갇혀 있던 또 다른 저를 만나는 첫 만남이었습니다.붓을 들어 선을 긋는다는 행위는 삶에 새로운 '경계'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나'를 규정하던 외부의 시선과 타인의 기대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 오직 저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죠. 매일 아침, 저는 엄마와 아내라는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붓을 잡았습니다. 그 시간은 마치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서는 듯한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가늘고 섬세한 붓끝에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몰두하는 순간, 저는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외부의 혼란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 조용한 시간은, 마치 깊은 물속으로 잠수하여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과 같은 평온함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저는 그제야 제가 숨 쉴 수 있는 자유를 찾았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그 과정이 늘 평화로 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붓을 들었을 때에도 마음은 여전히 과거의 아쉬움에 머물러 있거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흔들리곤 했습니다. '잘 쓰고 싶다'는 완벽주의적인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저는 번번이 좌절의 늪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잘 쓰려는 나를 내려놓는 것이 힘을 빼는 과정이었다"는 깨달음은 제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서툴러도 좋다는 마음으로 붓을 놀렸습니다. 의도치 않게 휘어진 선, 먹물이 뭉개진 흔적들조차 제 삶의 솔직한 고백처럼 느껴졌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기 인정과 다독임 속에서, 저는 비로소 진정한 치유의 힘을 발견했습니다. 제 감정들이 글씨를 통해 흐르면서, 우울감조차 저를 더 깊이 돌보라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서예를 평면의 예술로만 보았던 시선도 점차 변화했습니다. 처음에는 붓으로 글자의 형태를 나타내는 일차원적인 관점이었다면, 곧 내면의 생각을 점과 획에 응축하는 이차원적인 시각으로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획을 긋는 순간 비로소 드러나는 ' 여백 '의 아름다움은 제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그 여백은 마치 인생의 숨겨진 의미처럼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서예가의 삶과 철학이 담긴 획을 통해, 작품을 보는 저의 현재가 연결되는 사차 원적 경험은 더욱 경이로웠습니다. 붓을 드는 행위가 오랜 세월 자신을 성찰하고 삶의 철학을 담는 수신의 한 방법이라는 깨달음은 제 삶의 깊이를 더해주었습니다. 이경화 작가님에게 붓이 거울이자 나침반이며 고요한 방이었다는 말씀처럼, 서예는 제게 자기 자신을 비추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 되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세상의 흐름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제 중심을 붙잡아주는 굳건한 닻과도 같았죠. 저는 서예를 통해 제가 어떤 상태인지,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붓을 잡는 순간, 세상의 번잡함은 사라지고 오직 '나'만이 존재합니다. 이 고요한 성찰의 시간을 통해, 저는 제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재조정하고, '나다움'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습니다.책에서 언급된 "마음은 불씨 같은 것, 말 한마디에 사그라들다가 되살아나기도 한다"는 문장은 제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붓으로 글을 쓰는 시간이 결국 제 말의 온도를 바꾸고, 타인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며, 삶의 감도를 높여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작은 변화가 불씨가 되어 서로를 변화시킨다는 말씀처럼, 내면의 평화를 찾아가는 저의 작은 발걸음은 주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온해지자, 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제게 맞춰 차분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책은 제게 진정한 '삶을 살아내는 법'을 알려준 귀한 안내서였습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서예처럼, 자신을 비추고 돌아볼 수 있는 '거울' 같은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서든, 글쓰기든, 조용한 산책이든,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통해 삶의 소란함 속에 숨겨진 제 본연의 리듬을 되찾는 것입니다.저는 붓을 들고 선을 긋습니다. 그 선 하나하나에 저의 고백과 바람, 그리고 감사의 마음을 담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다만, 이 선들이 제 삶의 여백을 아름답게 채우고,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지를 말해주는 증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붓끝에서 시작된 이 작은 움직임이 제 삶 전체에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제 삶에 이 고귀한 '선을 긋는' 여정을 계속 이어나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