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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 - 우리가 법을 믿지 못할 때 필요한 시민 수업
신디 L. 스캐치 지음, 김내훈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7월
평점 :
품절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법은 정의다"라는 명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습니다. 법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며,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는 최후의 보루이자 신성한 장치로 여겨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습된 이 견고한 믿음은 우리가 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버드 로스쿨 교수인 신디 L. 스캐치의 저서 <법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배신하는가>는 이러한 통념에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를 불편한 진실의 한가운데로 이끌어 갑니다.
과연 법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편이었을까요? 혹은 때로는 민주주의를 침식하고 권위주의의 도구로 변모할 수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이 책은 법이 권력의 균형을 이루는 이상적인 수단이 아니라, 특정 권력의 편에 서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도구로 변질될 수 있음을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합니다. 대통령의 불법적인 계엄선포와 새로운 정권의 탄생을 지켜본 우리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지켜지는지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법의 ' 배신 ' 이라는 개념은 얼핏 들으면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법치주의(rule of law)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이며, 이는 법의 지배를 통해 자의적인 통치를 막고 예측 가능하며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이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캐치 교수는 바로 이 법치주의 ' 라는 단어가 주는 안도감이 실제로는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고, 법이 소수의 기득권 이 익을 위해 교묘하게 남용될 수 있는 위험성을 은폐한다고 지적합니다. 책에서 드러나는 법의 변질 과정은 법리적 해석의 문제를 넘어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이며, 시민들이 이 작동 방식을 제대로 이해하고 경계하지 않는 한 언제든 재현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합니다. 법은 공정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믿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집행 과정에서 편향성을 띠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헌법과 법률은 존재하지만, 이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사법부가 정치적 영향력에 흔들리거나, 법 자체가 태생적으로 특정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면, 법은 더 이상 정의의 실현 도구가 아닌 불의를 정당화하는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법이 오히려 그들의 목소리를 침묵시키고 배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상은 이러한 법의 변질이 가져오는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입니다. 법이 있다고 해서 곧 정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스 캐치 교수의 주장은, 우리가 법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복적인 믿음을 거두고 그 실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하는 준엄한 경고인 것입니다. 법은 결코 그 자체로 정의를 보장하는 자동 장치가 아니며, 그것이 어떻게 제정되고, 해석되며, 집행되는 지에 따라 얼마든지 정의를 배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법의 '배신'은 때로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헌법의 영역에서도 발생합니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국가 권력을 제한하는 최고 규범으로서, 그 역할은 시민의 자유와 손을 수호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스캐치 교수는 충격적이게도 헌법이 국민의 권리를 지키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다양한 국가 사례를 통해 역설합니다. 특히 인종차별, 성차별, 소수자 억압과 같은 문제에서 헌법은 때때로 기득권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역사적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수단으로 이용 되기도 했습니다. 헌법의 해석과 적용이 소수의 권한 있는 자들에 의해 좌우될 때, 그 최고 법규는 민주적 가치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스캐치 교수는 법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국가폭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칩니다. 국가폭력은 물리적인 강제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가가 적법한 절차'를 따르고 있다는 명분 아래 사회적 소수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며, 그들의 기본적인 권리마저 박탈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절차적 정의'로 포장된 불의야말로 가장 위험한 형태의 배신이라는 스캐치 교수의 지적은 매우 날카롭습니다. 겉으로는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특정 집단의 억압과 착취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인종차별적 판결, 여성의 낙태권을 박탈하는 결정,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 주장을 억압하는 사례들은 이러한 법의 배신이 초래한 참혹한 결과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비단 멀리 떨어진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국 사회 역시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의와 씨름해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국가보안법의 적용, 특정 사안에 대한 형법 조항의 과도한 해석, 경찰권의 남용 등은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갈등하는 지점들입니다. 법이 그 목적과 다르게 특정 권력을 옹호하고 시민을 억압하는 도구로 전락할 때, 민주주의는 형태만 남은 껍데기가 되고 시민의 삶은 끊임없이 위협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의 배신이라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스캐치 교수는 여기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합니 다. 법과 제도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낼 궁극적인 열쇠는 바로 '시민'에게 있다고 강조합니다. 법률 지식은 더 이상 전문가들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모든 시민이 법의 기본 원리와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나아가 법이 사회에서 어떻 게 작동하며 권력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부제가 말하는 ‘시민 수업'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시민 수업'은 법률 지식의 습득을 넘어섭니다. 이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법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법 집행 과정을 면밀히 감시하며, 더 나은 법과 제도를 위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 는 과정입니다. 헌법의 기초를 다지고 그 역사적 변천을 아는 것은, 현재 법이 어떻게 형성되었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이해 하는 첫걸음이 됩니다. 또한, 사법체계의 공정성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입법 과정 및 사법 절차에 시민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은 법이 특정 권력이나 기득권층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중요한 방어기제가 됩니다. 민주주의란 책상 위의 문서나 제도에 의 해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이상적인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민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 그리고 때로는 불편한 질문과 투 쟁을 통해 비로소 유지되고 발전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와 같습니다. 법이 민주주의의 진정한 수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시민 각자가 법의 감시자이자 주권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인지하고, 필요하다면 잘못된 법과 불의한 집행에 대해 목소리를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시민의 능동적인 역할이야 말로 법이 그 본연의 정의로운 목적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의 든든한 울타리로 기능할 수 있게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스케치 교수는 법이 민주주의를 배신하지 않고 그 진정한 수호자로서 기능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몇 가지 핵심적인 조건 들을 제시합니다. 첫째, 권력 간의 견제와 균형이 명목상이 아닌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삼권분립 원칙이 제대로 구현될 때, 특정 권력에 의한 법의 남용을 막을 수 있습니다. 둘째, 사법부는 정 치적으로 완벽히 독립되어야 하며, 그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공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재판관의 양심과 법리에 따라 오 직 법만을 판단하는 독립적인 사법 시스템이 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룹니다. 셋째, 입법 과정은 폐쇄적인 소수의 결정이 아니라, 시 민사회의 다양한 의견과 피드백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반영해야 합니다. 시민 참여를 통해 제정된 법이야말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넷째, 헌법은 고정된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적 가치와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며 유연하게 해석되고 때로는 개정될 수 있어야 합니다. 헌법의 살아있는 정신은 시대와의 소통에서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시민은 법률을 단지 준수해야 할 명령으로 여기는 것을 넘어, 법률을 감시하고 비판하며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주체로서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법은 정지된 원칙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는 스케치 교수의 주장은 법의 진정한 가치가 역 동적인 시민 참여에 있음을 시사합니다.
스캐치 교수의 연구는 주로 미국 사회의 사례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책이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매우 날카롭고 시의적 절합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법치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둘러싼 논쟁, 검찰권의 행사, 헌법재판 소의 역할, 그리고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의 설립 등 법과 권력의 관계를 둘러싼 뜨거운 이슈들은 스캐치 교수의 통찰이 얼마나 우리 현실에 깊이 와닿는지를 보여줍니다. 시민들은 법을 두려움의 대상이나 절대적 권위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대신, 법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제대로 수호하고 있는지,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에 맞서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비판 적인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법은 결코 권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시민 모두의 삶과 자유를 위한 장치여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 전환은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로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책은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고 지 적인 자극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능동적인 '실천'을 요구하는 행동 지침서에 가깝습니다. 책을 읽으며 법에 대한 기존의 믿음이 흔들리는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고,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불의에 분노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과 분노야말로 변화를 향한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법을 아는 것이 곧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국민은 법의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라,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체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입법 과정 에 대한 감시, 사법 체계의 투명성 요구, 그리고 때로는 부당한 법과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시민 불복종의 용기까지, 민주주의는 시민의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비로소 숨을 쉬고 성장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