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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지금 어디에 있니 - 역사적 트라우마에 저항하는 단독자 1949~1992 ㅣ 아티스트웨이 2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5년 7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과 함께 성장했다. 대학 시절, 그의 책들은 마치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비밀 통로 같았다. 당시에는 그저 쿨한 문장들과 낯선 서사 구조에 매료되어 읽었다. 현실의 권태를 잠시 잊게 해주는 시원한 콜라처럼, 혹은 몽롱한 마약처럼 그의 소설은 나를 다른 차원으로 이끌었다. 주인공들의 고독과 방황,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기묘한 유머와 판타지는 20대였던 나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그의 소설이 던지는 깊은 질문이나 숨겨진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그저 그 분위기 속에 잠기는 것을 즐겼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그의 작품을 다시 마주할 때마다 나의 시선은 조금씩 달라졌다. 한때는 그의 태도에 반대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그의 소설이 지나치게 개인의 내면에만 천착하거나, 혹은 때 때로 등장하는 성 묘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상실'과 '고독'이 너무나 보편적이어서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당시에는 그의 문학적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그에게 열광하는지 온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나 역시 그를 '쓰레기'라 하했던 비평가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이 마치 현실 도피적인 행위처럼 느껴져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그러나 이번에 접한 김응교님의<무라카미하루키 지금 어디에 있니>는 하루키 소설에 대한 나의 오래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응교 작가의 시선처럼, 하루키의 문학을 개인의 내면 탐구나 판타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역사의식'과 '트라우마'라는 거대한 맥락 속에서 이해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하루키 소설이 우울한 까닭은 그의 무의식이 아직 장례식을 치르고 있기 때 문"이라는 관점은 나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섹스를 하고 와인을 마셔도, 세상은 아직 슬픔이 해결되지 않은 상중이라는 사실을 늘 의식한다는 그의 통찰은, 하루키 소설의 밑바닥에 흐르는 설명할 수 없었던 우울감의 근원을 명확히 밝혀주었다. 하루키의 소설에 ‘역사가 없다'는 세간의 평가는 어쩌면 피상적인 이해였을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가 난징 학살 사건과 관계있는 부대 출신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평생 그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외롭게 투쟁하는 모습은 개인적인 고뇌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 세대가 저지른 죄악, 즉 '시스템 악'에 맞서 '기억의 복원'을 시도하는 하루키 자신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그가 말하는 '시스템 악'에는 일본의 군부, 부패한 자본주의, 사이비 종교 단체의 트러스트다. "자기 나라에 좋은 역사만을 젊은 세대에 전하려는 세력에 맞서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소설 속에서 은유적으로 표현되던 그의 역사관이 얼마나 선명하고 단호한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이처럼 하루키의 소설은 '삭제의 죄악'에 맞선 '기억의 복원'을 시도하는, 위험하고도 용기 있는 작가적 시도였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물론, 글에서 지적하듯 하루키 소설에서 피해자의 고통이 직접적으로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비판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루키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고통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직접적인 고발 대신, 상징과 은유, 그리고 판타지라는 장치를 통해 무의식 깊숙이 자리한 트라우마를 건드리고, 스스로 그 의미를 찾아가도록 유도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이 우울한 것은, 바로 그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슬픔과 아직 끝나지 않은 '장례식' 때문이라는 것은 그의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거대한 맥락인 것 같다. 이러한 저자의 해석은 내가 하루키 소설을 '치유'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한때는 그의 소설이 그저 '힐링 마케팅'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졌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그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상실과 고독, 그리고 그들이 찾아 헤매는 '연결된 고통'의 의미는, 결국 우리 사회가 겪는 역사적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대학 때 몇 번을 다시 읽었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를 생각해 본다. 소설은 1960년대와 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와타나베가 주 인공이며, 읽으면서 남자의 심리, 청춘, 사람에 대해 알게 된 소설이다. 기츠키가17살에 죽고, 노오코가 죽고, 나가사와의 애인 하쓰미의 죽음이 있다. 죽음으로써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에 죽음이 있으며, 삶은 계속 되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상처와 고민은 삶의 일부가 되어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상처를 통해 더 강해지고 성숙해지는 경험을 한다. 당시에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감정들도 이제는 조금 더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는 힘이 생기셨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전화하며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은 아직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미도리와의 인연이 이어졌을 지, 혹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았을 지는 열린 결말로 남아있다. 삶에서 많은 관계들이 항상 명확하게 정의되거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와타나베의 마지막 질문은 비단 그만의 질문이 아닐 것이다. 시간이 지나 다시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신 것은,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을 연결하며 삶의 의미와 방향을 다시 한번 탐색하는 소중한 과정일 것 같다. 대학 시절에는 청춘의 방황과 사랑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진리를 다시한번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