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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갑은 꿈꾼다
하라다 히카 지음, 최윤영 옮김 / 모모 / 2025년 6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하라다 히카의<지갑은 꿈꾼다>를 읽으며 든 첫 번째 생각은 의외로 친숙함이었다. 일본 작가가 쓴, 일본을 배경으로 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의 인물들이 겪는 고민과 좌절, 그리고 작은 희망들이 마치 우리 옆집에 사는 이웃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문화적 차이나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본질적인 욕망과 두려움이 얼마나 보편적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소설 속 미즈호가 용돈을 아껴가며 루이비통 지갑을 사는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만의 작은 사치를 위해 몇 달간 점심값을 아끼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주식 투자로 큰 손실을 본 남편의 모습에서는 코인이나 주식으로 쓴맛을 본 지인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며 맥도널드 메뉴조차 고민하는 비정규직 여성의 현실은 한국의 청년들이 마주하는 경제적 어려움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겪는 경제적 불안과 계층 이동의 어려움, 그리고 그 속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의지는 국경을 초월한 보편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지갑이라는 소재 선택이 특히 인상적이다.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평범한 물건이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생활 패턴과 가치관, 심지어 인생관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현금을 얼마나 들고 다니는지, 어떤 카드들을 소지하고 있는지, 영수증을 정리하는 습관은 어떤지- 이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의 캐릭터를 말해준다. 하라다 히카는 이 작은 물건 하나를 통해 여러 인물들의 삶을 연결시키며, 각자의 사연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지갑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을 거치며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다양한 계층과 직업, 나이의 사람들이 돈과 맺는 관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미묘한지를 깨닫는다. 돈 그것은 꿈의 실현 도구이기도 하고, 불안의 근원이기도 하며, 때로는 관계를 파괴하는 독이 되기도 한다. 미즈호에게 루이비통 지갑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찾은 작은 사치와 자존감의 상징이었지만, 남편의 빚이 드러나는 순간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꿈의 상징이었던 것이 현실의 무게 앞에서 처분해야 할 짐이 되는 아이러니다.
소설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작가가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잘못된 투자 결정을 내린 사람들, 다단계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도덕적 우위에서 훈계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 선택들이 어떤 심리적 배경에서 나온 것인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특히 풍수를 이용해 재테크 칼럼을 쓰는 인물의 내적 갈등은 현대인의 모순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회의를 품으면서도 생계를 위해 계속해야 하는 현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끼는 자괴감과 피로감. 이는 많은 현대인들이 느끼는 직업적 딜레마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도 부동산 투자나 주식, 코인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비슷한 상황들을 자주 목격한다. 'YOLO' 나 '소확행' 같은 트렌드 역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작은 사치라도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심리와 미래를 위한 저축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은 국경을 초월한 현대인의 보편적 고민이다.
소설에서 가장 따뜻했던 순간은 역설적으로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인물들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학자금 대출에 시달리는 두 여성이 맥도널드에서 쉐이크 하나를 놓고 고민하는 장면에서, 물질적 궁핍함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인간적 온기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더 깊이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헬조선'이라는 자조적 표현이 유행하면서도, 동시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크라우드펀딩이나 기부 문화가 활발해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제목인 '지갑은 꿈꾼다'는 표현이 특히 의미심장하다. 지갑 자체가 꿈을 꾸는 것일까, 아니면 지갑을 소유한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꿈을 꾸는 것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물질적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다. 미즈호가 루이비통 지갑에 이니셜을 새기며 느꼈을 설렘과 자부심, 그리고 그것을 팔 때의 허무함은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용기를 얻는다. 꿈이 좌절되었지만, 그 경험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한 새로운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는 한국의 많은 청년들이 겪는 과정과 유사하다. 취업이나 결혼, 내 집 마련 등의 꿈이 현실의 벽에 부딪히면서 좌절하지만, 그 과정에서 더 현실적이고 자신다운 삶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 물질적 성취만이 행복의 척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관계나 소소한 일상의 즐거움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지갑은 꿈꾼다>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것이 일본 문화에 특화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보편적 경험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불안정, 미래에 대한 걱정, 작은 사치에 대한 갈망, 인간관계에서 오는 위로 - 이 모든 것들은 국경과 문화를 초월한 인간의 기본적 조건이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들이 더욱 명확해진 상황에서, 이 소설의 메시지는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며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주는 감동이 동일하다는 것은, 문학이 가진 보편적 힘을 증명한다. 서로 다른 언어로 살아가지만 결국 같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고민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공통된 경험들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