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엑시트 - 불평등의 미래, 케이지에서 빠져나오기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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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오늘도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출근한다. 똑같은 시간, 똑같은 칸, 똑같은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모두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정작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관성에 이끌려 움직일 뿐이다. 이철승 교수가 말하는 '소셜 케이지'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내가 느끼던 답답함과 갇힌듯한 감각에 드디어 이름이 붙여진 것 같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적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존재한다. 연공제라는 투명한 벽, 학벌이라는 보이지 않는 천장,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칸막이들 사이에서 우리는 숨을 쉬고 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것은, 이 케이지가 우리를 보호해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평생고용의 달콤한 환상, 나이가 들면 자동으로 오르는 임금의 확실함, 같은 회사 동기들과 함께 늙어가는 동질감. 이 모든 것들이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탈출을 꿈꾸면서도 케이지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스물아홉 살의 내 후배는 얼마 전 이런 말을 했다. "선배, 저는 이제 꿈이 없어요. 그냥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그 말을 들으며 나는 가슴이 아팠다. 언제부터 우리 청년들의 꿈이 이렇게 작아졌을까? 2024년 한국의 청년들이 마주한 현실은 참으로 냉혹하다. 비정규직 비율은 윗세대보다10퍼센트나 높고, 능력있는 인재들은 미국으로 떠나고 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를 돈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기회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곳, 나이나 학벌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그들의 이상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청년이 실리콘밸리로 갈 수는 없다. 대부분의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도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까? 이것이 바로 이철승 교수가 제안하는 '오픈 엑시트'의 핵심이다.

우리가 물려받은 벼농사 문화는 참으로 복합적인 유산이다. 협업의 정신, 집단의 조화, 위계질서에 대한 존중 - 이 모든 것들이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이것들이 지금 우리를 옥죄는 족쇄가 되기도 했다.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이 문화의 이중성을 실감한다. 팀 프로젝트를 할 때 보여주는 놀라운 협력과 조율 능력, 위기 상황에서 발휘되는 집단 결속력은 분명 우리의 강점이다. 하지만 동시에 개인의 창의성을 억누르는 분위기, 나이 순서를 따지는 경직된 소통 방식, 평가보다는 연차를 중시하는 관행들도 존재한다.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모순은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스물다섯 살의 신입사원이 AI 도구를 능숙하게 다루며 업무 효율을 높이는 모습을 보면서, 오십 대 부장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지식의 위계가 나이의 위계와 역전되는 순간, 우리의 전통적인 조직 문화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이철승 교수는 여기서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벼농사 문화의 협업 정신이 오히려 AI 시대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기계와 인간이 협력해야 하는 새로운 시대에, 상호 감시와 조율에 익숙한 우리 문화가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전망이다. 족쇄가 날개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시나리오다.

나의 여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들의 고민이 얼마나 복잡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결혼을 하면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될까?""아이를 낳으면 정말 직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출산휴가를 쓰면 동료들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닐까?" 이런 고민들이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청년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은,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일과 가정의 양립을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협업 문화가 역설적으로 출산 기피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분석은 충격적이다. 한 사람이 빠지면 다른 팀원들이 그 몫을 나누어 져야 하는 구조에서,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은민폐가 되어버린다.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제대로 된 휴가도 쓰지 못하는 현실이,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아예 출산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답은 무엇일까? 이철승 교수가 제안하는 '보편 안식휴가' 제도는 흥미로운 대안이다. 출산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직장인이 일정 기간 휴가를 가질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사회보험으로 뒷받침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출산휴가가 더 이상 '특별한 혜택'이 아니라 '보편적 권리'가 될 수 있다.

'오픈 엑시트'가 추구하는 것은 기존의 '오징어 게임' 같은 승자독식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 번의 실패가 평생을 좌우하는 사회가 아니라,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 변화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의식과 문화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인지, 현재의 선택지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나는 지금 케이지 안에 있는 건 아닌지. 답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조금씩 변화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다양한 가능성을 탐험 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연목구어의 심정으로 계속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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