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의사들
대니엘 오프리 지음, 고기탁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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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의학은 기술적 진보를 통해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지만, 여전히 환자 안전과 의료 서비스 질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30년간 현장에서 활동한 내과 의사이자 뉴욕대 의과대학 교수인 대니엘 오프리는 그의 책 <의료 사고를 일으키는 의사들>에서 이러한 의료계의 어두운 면을 정면으로 다루며, 의료 사고의 원인을 개인의 실수가 아닌 시스템의 실패로 규정한다. 그의 분석은 만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는 현 의료계의 기술적 해결책을 넘어 의료계 전반의 문화적, 구조적 변혁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와는 또다른 문제점을 많이 지니고 있는 외국의 사례이지만 많은 시사점을 이야기 해 주고 있어, 재미있게 읽었다.

오프리가 지적하는 현재 의료 시스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엄격한 위계질서와 이로 인한 소통의 단절이다. 프로노보스트가 언급한 "모든 병원에서 환자들이 서열 때문에 죽는다" 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료진 간의 수직적 관계는 하급자가 상급자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잠재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위계 문화는 여러 층위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경험이 풍부한 간호사나 다른 의료진이 의사의 결정에서 오류를 발견하더라도 이를 직접적으로 지적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의사들 사이에서도 전문 분야나 경력에 따른 암묵적 서열이 존재하여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저해한다. 또한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권력 불균형으로 인해 환자가 자신의 증상이나 우려사항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의료 실수의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은 의료진의 인지적 편견이다. 오프리는 인종적 편견과 성차별적 이중 잣대가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이러한 편견은 의료진이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환자 평가에 영향을 미치며, 특정 집단의 환자들이 부적절한 치료를 받을 위험을 높인다. 특히 응급실이나 외래 진료에서 시간 압박 상황에서는 이러한 편견이 더욱 강화된다. 의료진은 제한된 시간 내에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하는 압박감 속에서 첫인상이나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존하게 되고, 이는 오진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인다. 또한 의료진의 과도한 자신감과 불확실성에 대한 거부감은 추가적인 검토나 다른 의견을 구하는 것을 방해한다.

현대 의료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는 의료진의 극심한 업무 과부하로도 나타난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과도한 환자 부담은 의료진이 각 환자에게 충분한 시간과 주의를 기울이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료진은 생존 모드로 일하게 되며, 협업이나 심층적 사고보다는 당면한 업무 처리에만 집중하게 된다. 전자의무기록(EMR) 시스템의 도입은 표면적으로는 효율성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료진이 환자와의 직접적인 소통보다 컴퓨터 화면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만드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의사들은 진료 시간의 상당 부분을 서류 작업과 데이터 입력에 소비하며, 이는 환자와의 관계 형성과 정확한 진단에 필수적인 대화 시간을 단축시킨다. 여기에 현재의 의료 수가 체계는 의료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저해하는 구조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오프리가 지적하듯이, 동료와의 상담, 추가적인 환자 추적 관찰, 심층적인 진단 검토 등 환자 안전에 필수적인 활동들은 별도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이러한 경제적 구조는 의료진이 양적 진료에 집중하게 만들고, 질적 개선을 위한 시간 투자를 어렵게 한다. 특히 미국식 의료 시스템에서는 진료량과 수익이 직결되는 구조로 인해 의료진이 더 많은 환자를 더 빠르게 진료하도록 압박받는다. 이는 환자 한 명당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을 제한하고, 결과적으로 진단의 정확성과 환자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악순환을 만든다.

오프리가 제시하는 해결책의 핵심은 의료계 문화의 근본적 변화이다. 그가 강조하는 "지적 겸손"은 의료진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는 기존의 의사 중심적, 권위주의적 문화와는 정반대되는 접근법이다. 진정한 협업 문화 구축을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다양한 직급과 전문 분야의 의료진이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보복이나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안전한 소통 채널이 필요하다. 또한 실수나 오류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대신 시스템의 문제로 접근하는 관점의 전환이 요구된다. 의료 서비스의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환자와 의료진 간의 소통 방식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오프리는 환자와의 대화를 "가장 중요한 진단 도구"로 규정하며, 이를 위한 충분한 시간과 집중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재의 진료 환경에서는 의료진이 전자의무기록 작성에 치중하느라 환자와의 직접적인 소통이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환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의료진의 온전한 관심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의료진은 기계적인 체크리스트 작성을 넘어 환자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오프리가 제시하는 비전은 모든 참여자가 상호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협력하는 인간 중심의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지만, 의료계의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위치에서 지속적으로 노력한다면 충분히 달성 가능한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의료 시스템의 진정한 성공은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오프리가 전하는 핵심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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