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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제목이 흥미롭다. <진공 붕괴>... 학부때 잠시 배웠던 양자역학에서 나왔던 용어인 것 같은데.... 가짜 진공과 진짜 진공.... 우주의 파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현상으로 제기되었던 이론.... 저녁 하늘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우주... 내게 우주는 거대한 고요와 침묵의 세계인 것 같다. 그 침묵은 단지 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들으려 하지 않아 묻힌 목소리, 익숙한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깊은 질문들, 존재의 근본을 되묻는 정적이다. 해도연 작가는 천문학자이자 소설가다. 과학자의 시선ㅇ으로 SF 소설을 쓴다면 어떤 작품이 탄생할까? 궁금해 진다.'진공 붕괴'라는 개념은 과학적으로는 무에서 유가 발생하는 격변의 순간을 뜻하지만, 이 책에서는 내면의 질서가 무너지는 순간, 감정의 무중력 상태를 의미하는 듯했다. 인간은 고요 속에서도 무언가에 의해 계속 흔들리는 존재다. 완벽한 침묵은 없다. 언제나 파동은 존재하며, 그 파동은 때로 존재 자체를 뒤흔든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그런 진공의 경계에 서 있다. 우주선 밖에서 갑작스레 단절된 라미는 더 이상 안으로도, 밖으로도 나아가지 못하는 공간에 갇힌 채로 선택을 강요받는다. 그가 돌아가야 할 '지구'는 과연 그가 알던 그 지구일까, 아니면 상실된 기억처럼 덧없고 허상처럼 사라진 고향일까. 멸망이 예정된 유토피아 속에서 조슈는 자식을 낳고 미래를 꿈꾸는 일이 진정한 희망인지, 기만인지 묻는다. 그에게 있어서 '유토피아'란 슬픔을 잊고 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탈출선을 선택했고, 상미는 그 선택 앞에서 말문을 잃는다.타인의 뇌로 지각하는 마리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나인가?" "사랑하는 이의 기억으로 사랑을 말하는 나는 과연 온전한 주체인가?" 그녀의 혼란은 단순히 기계와 인간의 구분에 있지 않다. 그건 사랑과 기억, 그리고 정체성에 관한 깊은 철학적 질문이다. 또 콜러스 신드롬을 앓는 윤하를 잃고, 되찾기 위해 시간을 반복하는 재호는 끝없이 같은 경로를 달린다. 하지만 삶은 똑같은 궤도를 돌지 않는다. 모든 반복에는 미세한 어긋남이 생긴다. 그 어긋남 속에서 사랑은 점점 달라지고, 결국 그는 자신이 찾고자 했던 '같은 아이'를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유슬은 그런 남편에게서 자신의 삶과 아이의 존재가 몇 번이고 지워졌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를 결심한다. 이토록 인간적인 슬픔과 분노의 복합체 속에서 독자는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다.'에일-르의 마지막 손님'에서는 먹는 행위조차 공포와 존재론적 위협으로 연결된다. 지구에 도착한 외계 생명체는 인간을 지배하려 하며, 인간은 무의식 속에서 이미 그것의 일부가 되어간다. 이 소설은 인간이 주관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실제 존재 사이의 거리를 날카롭게 짚는다. 인간이 느끼는 안락함조차 실은 통제되고 조작된 것일 수 있다는 의심은,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로도 읽힌다. 그리고 '안녕, 아킬레우스'에서 피터는 사랑과 윤리 사이에서 갈등한다. 타임루프라는 SF적 장치는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계속 살아가는 일이 진정한 사랑인지, 아니면 마침내 떠나보내는 일이 사랑인지. 이 질문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질문이다. 책은 결국 인간이 자기 삶 속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결정적 순간들을 과학적 상상력 속에 녹여내어 보여준다. 그리고 그러한 상상은 결코 현실에서 멀지 않다. 그 세계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이곳, 지금 이 순간의 복사판처럼 느껴진다.이 책을 덮고 난 뒤, 나는 삶을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루프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감정에 휘말릴 때도 있다. 문득 멈춰 서서 내 마음의 진공을 들여다보게 된다. 공허는 때로 너무 깊어 그 안에서 방향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그 진공 속에서도 무언가는 움트고 있다.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 삶은 매 순간 생성 중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책 속 인물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결국 살아가기를 선택했다. 진실이 보이지 않아도, 내일이 무의미해 보여도,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조차도. 살아간다는 것은 완벽한 공허 속에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진공 속에서 흔들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진실한 진동이다. 그 진동을 통해 우리는 다시 삶의 리듬을 되찾고, 다시 사랑을 꿈꾸며, 다시 자신을 이해하려 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진공 붕괴'를 겪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하면서. 흥미로운 SF 소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