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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란 무엇인가 - 생계형 의사 양성관의 유쾌한 분투기
양성관 지음 / 히포크라테스 / 2025년 4월
평점 :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는 언젠가부터 '의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한 편의 전쟁터를 떠올리곤 했다. 칼과 총 대신 청진기와 주사기를 들고, 생과 사의 경계선에서 매 순간 분투하는 이름 없는 전사들. <의사란 무엇인가<를 펼쳤을 때, 내 안에 무겁게 자리 잡은 이 이미지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러나 양성관 저자가 전하는 이야기는 그보다 훨씬 더 깊고 복잡하고, 무엇보다 인간적이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알게 되었다. 의사는 병만을 고치는 기술자가 아니라, 환자의 삶을 함께 짊어지고, 때로는 패배를 받아들이게 하는 안내자라는 것을. 의사는 힐러이자 파이터, 설득자이자 경청자, 그리고 무엇보다 끝없이 흔들리는 인간이었다.'하루에 80명의 환자.' 이 숫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한 사람당 고작 몇 분. 출생부터 죽음까지 이어지는 인생의 이야기를 듣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다. 양성관 저자는 이상적인 진료를 꿈꿨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치의로서 깊이 살피고, 병명만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진료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은 그런 꿈을 허락하지 않았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의료 시스템은 속도를 강요했다. 더 많은 환자, 더 빠른 진료, 더 많은 서류. 그리고 그 뒤에 묻혀버린, '사람'이라는 존재. 저자가 토로하는 현실은 뼈아팠다. 나 역시 진료실에 앉아 짧은 대화를 나누고, 처방전을 받아들고 황급히 나오면서 느꼈던 허무함이 떠올랐다. 우리 모두 알고 있었다. 이건 제대로 된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책 속 한 장면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반응하지 않던 할머니가, 교수님의 한마디와 한 번의 포옹에 눈물짓고 웃던 순간. 그 장면은 마치,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이 스르르 열리는 기적 같았다. 의사가 다루는 것은 병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의학적 시술보다 훨씬 더 어렵다는 진실. 이 대목에서 나는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종종 의사를, 차가운 전문 지식의 집합체로만 본다. 병명과 치료법을 알려주고, 약을 처방해주는 기능인처럼.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몸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마음을 가진 존재다. 아픔은 신체를 넘어 영혼까지 스며든다. 진정한 의사는, 그 영혼까지 어루만질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저자는 그 사실을 아프도록 솔직하게 보여주었다.책을 읽는 동안, 저자의 좌절과 고민이 생생히 전해졌다. 실패한 삽관, 환자와의 다툼, 목숨을 구하지 못한 무력감. 의사라고 해서 늘 냉정하고 완벽할 것이라는 환상이 무너졌다. 오히려 저자는, 매일 흔들리며, 때로는 깊이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는 인간이었다. 특히, 실패한 시술 장면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반성하고, 더 나은 방법을 고민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왜 실패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는 과정. 그 과정이 있었기에, 그는 조금씩 더 나은 의사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 과정이 있었기에, 그의 이야기는 더욱 빛났다.<의사란 무엇인가>는 단지 한 개인의 성장 이야기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한국 의료 시스템의 맨얼굴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낮은 수가, 짧은 진료시간, 필수과 붕괴, 응급실 뺑뺑이, 그리고 골든아워를 놓치는 수많은 환자들. 저자는 개인의 노력이 제도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잔인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담담히 기록했다. 특히, 지혈 튜브를 건드리는 것조차 위험부담이 되어버린 현실, 환자를 살피는 것이 오히려 의사의 리스크가 되어버리는 모순된 상황은 충격적이었다. '누가 헐값에 자기 목숨을 걸겠는가?'라는 절규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꼈다. 한 사람을 살리려는 의지마저 꺾이게 만드는 시스템이라면, 그 시스템 자체가 변해야 하지 않을까.책의 마지막 장면은 조용하고도 깊은 울림을 남겼다.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 의사는 때로는 생명을 구하는 싸움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싸운다. 생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이들의 마음을 위해서. '나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겠지.'라는 저자의 고백은 무척 인간적이었다. 의사는 신이 아니다. 생과 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다만, 최선을 다해 싸우고, 때로는 비극을 함께 받아들이는 동행자일 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왠지 모를 위로를 받았다. 세상에는 완벽한 답이 없는 싸움도 있다는 것을, 어떤 싸움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좋은 의사는 뭘까?'라는 질문은,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실력, 친절, 공감, 사회적 시야. 저자는 여러 가지 조건을 말했지만, 결국 그는 솔직히 고백했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하는 중이다'라고. 나는 그 겸손함에 깊이 감동했다. 완벽한 의사란 없다. 매일 흔들리고, 실수하고, 다시 다짐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 이것은 단지 의사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였다.책을 다 읽고 난 뒤, 나는 다짐했다.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나도 매일 흔들리면서, 끝내 사람을 선택하는 삶을 살겠다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누군가의 편에 서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이 책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 그리고 매일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걸, 가만히 속삭여 주었다.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인간을, 그리고 내 삶을 사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