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한가 1 - Seed Novel
나승규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시드노벨에서 'GGG'와 함께 내놓았던 작품. 초반에 동영상 광고로 잠시동안 주목받기도 했으나, 결국 시드노벨 쪽에서 집중적으로 마케팅한 'GGG'에 밀려 조용히 묻히고 만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시드노벨은 신작을 여러개 내놓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번달의 '0정의환상소녀'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듯 단 하나만 화제가 되고 나머지는 묻혀버린다.('K에 대한 보고서'는 물론이고 무려 박성우를 일러스트로 쓴 '소울루프'마저도 이야기 나오는 걸 거의 못봤다.) 신작이 나왔을 때 그걸 살려주고 싶으면 한달에 신작 하나를 잡고, 나머지는 연결권으로 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적어도 그 작품 하나에 시선을 집중시켜줄 수는 있으니까.

이 작품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시드노벨의 이단아다.

일단 책의 디자인부터가 그렇다. 앞표지는 물론이고 옆표지와 뒷표지까지 온통 새카맣다. 이런 책은 여태까지 사들인 시드노벨 중에서 단 하나, '해한가'뿐이다. 시드노벨에서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런 컬러로 책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책장에다 꽂아놓으면 혼자서 튀는 책이 되고 만다.(덧붙여서, 내가 가진 라이트노벨 중에서도 이만큼 검은 컬러를 자랑하는건 글자 빼곤 올블랙인 '전투요정 유키카제' 밖에 없다.)

일러스트도 마찬가지다. 시드노벨의 일러스트는 지극히 만화적이며,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남성향적인' 그림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대부분 일반인이 봤을 때 '오타쿠스럽다고 생각할만한' 그림들이다. 그런데 해한가의 그림은 그런 성향에서 벗어나 있다. 주목받기에는 좀 문제가 있는 구도라고 보는 표지 일러스트도 그렇고, 실로 주옥 같이 이 작품의 감성을 딱 맞는 터치로 그려내고 있는 삽화들 또한 마찬가지다. 지향점은 다르지만 그 퀄리티는 '초인동맹에 어서오세요'의 Eika나, '유령왕'의 이수현과 필적하는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흑백 일러스트가 정말 좋다.

내용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작품은 현재까지 나온 모든 국산 라이트노벨을 통틀어 유일하게 한국적인 라이트노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말은 일견 다른 사람들의 심기를 거슬릴 수 있는 말이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나는 주장하고 싶다. 오직 '해한가'만이 진짜 한국적인 라이트노벨이라고. 다른 국산 라이트노벨은, 설령 작품성이 뛰어나고 한국적인 소재를 갖다썼을지언정 결국 일본 라이트노벨의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국적인 라이트노벨이란 뭔가? 한국적인 어휘와 한국적인 소재를 갖고 쓰면 한국적인 라이트노벨이 되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충족되어야 하는가?

지금까지 나온 작품 중 그런 작품은 '미얄의 추천'과 '꼬리를 찾아줘'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둘 다 한국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단 '꼬리를 찾아줘'는 말할 것도 없다. 구미호랑 한복만 갖다쓴다고 한국적인 게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봐도 짙은 일본 오덕의 냄새가 풍기는 작품이라서 뭐라고 말할 기력조차 없다.(작품의 퀄리티와는 관계없는 면에서의 이야기다.) '미얄의 추천'은 이것보다는 말할 거리가 훨씬 풍부하다. 한국적인 소재와 어휘를(전래동화 등을 활용한 이야기구조나, 당장 제목에서부터 보이는 '미얄'과 '추천' 등의 전통적인 어휘들, 현대적인 면에서는 한국의 대학문화나 군대개그까지.) 사용하여 한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려고 한 노력은 높이 산다. 하지만 근본적인 마인드가 한국적이 아니다. 그것은 매우 얄팍하고 가장 눈에 띄기 쉬운 노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트슨이 '꼬리를 찾아줘'에 비하면 훨씬 더 근본적인 부분까지 노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분명히 한국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고, 한국적인 이야기도 보이고, 한국적인 배경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 일본적인 것이 지나치게 많아서 그런 분위기를 흐린다. 무엇보다 캐릭터와 심리적인 부분이 일본적인 코드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결국 이 작품도 작품 안에 흐르는 '정서'는 전통적인 의미에서든 현대적인 의미에서든 한국적이지 않다.(물론 이것은 나의 판단이고, 다르게 느끼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 둘보다 더 한국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작품은 '월하의 동사무소'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작가의 오타쿠 취미가 지나치게 반영되어서, 읽는 사람을 지쳐서 뻗기 직전까지 만들 정도로 오타쿠 토크가 속출한다. 주인공 월하양이 느끼는 심정을 몇배로 증폭해서 느끼다 못해 짜증이 치솟을 정도였다.(아니 솔직히, 나오는 오타쿠 토크 중에 9할 이상을 알아듣는데도 불구하고 엄청 재미가 없고 오로지 장점을 죽이기만 할뿐이었다.) 그외의 부분들은, 작품이 너무 평이하다는 것만 제외하면 꽤나 모범적이긴 하지만.

내가 한국적인 라이트노벨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서'다.

한국적인 정서가 있어야 한다. 배경이 한국으로 느껴져야 한다. 시드노벨의 작품들을 보면 분명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잡고 있고, 한국인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왠지 전혀 한국 같지 않고, 한국의 학교 같지 않고, 한국인 같지 않은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캐릭터들이 한국인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 대단히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까지 나오는 작품들이 작품 자체의 질과는 상관없이 다 공통적으로 그렇다.

'해한가'는 여기에서 벗어난 유일한 작품이다.(유일하다고 말은 했지만 '월하의 동사무소'도 무시할순 없으니 '시드노벨 작품 중에서는'이라는 단서를 달아두겠다.)

다른 말로 '해한가'를 표현한다면 '시드노벨 작품 중 유일하게 드라마화하는 것이 가능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작품들은 도저히 한국에서 드라마화되기는 무리다. 작품의 스케일이나 액션성 등을 완전히 배제하고 성향만 봤을 때 그렇다. 그만큼 '해한가'가 그려내는 정서가 한국적이라는 소리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교급이고, 라이트노벨 외의 분야를 보면 어찌보면 사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하다못해 대여점 판타지를 봐도 국산 라이트노벨보다는 훨씬 한국적이다. 개념없고 찌질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사고방식이나 정서의 근본이 그렇다.)

국산 라이트노벨은, 기본적으로 모든 것을 일본에서 가져왔다. 캐릭터의 코드, 내용의 코드, 일러스트의 스타일, 책의 포맷, 하다못해 대다수를 차지하는 '신전기'라는 작품분류 카테고리명까지. 이러면서 한국적인 것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 무리다. 적어도 핵심요소 중 몇가지는 절대로 일본 것을 따라가면 안된다는 기준을 세웠어야 했다. 혹은 세워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앞으로도 지금처럼 계속 일본 라이트노벨에 기반하여 복제된 성향을 가진 작품만 나올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는 순수하게 작품의 질과 인지도 승부가 되고, 지금으로서는 아직 가망이 없다. 모든 조건이 우리 작가에게 불리하기 때문이다. 번역 라이트노벨은 이미 일본에서 어느 정도 검증이 끝난 작품이 들어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화가 되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메꿀 수 없는 인지도를 가지게 된 작품들도 있다. 그런 것이 한달에 수십 권씩 쏟아진다. 그에 비해 국산 라이트노벨은 많아봐야 5종 정도가 나올 뿐이고, 그중 대다수가 일본 라이트노벨에 비해 질적으로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차별화되는 매력을 가지지도 못하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다. 국산 라이트노벨 시장 자체가 애당초 일본 라이트노벨 시장에 낑겨서 자리를 확보한 셈이니까. 갑자기 기준을 바꾼다 한들 먹혀든다는 보장은 없다. '해한가'의 실패는, 지금의 라이트노벨 독자들이 가진 라이트노벨의 인식에서 벗어난 작품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 아주 부정적인 케이스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한가' 같은 작품이 꾸준히 창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뭄에 콩나듯 나와준다고 해도 좋다. 꾸준히 나와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것이 진짜 국산 라이트노벨의 미래를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디 시드노벨 편집부가 '해한가'를 포기하지 말고, 앞으로 이런 작품을 내는 것을 단념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여기까지 말하면 '해한가'가 무슨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걸작 같이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해한가'는 좋은 이야기다. 문장은, 가끔씩 비문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잘 읽히는 편이고, 지극히 한국적인 분위기와 정서가 담겨 있어서 일반인이 읽는데도 거부감이 없다.(실제로 라이트노벨에 대해 '그런 만화 같은 책을 왜 보냐?'라는 생각을 가진 다섯명 정도에게 읽혀본 결과다.) 인물이나 소품은 다소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지만 역시 용인 가능한 수준이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정도라고 할까? 각 장마다 일인칭 시점의 화자가 바뀌기 때문에 도입부 때마다 헷갈리지만, 역시 자기자신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 때문에 금방 적응할 수 있다. 세 개의 시점이 맞물려서 이야기가 완성될 때까지도 다소 허술한 곳이 보이긴 하지만 치명적인 흠이 존재하지 않아서 즐겁게 조각을 짜맞출 수 있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듯한 느낌이라서 다 읽고 나면 따뜻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게 전부이기도 하다. 가슴을 울리는 감동이나, 정신없이 빠져들게 하는 몰입감은 없다. 다 읽고 난 후에 뚜렷하게 남아서 사람을 사로잡는 이미지를 가진 것도 아니다. 인물들이 아주 개성있거나 매력적이지도 않다. 구성요소들이 무난하다는 이야기다. 결과적으로 그런 무난한 구성요소들을 갖고도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냈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 아쉽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사실 라이트노벨 형식에서는 이 이야기 자체가 굉장한 모험적 시도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 모험적인 요소를 넣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사실 왜 '해한가'가 제목으로 쓰였는지 의문일 정도로 비중이 적어서, 이것과는 다른 구도로 보다 극적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해한가'는 아직도 과도기를 겪고 있는 국산 라이트노벨 시장에서 빼어난 작품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상업성을 따지자면 아무래도 약하다. 명작으로 추켜세우기에도 아쉬운 구석이 있다. 그렇지만 현재까지 나온 국산 라이트노벨 중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수작으로 꼽는데는 주저하지 않겠다. 특히 1권만을 기준으로 봤을 때는, 개인적으로는 별 고민없이 이 작품을 최고로 꼽겠다.

그렇기 때문에 판매량이 낮았을지라도 작가와 시드노벨 편집부 모두 좌절하지 말고 더 좋은 내용으로 2권을 만들어서 내줬으면 하고 기대한다. 적긴 하지만 당신을 응원하는 독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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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3-12-17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혀 공감가질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