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 권리가 있다 1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이다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작가 로렌 와이스버거의 신작. 미국에서는 2005년에 발표되었고, 또 2008년에 새로운 신작을 발표했지만 이제서야 번역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미국에서는 전작인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만큼 관심을 끌진 못한 듯한데...

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것은 소설로서 굉장히 미숙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작가가 체험한 패션업계, 그리고 뉴욕상류층이 사는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성공한 작가의 아주 전형적인 1작으로, 작가 자신의 체험을 담아서 쓴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영화 쪽이 더 좋았던 것은 그 세계를 영상으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앤 헤서웨이가 예쁘고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미란다가 소설보다 한층 더 악마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 주인공이 소설의 불가항력적으로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의지로 그 세계를 거절하고 내려온다는 점 때문이지 원작이 영화에 비해서 형편없어서는 아니었다.

1작에서 그런 자신의 인생이라는 최고의 소재를 써버린 이상 2작은 작가의 진가를 시험받을 순서라고 할 수 있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로렌 와이스버거는 작가로서의 진가를 보여주진 못했다. '누구나 알 권리가 있다'는 거의 완벽하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재탕이다.

소설로서는 확실히 전작에 비해서 능숙해졌다. 무엇보다 전작과는 달리 주인공의 갈등과 변화를 포함한 드라마가 확실하다. '나'는 전작의 주인공보다 훨씬 몰입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인 것이다. 물론 나는 남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여성임을 노골적으로 어필하는 주인공에게 '몰입'한다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녀가 뉴욕 상류사회라는 휘황찬란하며, 그때까지의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는 세계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슬픔, 그리고 경이 등이 이 소설에는 전작 이상으로 잘 드러나서 전달되어온다. 감정을 이끌어내는 장치도 풍부해서 주인공이 짜증스러워할 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기뻐할 때 미소지어줄 수 있다. 단순히 업그레이드라는 측면에서 보면 꽤 성공적이었는지도 모르고, 실제로 나도 꺼림칙한 구석을 느끼면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어쩌면 이 작가는 평생 이런 소설밖에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작가는 여전히 뉴욕의 상류사회를 소설의 주 매력포인트로 삼고 있으며, 이번에는 보다 노골적으로 현실의 아이템들을 끌어온다. 뉴욕의 장소, 문화, 회사, 인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실명으로. 전작도 이런 경향은 마찬가지였지만 뉴욕이 어떻게 굴러가건 신경도 쓰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나조차도 아는 이름이 이 책처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나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페이지당 몇번씩 그런 명사가 언급되는가 전부 수를 세보면 총 페이지수보다 확실하게 많지 않을까. 그 이름이란 예를 들면 드림웍스, 슈렉3,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섹스 앤 더 시티, 프렌즈, 파멜라 엔더슨, 죠니 뎁, 플레이보이와 오너인 휴 헤프너 등등이다. 헐리웃 배우부터 시작해서 패션업계의 명사들, 디자인 업계의 네임드 브랜드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이 실명으로 언급되고 작중에서 이용된다. 이런 점은 마치 수많은 타블로이드지들을 이어서 하나의 드라마로 만들어놓은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해준다. 주인공 배트는 파니 플래너로서 유명한 클럽에서 성공적으로 파티를 개최하는 것을 일의 목표로 삼으며, 그 파티에는 저런 인물들이 등장을 해서 서로 엉겨붙고 마약을 하고 심지어 게이행각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는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가공의 인물이며 장소 또한 가공의 장소'라고 말해두었지만 누가 그런식으로 받아들이겠는가.

이것을 한국식으로 바꿔보자면 주인공이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 시사회이 총책임자가 되어서 진행을 하고, 그 다음에는 신해철이 운영하는 클럽에서 거창한 이벤트 파티를 열었고, 그 파티에는 정우성과 송강호와 이병헌은 물론이고 장동건과 이나영과 김태희까지 참석해서 다같이 즐긴다. 주인공은 주최자로서 이런 유명인사들과 담소를 나누고, 춤을 추다가 섹시하고 멋진 정우성과 눈이 맞아서 몸을 비벼가며 춤을 즐기고, 어쩌면 침대로 직행할지도 모른다는 식이다. 배경을 한국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보니 그런 소설을 본다는 것이 대단히 끔찍하게 느껴지는데, 이런 면에서는 작가가 미국인이고 배경이 미국이라는 점에서 나오는 거리감이 내가 이 소설을 재밌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

결국 이 작품은 전작과 똑같은 패턴을 답습한다. 일자리를 찾다가 우연히 뉴욕의 상류사회 속에서 일하는 일자리로 들어가버린 주인공은 그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허우적대다가, 적응하고 나서 그 세계에 인간미와 진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다가, 마지막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맞물려서 스트레스가 폭발해서 그 세계를 거절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그 사이에 로맨스까지 끼여있어서 마지막엔 모든 것이 확실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전작과 전혀 다를바 없는 패턴이지만 어쩌면 이것은 로렌 와이스버거가 써낼 수 있는 황금패턴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작품까지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과연 올해 발표된 그녀의 신작은 언제나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들어올까?

전작이나 이번 작품이나 진짜 매력포인트는 역시 모두가 동경하고 가쉽거리로 즐기는 뉴욕의 상류사회다. 화려하고 휘황찬란하며 아름다운, 하지만 제대로 된 인간미도, 진짜 행복도, 지적인 향취의 흔적도 없는 공허한 황금의 세계. 그래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이 연기한 미란다는 말했다. '모두가 이 세계에 있기를 원해.' 모두가 그 세계를 동경하고, 진짜 그 세계의 중심에 서서 그 세계를 형성하는 부자와 명사가 아닐지라도 미래를 포기하고 돈을 써대가면서라도 그 세계의 끝자락에나마 붙어있고 싶어한다. 유명인사가 참석하는 파티에 나가기 위해 내년 월급까지 다 쏟아부어도 다 갚을 수 있을까 말까한 가격의 드레스와 구두를 사고, 매력적인 남자와 어떻게든 하룻밤 보내볼 수 있지 않을까 애를 쓰는 풍경.

그 마약같은 매력을 가진 황금과 보석의 전당에서 자신의 의지로 내려온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앤 헤서웨이가 연기한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로 그 세계에서 내려왔다. 하지만 로렌 와이스버거의 소설에서는 전작에서나 이번에나 똑같이 불가항력적인 스트레스에 발작을 하듯이 때려치우고 만다. 그것이 작가적 감성의 한계로 보여서 아쉽다.

재미있는 것은 작가인 로렌 와이스버거다. 그녀는 분명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쓸 당시에는 주인공들과 비슷한 처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쓴 후 그녀는 분명 저 공허한 황금의 세계의 중심에 서는 명사들 중 한 사람이 되었을 터. 그런 그녀가 똑같이 '지금 당신들이 발 딛고 서는 세계가 진짜 아름다운 것이다. 저 세계는 그저 타블로이드지에서 다루는 가쉽으로만 즐기고, 당신들의 행복을 찾으라'고 말하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어쨌든 수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알 권리가 있다'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만들어낸 '칙릿소설'이라는 유행에 딱 들어맞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돌아온 원조의 강점이라고나 할까. 아마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여성들이라면 나보다 훨씬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칙릿소설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손대지 않을 것을 권하고 싶고. 다만 이 소설이 그려내는 세계는 역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패션업계를 중심으로 그려졌던 세계보다는 덜 매력적이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칙릿좋아 2008-08-0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 구구절절 정말 예리하고 세심한 분석이네요~! 칙릿을 무조건 폄하하는 남자분들도 많은데.. 멋지시네요..
저는 오히려 이번 책이 더 재밌었답니다.. 특유의 유머나 위트가 더 노련해진 거 같아요. 실제로도 작가가 정말 재밌는 여자일 듯~ 소재와 배경이 전작과 비슷하다는 점도 저는 반가웠어요^^; 이런게 바로 와이스버거의 전매특허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이번엔 좀더 세게(?) 나가던데요. 그쪽 세계를 인정사정 없이 폭로(?)한다는 느낌? 작가가 뭐 크게 데인 게 있나 싶을 정도로.. 정말 계속 큭큭대며 읽었네요. 끝에는 감동 코드도 있고.. 뭐랄까, 뉴욕이다 뭐다 해도, 결국에 여자들을 감동시키는 건 그런 진실되고 순수한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 책은 정말 기분좋게 재밌게 읽는 책인 거 같아요 :) 칙릿의 대표작가는 역시 와이스버거라는 생각이 듭니당.. ^-^b
(리뷰 쓰러 왔다가 님의 글이 넘 인상적이어서 여기에 댓글만 가득 달고 가네요^^*)

Coetzee 2008-09-22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추천하나 찍고요.. 예리하고 날카로운 분석이시네요. 저는 아직 읽지 않았지만 -물론 언제 읽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칙릿류의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무래도 작가는 자신의 강점을 강화하면서 보다 강한 향료를 사용하여 전편의 성공을 이어가고 싶었겠죠? 물론 그 향료에 매혹을 느끼는 독자는 더욱 심취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구역질을 느낄수도 있겠죠..
아뭏든 통찰력있는 분석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