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오 크뢰거 / 트리스탄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지음, 안삼환 외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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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산」은 15년째 내 책장에 꽂혀있다. 책갈피는 상권의 3/4 지점에 머물러 있다. 처음에는 집중할 수 없는 지루함에 잠시 미뤄뒀던 걸로 기억된다. 다른 책들 몇 권 거치고 마음을 가다듬고 곧 다시 읽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상태로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게 된 것이다. 한번 정도 다시 도전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아마 책갈피가 꽂혀있는 지점은 두 번째 도전의 결과일 것이다. 두 번의 실패는 마치 한때 한국축구에 대해 공한증에 걸렸던 중국을 연상케 할 만큼 토마스 만에 대한 공포까지는 아니더라도 쉽게 친해지지 못할 것 같은 부담감이 마음에 묵직하게 자리 잡게 된 것 같다. 서경식이 ‘소년의 눈물’에서 「마의 산」을 끝까지 읽지 못했음을 고백할 때, 글쟁이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동감을 표하고 여기저기서 양심선언이 이어질 때 읽지 않은 책이 내 책장에 꽂혀있을 때의 그 찜찜함을 그들에게 어쭙잖게 묻어가며 합리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 연말에 토마스만이 십여 년의 기간 동안 집필해서 완성한 「요셉과 그 형제들」6권 전권을 지인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아아, 운명은 토마스 만과의 화해를 원하고 있단 말인가...뭐 이런 느낌을 받았다. 「마의 산」에 재도전하기에 앞서 단편들은 좀 수월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의 산」을 두 번 읽다 만 사람이 아주 건방지게 쓰는 글일지는 몰라도 책에 수록된 토마스 만의 8편의 단편들을 읽고 나니 어렵게만 느꼈던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는 의외로 쉽게 해석이 가능했다. ‘경계에 선 인간의 고뇌’ 이데올로기의 경계, 시민성과 예술성의 경계, 북국과 남국의 경계, 삶과 예술의 경계에 서서 양쪽 세상을 고뇌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토마스 만을 대부분의 작품들 속에서 만나게 된다. 경계인으로서의 고뇌가 가장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 바로 <토니오 크뢰거>다.

나는 두 세계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약간 견디기가 어렵지요. 당신들 예술가들은 저를 시민이라 부르고, 또 시민들은 나를 체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의 마음에 쓰라린 모욕감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토니오 크뢰거)       

 

<토니오 크뢰거>는 토마스 만의 완벽한 자전소설이다. 부와 권력을 겸비한 아버지와 이국적인 분위기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북독의 도시를 떠나 남독의 도시 뮌헨으로의 이주해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토마스 만의 청년시절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리고 그가 펼치고 싶은 예술에 대한, 예술가의 자세에 대한 견해도 조심스레 피력하고 있다.

<삶>은 정신과 예술의 영원한 대립 개념으로서 우리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인간들에게는 피비린내 나는 위대성과 거친 아름다움의 환상으로 나타나거나 비정상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이고 단정하고 사랑스러운 것이야말로 우리들이 동경하는 나라이며, 그것이 바로 유혹적인 진부성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삶인 것입니다. 세련되고 상궤를 벗어난 것, 악마적인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그것에 깊이 열중하는 자는 아직 예술가라 할 수 없습니다. 악의 없고 단순하며 생동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 약간의 우정, 헌신, 친밀감, 그리고 인간적인 행복에 대한 동경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술가가 아닙니다. 평범성이 주는 온갖 열락을 향한 은밀하고 애타는 동경을 알아야 한단 말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경계에 선 토마스 만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대치 상황을 꾸준히 제시한다. 뤼벡의 시민성과 뮌헨의 예술성 그리고 그 안에서 악의 없고 마냥 행복한 사람들 한스, 잉에보르크와 고뇌하는 토니오 크뢰거(토니오 크뢰거), 불구의 몸으로 관중을 우롱하고 멋대로 휘두르고 지배하는 자 치폴라와 불편한 분위기를 감지하면서도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길 꺼리는 좌중들(마리오와 마술사), ‘어두운 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기’ ‘경계선 밖에 있기’ ‘철학적인 고독’등을 들어 빛의 인간과 대립 개념으로 스스로를 표현한 어릿광대(어릿광대), 글 뒤로 교묘하게 숨으며 야비해 보이기까지 하는 작가 슈피넬과 성공한 상인 클뢰터얀(트리스탄). 이렇게 확연히 드러나는 예를 제외하고도 토마스 만의 작품들 속에서 시민성과 예술성은 끊임없이 충돌한다. 

자기변호, 자기혐오, 자기비판이 가득한 자전적 소설들을 만나기 전에 토마스 만의 생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북독의 뤼벡시에서 부와 명예와 권력까지 완벽하게 갖춘 아버지와 독일인과 남국의 혼혈인 이국적인 분위기의 어머니 사이에서 특별한 혜택을 누리며 자란 유년시절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토마스 만의 작품 속에서 시민성의 대표로 등장하는 아버지 혹은 북독의 뤼벡과 그 반대편인 예술성의 대표로 등장하는 어머니 혹은 남독의 뮌헨의 대치상황은 뤼벡에서 태어나 뮌헨으로 이주한 토마스 만의 유소년 시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일찍이 참여문학에 심취해서 민주주의적 투쟁에 앞장섰던 형 하인리히 만과 달리 정치적인 참여에 미온적이었고 오로지 창작에만 전념했던 토마스 만은 뒤늦게 나치 독일에 반감을 표하며 망명을 하게 되지만 이는 독일의 진보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몰리고 독일의 국수주의자들에게는 민족의 배반자로 몰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또한 토마스 만의 고뇌의 한 자락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이탈리아 가공의 휴양지 토레를 배경으로 한 <마리오와 어릿광대>를 살펴보면 정치참여에 미온적이었던 토마스 만이 민주주의자로 옮아가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형인 하인리히 만과의 정치적인 입장 차이로 인한 일련의 사건들과 토마스만의 정치참여 과정을 미리 알고 이 작품을 읽는다면 채찍으로 좌중을 휘두르고 모멸감을 주며 지배하는 최면술사 치폴라를 향한 마리오의 총구는 다름 아닌 파시즘, 나치즘을 겨냥한 것임을 금방 알아차리게 된다.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에 대한 해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지만 결코 호락호락하게 읽힐 책은 아니다.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려면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 흐름을 잠시라도 놓치면 작품 전체를 놓치게 된다. 단편이라 좀 수월하게 생각했지만 한편을 읽고 나면 녹초가 돼버려서 다음 작품은 다음날을 기약하게 만든다. 8편의 단편들은 중간 휴식 시간이라도 제공했지만 「마의 산」과 「요셉과 그 형제들」은 나를 어디까지 끌어다 놓을 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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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휙, 바람이 쏴 비룡소 세계의 옛이야기 5
케티 벤트 그림, 에벌린 하슬러 글, 유혜자 옮김 / 비룡소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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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은 그림책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는 주제일 것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주제이지만 다양한 구성과 획기적인 반전을 제시하는 이야기들에 익숙해 있는 어른 독자에게는 참 식상한 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언제나 효과적이기는 하다. 이 책  <바람이 휙, 바람이 쏴>는 스위스 판 ‘흥부와 놀부’나 ‘혹부리 영감’이라고 생각하면 그 내용과 주제를 아주 쉽게 유추해낼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산 계곡에 살고 있는 레오와 메오 곱추 형제의 이야기다. 형 레오는 친절하고 가축들과 식물들을 잘 보살펴 주는 착한 성품이었고 동생 메오는 거칠고 걸핏하면 가축들을 때리기 일쑤였다. 눈이 오기 전에 산 너머 오두막집의 지붕을 수리하기 위해 동생 메오가 갈 차례였지만 험한 산길이 싫다는 동생 대신 할 수 없이 형 레오가 길을 떠난다. 개미나 두꺼비 같은 미물이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버섯 하나 나뭇가지 하나라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레오는 조심조심 가시나무 길과 계곡을 지나 숲에서 밤을 보내게 된다. 레오가 잠든 후 숲의 요정들이 레오 곁으로 몰려든다. 숲의 요정은 버섯 요정, 곡식 요정, 가축 요정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레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자고 제안한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뜬 레오는 몸이 가벼워졌음을 느낀다. (이 대목에서는 다들 바로 등의 혹이 없어진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두막에 도착해서 지붕을 열심히 고치고 산을 내려와 집에 도착한 형 레오는 자신을 보고 놀라는 동생을 보고나서야 등에 있던 혹이 없어진 사실을 알게 된다. 형에게 좋은 일이 생겼음을 부러워한 동생 메오도 그 다음날 오두막을 향해 똑같은 길을 따라 집을 나선다. 그 여정에서 괴팍하고 거친 성격의 메오가 어떻게 처신했을 지는 짐작할 것이다. 그리고 숲의 요정들의 특별한 선물이 무엇일 지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 오픈키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의 이 그림책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림이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 익숙한 플롯이라 살짝 식상할 뿐이다. 흑백과 칼라가 교차하는 이 그림, 우선 섬세하고 치밀한 펜화가 눈에 들어온다. 아아...그리고 이 그림책 속에서의 숲이 살아있다. 숲속 동물들은 물론이고 나무며 풀이며 꽃이며 계곡의 바위며 심지어 눈보라와 쏟아지는 비까지도 살아있다. 이 묘한 느낌에 취해 반복해서 읽으며 이유를 더듬어 보니 그림 속에는 살아있는 눈이 있다. 이 그림 작가 눈에 집착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눈 코 입을 갖춘 얼굴을 이곳저곳에 그려 넣은 숲 속 장면들 뿐 만아니라 풀숲에도 숲의 전경에서도 계곡의 원경에도 하늘에도 눈보라 속에도 어느 장면을 펼쳐보아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숲속의 어둠을 통해서 기괴하게 꼬인 나뭇가지에 앉은 까마귀를 통해서 창공을 나는 독수리의 눈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걸어온다. 동물을 사랑하는 레오 곁에 몰려든 염소들의 사랑스런 눈빛에서부터 한없는 無에 가까울 정도로 공허한 눈빛들까지 그렇게 나를 보고 있다. 그렇게 내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

레오와 메오 형제가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의 일부처럼 숨은그림찾기처럼 숨겨진 이 그림을 통해서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고 자연의 신비함 앞에서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아이와 함께 유익한 이야기를 나누고 메오의 예를 들어 약간의 협박용 카드도 저장해두고 그림 속에서 신비한 모습들을 하나하나 새롭게 발견해 가면서 정말 재미있는 책읽기 시간이었다. 리뷰를 쓰면서 다시 한 번 내게 말을 건네는 숲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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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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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이미 읽었거나 혹은 다이제스트를 통해서 줄거리를 알고 있음이 분명한 고전, 특히 이 책 ‘마담 보바리’는 내가 읽은 책이 분명하다. 25년쯤 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알고 있는 내용이 나오기까지의 이 지루한 도입부를 견디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플로베르에 의해 치밀하게 의도된 지루함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나는 소설을 즐겨읽는다. 각종 사건 사고들이 몰아치고 급작스런 반전과 놀라운 볼거리들을 풀어내는 소설보다는 내 의식의 흐름을 쫓아올 테면 쫓아와 보라고 글을 쓰는 오만한 작가들의 글에 매력을 느껴왔다. 어찌 보면 현대 소설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플로베르에게 나는 빚이 있는 셈이다. 빚진 자 입장에서 무엇인들 못 견뎌내겠는가. 플로베르가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일곱 번이나 다시 고쳐 썼다는 그 유명한 농사 공진회 장면의 그 진절머리 나는 장황한 연설과 퇴비 상, 숫염소 상, 깻묵 활용상 등등의 지루한 시상 장면을 그런 심정이 아니고서는 어찌 견뎌내겠는가.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서...

무미건조 하다못해 시시하기까지 한 소년 샤를르 보바리의 등장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샤를르의 부모님의 일대기를 훑더니 의사면허 시험을 거쳐 돈 많은 과부와의 결혼으로 맹맹하게 진행된다. 결국 주인공으로 전면에 나서게 될 엠마와의 첫 만남의 장소인 베르트 농가가 등장하지만 내 조바심과는 별개로 농가의 주변과 농가 살림살이에 대한 지리한 묘사만 늘어놓는다. 그러다 갑작스런 부인의 죽음과 그와 맞먹게 루오 영감의 덧문 신호와 함께 갑작스레 샤를르와 엠마의 결혼이 결정되면서 드디어 주인공 엠마가 전면에 나서며 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지만 엠마의 과거로 돌아가 연애소설을 즐겨읽던 수도원생활을 이야기하며 그 지루함을 조금 더 연장한다.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상상하는’ ‘보바리즘’이란 말로 대변되는 엠마를 위해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니 또 참아주기로 한다.  

농부의 딸로 태어났지만 적당한 교육을 받았고 연애소설이지만 책도 좀 읽었으니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인근 농부의 아내로 만족할 수 없는 엠마였다. 하지만 탈출구로 생각했던 샤를르와의 결혼은 다만 장소와 사람만 바뀌었을 뿐 특별할 것 없는 지루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결혼생활에 대한 설레임은 며칠간의 실내장식과 커튼 장식을 바꾸는 들뜬 분주함으로 서둘러 식어버린다. 단 한 번의 찬란한 날, 보비에사르 저택에서의 무도회가 있었지만 상류사회 무도회의 화려함은 상대적으로 시골의사 부인의 비참한 삶을 부각시켰고 그로 인해 엠마는 마음의 병이 깊어진다. 그녀가 동경하던 실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 잡을 수 없는 것들을 갈망하는 마음이 몇 곱절 더 그녀를 괴롭혔으니 말이다. 그렇게 병들어가는 엠마를 보다 못한 샤를르는 그녀에게 다른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이제 자리 잡기 시작한 토트를 떠나 드디어 모든 파란만장한 사건의 중심에 있는 용빌로 이사하게 된다.

작품의 1/3쯤을 차지하는 도입부는 마치 엠마의 권태로운 일상처럼 지루하게 계속되다가 위에서 언급한 농사 공진회 장면으로 그 정점을 찍고 드디어 육체적 욕망에 눈을 뜨고 과감하게 환상을 실행에 옮기는 엠마를 만나게 된다. 용빌의 젊은 청년 레옹과의 교류에서 지켜냈던 얄팍한 망설임과 조심스러움은 바람둥이 로돌프를 만나면서 걷잡을 수없이 무너져 버리게 된다. 엠마의 욕망은 터진 봇물처럼 걷잡을 수 없다. 샤를르의 진찰실, 자신의 집 정원 으슥한 곳에서 사랑을 나누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새벽마다 침대에서 빠져나와 애인에게로 달려가는 엠마는 로돌프만이 진정한 사랑임을 의심치 않았고 드디어 사랑의 도피를 감행하려 했다. 하지만 로돌프가 누구던가. 여자를 만나는 순간부터 떼어낼 궁리를 하는 작자가 아니던가. 사랑이라 믿었던 로돌프에게 배신당한 엠마는 몸져눕게 되고 엠마의 사치로 인한 빚과 밀린 약값으로 돈이 불러올 또 다른 파탄을 예고하면서 엠마는 또 다른 사랑에게 온몸을 맡기게 된다. 오페라를 보기위해 들른 루앙에서 바로 레옹과 재회하게 된 것이다.

로돌프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엠마, 그녀는 이번에도 레옹을 밀어내려 시도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늘 너무 미약했다. 플로베르에게 풍기문란의 죄를 물어 법정에까지 서게 한 바로 그 장면, 레옹을 거절하기 위해 만난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출발해서 달리는 마차에서의 정사를 시작으로 엠마는 결국 몰락을 향해 질주하게 된다. 이제부터 그녀의 일상은 모두 거짓말과 사치와 감당할 수없는 채무로 인한 빚 독촉뿐이다. 결국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애인들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소비로 인한 빚이었지만 자신의 참모습을 돌볼 줄 모르고 환상만을 쫓으려 했던 욕망 때문이었다.  

배신마저도 짜릿한 맛이 나고 슬픔마저도 빛나는 연애소설 속의 격정적인 사랑만이 사랑이 아님을 진작에 깨달았다면, 그래서 성실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남편과 딸에게 마음을 주려는 노력을 조금만 기울였다면, 그녀의 사랑스러움과 예술적 감수성을 닿을 수 없는 곳에 저당 잡히지 말고 현실 속에서 나누려 했다면 다른 모습으로 구현될 수도 있었을 그녀의 인생... 그녀의 어리석음이 가엾기까지 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인간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현실과의 타협에는 재빠르고 계산적이고 결국 파멸에 이르는 보바르 부부와 대조적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거머쥐며 이야기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는 약제사 오메, 달콤한 말과 술수로 엠마를 꾀는 고리대금업자 뢰르, 그리고 잠깐의 등장이지만 엠마의 모습과 겹쳐 강한 인상을 남긴 농사 공진회의 노파에 집중해본다. 한 농장에서 54년 근속 표창을 받게 된 이 노파, 농부의 딸로 태어난 엠마에게서 예쁘장한 얼굴과 터무니없는 공상이 쏙 빠졌더라면 어쩌면 이런 모습으로 늙어가지 않았을까 싶은 바로 그 모습이다. 플로베르는 용빌을 지나는 바람마저 적절한 시간에 끌어다 불게하고 들판의 꽃마저도 원하는 품종으로 피게 했다고 느낄 정도로 치밀한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 노파의 등장도 그런 치밀한 장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플로베르는 친구인 부이예의 권고를 받고 ‘마담 보바리’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플로베르의 치열한 고통으로 빚어진 ‘마담 보바리’ 덕분에 감사해야 할 또 한 명의 엠마...당시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들로네 사건’으로 사치와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회면에 등장한 실화 속 여인네가 ‘마담 보바리’를 통해서 이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있고 단순한 지탄의 대상에서 동정과 연민까지 보태게 된 것이다.       

세상에는 많은 엠마들이 넘친다. 엠마 보바리처럼 극단적으로 타락의 일로를 걷지 않더라도 누구나의 마음속에는 내가 현재 발 딛고 있는 현실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엠마가 존재하지 않을까. 엠마 보바리는 탐욕에 굴복당한 전형을 보여주고 있지만 부디 현실의 엠마들은 꿋꿋하게 이상을 쫓아 꿈에 가까이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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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를 부탁해! - 크리스마스 파티 맹앤앵 그림책 5
나탈리 다르정 지음, 박정연 옮김, 마갈리 르 위슈 그림 / 맹앤앵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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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리구이나 그마저도 아니라면 닭튀김이라도 곁들인 크리스마스 파티와 함께 이 책을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크리스마스가 한참 지난 후 읽은 책은 살짝 김빠진 맥주 느낌이 든다.(사실 난 김빠진 맥주 맛이 어떤지는 모른다. 단지 뭔가 결정적인 맛이 빠진 것 같은 강한 상실이 느껴지는 표현이라..^^) 여타의 크리스마스 그림책들이 그러하듯 크리스마스에 그 맛과 분위기가 제대로 사는 법이니까.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겨울이 되면 으레 읽게 되는 크리스마스 그림책 반열에 오르게 될 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그래도 2009년 첫 선을 보인 크리스마스 그림책 중 눈에 띄는 책인 것은 분명하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제일 예쁜 칠면조를 훔쳐왔는데 먹음직한 칠면조 요리가 될 운명이었던 칠면조에게 오히려 제대로 당하는 늑대, 여우, 족제비 이야기다. 난장판인 여우 집에 도착한 칠면조는 청소를 하라고 도리어 큰소리를 치고, 함께 칠면조 요리를 즐기러 찾아온 족제비와 늑대에게는 자기를 먹으려면 먼저 살을 찌워야 한다고 타일러서 저녁식사거리를 준비하라고 쫓아낼 정도로 주객전도라는 말도 칠면조 앞에서 울고 갈 정도의 위세다. 칠면조는 카드놀이에서는 항상 이기고 가장 안락한 잠자리를 자신의 차지할 정도로 잔꾀가 많고 머리회전이 빠르지만 무엇보다 요리솜씨가 뛰어났다. 여우, 늑대, 족제비는 어느새 칠면조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요리에 길들여지고 있었다. 어느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칠면조는 친구들의 식사를 걱정하면서 일 년을 더 살찌워 잡아먹으면 더 근사한 칠면조 요리가 될 거라는 제안을 한다. 이미 칠면조와의 생활에 익숙해졌던 친구들은 그렇게 해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1년을 다시 유예하면서 행복하게 살았다.

꾀가 많고 영리하고 음흉하다는 평가를 달고 사는 동물인 여우, 족제비, 늑대가 순진할 정도로 칠면조에게 당하고 있으니 그동안 동화 속에서 행한 숱한 악행들의 죗값을 받는 거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려고 해도 동정의 마음이 절로 든다. 칠면조를 친구로 생각하는 세 친구의 천진난만한 표정과 겹치며 마지막 장면에서 교활한 눈빛으로 ‘늑대, 여우, 족제비가 좋아하는 최고의 요리’책을 펼쳐보고 있는 칠면조의 모습은 ‘호랑이굴에 들어가더라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을 거론하며 약자인 칠면조의 편을 들어주려고 해도 찜찜한 기분이 든다. 마지막 그 눈빛만 아니었어도 위기상황을 훌륭하게 대처해 나가는 영리함을 한껏 칭찬해주련만 순진하게 속고 있는 세 친구 쪽으로 마음이 움직인다. 아...그 눈빛만 아니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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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의 마법 공원 비룡소의 그림동화 187
클로드 퐁티 글 그림, 윤정임 옮김 / 비룡소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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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무니없는 가정이지만 어린 시절에 그림숙제를 앞에 두고 울기 일쑤였던 나를 격려해주셨던 스승을 만났더라면 지금처럼 아이에게 양 한 마리 그려주는 것에도 바짝 긴장해야 할 정도로 아주 바닥을 기는 실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그림을 좀 배워서 멋진 그림책을 한권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 물론 너무나 엉성한 가정이다. 그림은 접어두고 그럼 글 솜씨는 자신 있다는 소리냐는 아주 건방진 가정이다. 그림 작가에 따라서 글의 분위기가 옷 갈아입듯 바뀌는 것보다 자신의 글을 자신의 그림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글과 그림을 함께 작업하는 동화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그림만 봐도 금방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작가들을 부러워한다.    

50개월이 다 되어가는 아이와 함께 그림책 보기 4년이다. 아직은 갈길이 멀다. 지금까지 읽은 그림책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은 거의 두 종류 중 하나에 속한다. 따스하고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그림책과 상상과 모험의 세계를 다룬 환상적인 그림책. 한해를 보내는 이 시점에 후자에 속하는 환상적인 그림책의 최고봉을 만났다. 클로드 퐁티의 <조르주의 마법 공원>, 물론 앞으로도 내가 만나보지 못한 많은 작품들 중에서 이런 느낌을 받을 책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선 출간을 눈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콜린 톰슨의 신작들이라면...하고 잠시 생각해보지만 당분간 그 자리를 쉽게 내주지 않을 듯하다. 한마디로 놀랍다. 풀어내는 이야기가 놀랍고 그 이야기와 완벽하게 한 몸을 이루는 그림은 정말 환상적이다. 

우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둥근네모 알베르 공원’이라는 신비한 공간의 중심에 있는 조르주 르방이라는 긴 의자다. 이 공원에만 들어오면 누구나 어린 시절 자기가 좋아했던 인형으로 변하는 신비한 공간이다. 해가 뜨기 전 새벽 4시 25분을 시작으로 정오와 자정을 지나 다음날 새벽 4시 1분까지의 조르주 르방을 중심으로 한 공원의 모습을 스케치하듯 이야기한다. 실질적으로 하루 동안의 시간을 담고 있지만 그 안에는 대대손손 내려오는 조르주 르방의 집안 내력들을 들을 수 있고 조르주가 ‘둥근네모 알베르 공원’에 정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이야기한다. 또 조르주 르방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다양한 인생역정과 모험담과 감동적이고 위대한 사랑을 목도할 수 있다. 사람들이 떠난 시각 공원을 물들이는 신비한 존재들의 이야기와 외계의 xXx(‘이이이히’라고 발음해요.) 행성에서 우주선을 타고 왔다가 우주선을 타지 못하고 공원을 배회하고 다니는 크자르부르그를 매장면마다 찾아보는 놀이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이 책의 리뷰에서 줄거리는 최대한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이 책을 만나 그 환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설레는 초보여행자들의 재미를 빼앗고 싶지 않은 한발 먼저 앞서 지나온 여행자들의 암묵적인 공모랄까...^^ 책장에 꽂을 수도 없을 정도로 시원스럽게 큰 판형에다 환상적인 섬세함으로 꽉 찬 그림과 그림책임을 감안할 때 40쪽 정도의 엄청난 글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연령대에 추천하고 싶다는 책의 외향적인 정보만 추가한다.

이 책에 매료되어 클로드 퐁티의 <나의 계곡>과 <끝없는 나무>도 서둘러 구했다. 역시 환상적으로 멋진 작품들이다. ‘반지의 제왕’이나 ‘나니아 연대기’의 하나의 에피소드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는 출간된 지 50년도 훌쩍 넘은 판타지들을 이제 와 접하면서 감탄하지만 이런 문화적인 컨텐츠가 풍족했던 토양에서 자라 이렇게 멋진 그림책들을 탄생시킬 수 있는 세계가 부러울 뿐이다. 나 어릴 때만 해도 조잡한 삽화에 그것도 제멋대로 각색한 명작동화와 전래동화가 거의 전부였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하지만 이렇게 멋진 작품들을 읽으며 자라게 될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클로드 퐁티 같은 작가 하나쯤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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