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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바닷속 집
가토 구니오 그림, 히라타 겐야 글, 김인호 옮김 / 바다어린이 / 2010년 4월
평점 :
책 표지를 둘러싼 띠지를 꽉 채운 현란한 수상경력이 오히려 이 책이 주는 감동의 사족처럼 느껴질 정도로 잔잔하게 오래도록 가슴이 먹먹해지는 감동을 주는 그림책이다. 바닷물이 점점 차올라 마을 주민 대부분이 떠나버린 마을에서 혼자 살아가고 있는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햇빛 빛깔의 따스한 노란빛과 바다 빛깔의 푸른 초록빛이 주조를 이룬 그림과 어우러져 잔잔하게 흐른다.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며 아련한 기억들을 톡톡 건드리며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는 이 이야기에 감동하지 않고 버텨낼 사람은 드물 것이다.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는 마을, 물이 차올라 살던 집이 잠기면 그 위에 새집을 지어 집들이 마치 상자를 쌓아올린 모양을 하고 있는 이 마을 대부분의 주민들은 보다 안정적인 곳으로 떠났으리라. 얼마 남지 않은 이웃과 체스를 두기도 하고 멀리 사는 자식들이 보낸 편지에 위로를 받으며 밤이면 파도 소리에 잠을 청하는 할아버지의 집은 3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할머니와 자식들과 손자들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기억의 저장고’ 같은 곳이다. 또다시 바닷물이 차오르기 시작해 새집을 짓는 과정에서 떨어뜨린 연장을 찾으러 아래로 잠수해서 내려가게 된 할아버지는 집마다 서려있는 가족들과의 추억을 다시 만나게 된다. 할머니와 결혼해서 처음 지은 작은 집 위로 첫 아이가 태어났던 집, 아이들이 키우던 새끼 고양이를 잃어버려 아이들이 슬퍼했던 집, 할머니가 만든 웨딩드레스를 입고 맏딸을 시집보냈던 집, 마을 축제가 있었던 집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치 그 바닷속 집은 가족들과의 행복한 기억들을 담고 살아가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과 닮아있다.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더 이상 이 집을 짓게 되지 않더라도 이곳에서 자라 결혼한 아이들과 손자들의 기억 속에 이 바닷속 집에 대한 이야기가 희미하게나마 전해질 것이다. 그러다 결국 저승으로 들어설 때 건너게 된다는 망각의 강 레테처럼 바다는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을 영원한 망각 속으로 삼켜버릴 것이다. 나의 존재가 유한한 것처럼 나를 둘러싼 보잘것없는 추억들도 나와 함께 영원히 묻혀버리겠구나, 생각하니 문득 슬퍼진다.
감동적인 책을 읽고 나면 마지막 장을 읽고도 쉽게 손에서 놓지 못하고 책등을, 책표지를 쓰다듬게 된다. 마음을 흔들어놓는 책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 책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은 내게도 추억여행을 떠나라고 등을 떠밀어준다. 할아버지의 바닷속 집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는 집은 아니지만 내 기억 속의 집들도 추억이라는 연결고리로 서로 가까이 이웃하고 있다. 동네 어귀에서도 눈에 띄는 커다란 밤나무가 서있던 집, 호박넝쿨과 나팔꽃이 사이좋게 엉켜서 담벼락을 타고 다니던 집, 작은 다락방이 있던 집, 사랑하는 아빠를 떠나보내며 어렴풋하게 어린 시절이 끝났음을 알게 된 집까지... 그 집들은 추억의 옷을 덧입어서 조금은 과장된 모습들이다. 뒷마당의 밤나무는 기이하게 훌쩍 키가 커 있고,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이 주류인 작은 꽃밭은 어느 유명한 정원들보다 예쁜 모습이다. 근처에 축사가 있어서 냄새에 시달렸을 법한 집마저도 동물의 분뇨냄새는 쏙 빠지고 아카시아 향기로만 기억되니 말이다.
내게는 이렇게 가끔씩 꺼내놓고 위로받을 추억의 집이 있는데 내 아이에게 과연 훗날 추억을 담고 있는 집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장소에 대한 기억, 사람에 대한 미련마저 매정하게 끊어내고 2년에 한 번씩 보따리를 챙겨 이동하는 신유목민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해지는 순간이다. 마당 한쪽에 아이와 같은 키의 나무를 심어 아이와 함께 자라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소일할 수 있는 마당 있는 집은 아니더라도 어느 하늘아래 어느 집을 떠올려도 엄마의 사랑을 듬뿍 캐낼 수 있도록 마음껏 사랑해 주는 걸로 아이에 대한 미안함을 대신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