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차 고조시키며 몰아가는 슬픔도 없고, 참았다 끝끝내 터진 눈물도 없다. 그러나 나는 버몬트 지방의 가난한 셰이커 교도 집안의 열두 살 소년의 일상을 따라가다가 스무 장도 채 남지 않은 책 후반부에서 그만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에 이런 복병을 숨겨두고 있을 줄 몰랐다. 사과 수확을 앞둔 가을날, 그저 담담하게 지난 여름에 자벌레가 극성이라 사과 싹을 너무 많이 먹어버려서 올해 수확할 사과가 많지 않다는 얘기를 나누던 아버지와 열두 살 아들 로버트 사이의 대화에서 다음해 봄에는 제대로 자벌레를 퇴치하라고 일러주시던 아버지는 자신이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말을 한다. 그해 겨울은 가난한 로버트네 집에 지독한 시련이었다.
지난 봄, 자신의 옷을 놀리는 친구 때문에 학교 수업을 빼먹고 집으로 오던 로버트는 이웃집 태너 아저씨네 젖소 ‘행주치마’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출산을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잔뜩 예민해진 ‘행주치마’는 도와주려는 로버트의 마음도 모른 채 반쯤 나온 아기 송아지와 로버트를 매달고 내달리지만 온 몸이 찢기고 ‘행주치마’에게 팔이 물린 상황에서도 아기 송아지와 ‘행주치마’의 목숨을 구한다. 로버트는 그 후로 일주일이나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다쳤지만 로버트 덕분에 ‘행주치마’와 두 마리의 송아지를 얻은 태너 아저씨는 로버트를 찾아와 예쁜 새끼 돼지 한 마리를 선물한다. 일 년쯤 후면 새끼돼지를 열 마리쯤 달고 있게 될 암퇘지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로버트는 이만큼 마음에 쏙 드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날부터 로버트는 새끼돼지 피기와 함께 들로 산으로 강으로 다니고 피기는 나날이 살이 오르고 식성이 좋아진다. 그리고 지독한 그해 겨울이 닥쳤다.
늙은 황소 솔로몬과 젖소 데이지, 달걀을 낳는 닭 몇 마리, 고양이 식구 몇 마리, 그리고 로버트의 새끼돼지 피기가 가축의 전부인 로버트네 집은 아버지가 읍내에서 돼지 도축일과 농사일로 아주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아버지의 몸 상태도 예전 같지 않았고, 사슴사냥용 총이 없는 아버지는 겨울철 매일 이른 새벽에 사슴사냥에 나섰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빗속에 4시간이나 사슴을 기다리던 아버지는 결국 기침이 심해져 폐가 안 좋아져 결국 어머니와 따로 침대를 써야할 상황이라 헛간에서 잠을 자야만 하는 상황까지 갔다. 말은 하지 않아도 로버트네 가족의 하나 남은 선택은 여러 번 시도를 했지만 새끼를 낳을 수 없는 암퇘지로 판명된 피기를 잡는 방법 밖에 없었다. 돼지를 잡는 솜씨가 늘 최고인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와 다름없는 피기를 잡게 되고 로버트는 잠자코 어쩔 수 없는 이 상황을 받아들여 조수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모든 상황이 종료되고 결국 울음을 터뜨린 로버트를 감싸며 말없이 위로하는 아버지의 눈물을 본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이듬 해 5월. 겨울을 넘기기 힘들 거라 말씀하셨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글을 몰라 투표도 할 수 없었고 자신의 이름조차 쓰지 못했던 아버지는 아들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랐다.
“농사일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해야 해. 다른 사람의 돼지를 잡는 일은 해서도 안 되고, 모자를 벗어 들고 남에게 고기를 얻으려 해서도 안 된다.” (145쪽)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지만 늘 가난을 면치 못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열두 살 아들의 시선에는 애잔함이 묻어난다.
“아빠는 항상 일하세요. 쉴 줄을 모르세요. 더 큰 문제는 마음속에 너무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뭔가를 잡으려고 애를 쓰지만 항상 한 발 늦기 때문에 잡을 수가 없는 시합을 하는 것 같아요.” (159쪽)
헛간에서 잠을 자던 아버지의 늦은 기상 아니, 영원히 일어날 수 없는 깊은 잠... 로버트는 그 정적을 향해 내뱉는다. “오늘 아침에는 푹 주무세요. 일어나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아빠 일까지 다 할게요. 더 이상 일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제 푹 쉬세요.” 그리고 아버지가 아침마다 하던 집안일을 다해놓고 어머니와 이모에게 읍내에 가서 장의사를 모셔오겠다며 담담하게 집을 나선다. 아주 어른스럽게 모든 일을 처리하고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알리고 상주로서 장례식을 준비하기 위해 옷을 꺼내 입는다. 엄마가 오래전에 만들어준 양복은 작고 아빠의 양복은 너무 컸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그러나 엄마와 이모를 모시고 아직 5년이나 융자금을 더 갚아야 우리 땅이 되는 가난한 농부의 현실의 짐을 지기에는 너무나 어린 열세 살 로버트의 상황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대목이다. 모든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던 로버트는 딱 한번 세상을 향해 소리를 내지른다. 아버지의 양복바지와 작업구두 아버지의 셔츠를 입은 광대 같은 모습에 화가 나 “하느님 왜 이렇게 가난해야 합니까? 사는 게 지옥 같아요.” 그리고 의젓하게 장례식을 마치고 늙은 이모와 엄마를 집안으로 모셔다 놓고 나머지 아버지가 하던 저녁 농장일 들을 마무리 한다. 그리고 홀로 찾은 아버지의 무덤가. “안녕히 주무세요, 아빠. 아빠랑 보낸 지난 13년은 정말 행복했어요.”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바로 성실하고 근면했던 돼지 잡는 사람, 내 아버지 헤븐 팩이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일찍 철이 든 이 아이가 예사로 넘겨지지 않는다. 누구나 저마다의 기억들을 얹어서 책을 읽는다. 모든 책이 누구에게나 다 한 가지 맛일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의 기억에 따라 책은 밋밋할 수도 찌릿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내 슬픈 이별의 기억을 얹어 펑펑 눈물을 쏟으며 읽었다. 다음 이야기가 있다 하니 서둘러 만나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