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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순전히 ‘책읽기’라는 단어에 이끌려 읽은 책이다. 닉 혼비의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이 겨우 작가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고, 대충 훑어보니 독서일기인 듯해서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지나치지 못하고 큰 기대 없이 집어 들었다.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는 영국의 인기작가 닉 혼비가 미국의 문화 서평잡지 <빌리버>에 3년 가까이 연재한 칼럼을 모은 리뷰모음집이다. 닉 혼비의 목록에 등장하는 책들 중 몇몇 작품들을 빼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생소한 책이었고, 클래식이든 팝이든 체계가 없는 나로서는 음악광인 닉 혼비가 비유 속에 넘치게 담아내는 음악이야기들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주석만큼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무수히 많은 괄호를 등장시켜 넣어두는 바람에 원문을 이어읽기 위해서 시선이 분주했던 상황도 책읽기를 힘들게 했던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책을 내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속 시원하게 꼬집어주고 유쾌하게 비틀어주는 시니컬한 유머가 가득한 닉 혼비의 글맛 때문이었다. 그것도 질질 끌면서 겨우 읽어낸 것이 아니라 아주 유쾌하게 읽었으니 닉 혼비의 작품들로 이제 건너가볼 작정이다.
닉 혼비는 잡지사 편집위원들과의 의견 충돌로 여러 번 연재가 정지된 상황임에도 위험수위를 넘나들며 근질거리는 손끝을 참지 못한다. ‘내게 맞지 않는 책을 고집스럽게 보는 것과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는 잡지 <빌리버>의 신념과 ‘맞지 않는 책만 끝까지 읽고 그것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한 영국 스타일’이 충돌한 것이다. 닉 혼비는 기회만 있으면 <빌리버>의 편집위원들에게 투덜대고 비아냥거린다. 흰옷 입은 신흥종교집단처럼 묘사하기도 하고 건조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냉정한 집단으로 보이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편집위원들의 기준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자신과 맞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쏟아낸다. 이런 것들이 편집 과정에서 걸러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대로 잡지에 실린 걸 보면 독자들 또한 그런 비꼼과 비틂을 닉 혼비 스타일의 유머로 재미있어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늘 ‘구입한 책 목록’보다 ‘읽은 책 목록’이 단출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서 혹은 축구시즌이라 책을 많이 읽지 못했노라 인간적인 이유를 들어 변명하는데 찌질하지 않고 당당하다. 물론 그 안에는 ‘절대 혹평은 사절한다.’는 잡지<빌리버>의 원칙 때문에 읽고도 제목과 작가를 언급할 수 없었던 책이 있었노라 슬쩍 밝히기도 한다. 만약 서점에 가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 내 서재의 읽지 않은 수백 권의 책으로는 겨우 9~10년 정도밖에 버틸 수 없으니 안전을 기하기 위해 책을 사들여야 한다는 닉 혼비의 말은 책을 읽어내는 속도가 책을 사들이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책벌레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다. 출판사에서 떠안기는 추천 책들, 동료나 지인들이 추천하는 책들, 가족이나 친구가 출간한 책까지 넘쳐나는 작가라는 위치에서도 이렇게 책 욕심이 채워질 줄 모르니 오로지 내 주머니 털어야 책을 들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 욕심은 늘 허기지고 목마른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읽지 않고 쌓여가는 책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가끔씩 돌아보게 되는 것이 내 독서의 유형과 방향이다. 지나치게 관심분야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낯선 분야의 책에도 도전을 해서 독서의 지평을 넓혀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독서의 넓이와 깊이에의 끝없는 욕망이랄까... 우려 섞인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 때면 늘 가던 길에서 살짝 벗어나 다른 길을 기웃거려 보게 되는데 가끔 새로운 기분을 맛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포기하거나 잠시 머물다 다시 원래의 익숙한 길로 돌아오곤 한다. 익숙한 길에서 곧바로 평화를 되찾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가 찜찜하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처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과 미련 같은 것이 끈적거리며 달라붙은 기분이 든다. 닉 혼비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거쳐 해답을 제시한 부분들이 보인다.
내 독서 지도가 1900년경 대영제국의 지도와 비슷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일까?’ 의아해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보다시피 내 무식함의 영역을 아주 조그맣게 침략하는 정도가 전부다. 매년 또 한 권의 고전소설이 이곳을 점령하고, 새로 나온 문학인의 전기가 저곳을 격퇴시키고 있다. 솔직히 말해, 더 멀리 보낼 병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내에서 일어나는 온갖 반란과 도주 시도를 막는 데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17쪽)
닉 혼비가 평소 읽지 않던 SF를 읽으려고 시도하다 바보가 된 느낌을 떨쳐버리면서 적은 글은 통쾌한 느낌마저 든다. 최근 자연과학 도서를 읽어보려고 시도하다가 뭐가 뭔지 모르는 글이 목침 수준의 두께로 위협하는 책을 만지작거리며 좌절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삼키지 못할 책이 분명하니 깔끔하게 털어내고 나도 나 자신의 한계와 이제 화해하련다.
나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한계와 화해했고,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어느 때보다도 더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그것들을 보라. 재치 있고 우스운 소설들, 군사정보기관과 노숙자들에 대한 논픽션. ...(중략)... 이 정도면 균형 있고 건강에 좋은 식사다. 부족한 비타민은 없다. 나는 시금치가 아니라, 구운 캥거루 고기나 초콜릿을 바른 개미요리에 해당하는 책을 찾고 있었던 셈인데,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보고 캥거루 고기에 끌려본 적이 없으니, 책에 해당하는 것도 삼키지 못하는 일이 놀라운 것 없다.(228쪽)
「캉디드」의 텍스트와 주석 사이를 미친 듯이 뒤적이다 씁쓸한 감회를 적은 글은 보르헤스 전집을 읽다 마찬가지로 주석과 텍스트 사이에서 지쳐 지금 1년 넘게 쉬고 있는 내게 희망을 준다. 닉 혼비는 ‘문학가’이니 캉디드를 어쨌든 소화해야겠지만 ‘독서애호가’인 나는 보르헤스를 지금 당장 집어던져도 될 자유가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인생을 살다 보면 자신이 ‘문학가’인지, 아니면 그저 독서애호가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그리고 나는 독서애호가가 더 재미있게 산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문학가는 「캉디드」같은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문학가로서의 함량이 약간 미달되기 때문이다. 반면 독서애호가는 뭐든 원하는 대로 읽어도 된다.(261쪽)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를 통해서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알토란 같은 조언을 들었다. 당분간은 책읽기와 글쓰기에서 닉 혼비의 조언에 충실히 따를 예정이다. 우선 첫 번째로 몇 장을 읽어도 머리와 가슴 어디에도 스며들지 못하고 빙빙 떠다니던 책을 과감하게 집어 던졌다. 평소 같았다면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을 끝내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두 번째는 도서관 서가에서 읽어 보리라 마음먹었던 책을 지나칠 때면 왠지 채무감 비슷한 감정에 한숨을 푹푹 내쉬곤 했었는데 이제 그 앞을 당당하게 지나다닌다. 세 번째 나와 맞지 않는 책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평을 하고 싶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는 <빌리버>의 의견에 동의한다.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내게는 적절한 시기에 아주 잘 만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