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순전히 ‘책읽기’라는 단어에 이끌려 읽은 책이다. 닉 혼비의 작품을 읽어본 적도 없이 겨우 작가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고, 대충 훑어보니 독서일기인 듯해서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가듯 지나치지 못하고 큰 기대 없이 집어 들었다.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는 영국의 인기작가 닉 혼비가 미국의 문화 서평잡지 <빌리버>에 3년 가까이 연재한 칼럼을 모은 리뷰모음집이다. 닉 혼비의 목록에 등장하는 책들 중 몇몇 작품들을 빼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생소한 책이었고, 클래식이든 팝이든 체계가 없는 나로서는 음악광인 닉 혼비가 비유 속에 넘치게 담아내는 음악이야기들에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주석만큼은 아니지만 직접적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무수히 많은 괄호를 등장시켜 넣어두는 바람에 원문을 이어읽기 위해서 시선이 분주했던 상황도 책읽기를 힘들게 했던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이 책을 내던지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속 시원하게 꼬집어주고 유쾌하게 비틀어주는 시니컬한 유머가 가득한 닉 혼비의 글맛 때문이었다. 그것도 질질 끌면서 겨우 읽어낸 것이 아니라 아주 유쾌하게 읽었으니 닉 혼비의 작품들로 이제 건너가볼 작정이다.
 

닉 혼비는 잡지사 편집위원들과의 의견 충돌로 여러 번 연재가 정지된 상황임에도 위험수위를 넘나들며 근질거리는 손끝을 참지 못한다. ‘내게 맞지 않는 책을 고집스럽게 보는 것과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에는 의미가 없다’는 잡지 <빌리버>의 신념과 ‘맞지 않는 책만 끝까지 읽고 그것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에 익숙한 영국 스타일’이 충돌한 것이다. 닉 혼비는 기회만 있으면 <빌리버>의 편집위원들에게 투덜대고 비아냥거린다. 흰옷 입은 신흥종교집단처럼 묘사하기도 하고 건조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냉정한 집단으로 보이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편집위원들의 기준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자신과 맞지 않은 책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쏟아낸다. 이런 것들이 편집 과정에서 걸러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대로 잡지에 실린 걸 보면 독자들 또한 그런 비꼼과 비틂을 닉 혼비 스타일의 유머로 재미있어 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늘 ‘구입한 책 목록’보다 ‘읽은 책 목록’이 단출하지만 아이가 태어나서 혹은 축구시즌이라 책을 많이 읽지 못했노라 인간적인 이유를 들어 변명하는데 찌질하지 않고 당당하다. 물론 그 안에는 ‘절대 혹평은 사절한다.’는 잡지<빌리버>의 원칙 때문에 읽고도 제목과 작가를 언급할 수 없었던 책이 있었노라 슬쩍 밝히기도 한다. 만약 서점에 가지 못할 일이 생긴다면 내 서재의 읽지 않은 수백 권의 책으로는 겨우 9~10년 정도밖에 버틸 수 없으니 안전을 기하기 위해 책을 사들여야 한다는 닉 혼비의 말은 책을 읽어내는 속도가 책을 사들이는 속도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책벌레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다. 출판사에서 떠안기는 추천 책들, 동료나 지인들이 추천하는 책들, 가족이나 친구가 출간한 책까지 넘쳐나는 작가라는 위치에서도 이렇게 책 욕심이 채워질 줄 모르니 오로지 내 주머니 털어야 책을 들일 수밖에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책 욕심은 늘 허기지고 목마른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싶다.

읽지 않고 쌓여가는 책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가끔씩 돌아보게 되는 것이 내 독서의 유형과 방향이다. 지나치게 관심분야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낯선 분야의 책에도 도전을 해서 독서의 지평을 넓혀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독서의 넓이와 깊이에의 끝없는 욕망이랄까... 우려 섞인 불안감이 고개를 쳐들 때면 늘 가던 길에서 살짝 벗어나 다른 길을 기웃거려 보게 되는데 가끔 새로운 기분을 맛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포기하거나 잠시 머물다 다시 원래의 익숙한 길로 돌아오곤 한다. 익숙한 길에서 곧바로 평화를 되찾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가 찜찜하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는 길’처럼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과 미련 같은 것이 끈적거리며 달라붙은 기분이 든다. 닉 혼비도 이런 비슷한 고민을 거쳐 해답을 제시한 부분들이 보인다.   
내 독서 지도가 1900년경 대영제국의 지도와 비슷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대체 이 사람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것일까?’ 의아해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보다시피 내 무식함의 영역을 아주 조그맣게 침략하는 정도가 전부다. 매년 또 한 권의 고전소설이 이곳을 점령하고, 새로 나온 문학인의 전기가 저곳을 격퇴시키고 있다. 솔직히 말해, 더 멀리 보낼 병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내에서 일어나는 온갖 반란과 도주 시도를 막는 데 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17쪽) 

닉 혼비가 평소 읽지 않던 SF를 읽으려고 시도하다 바보가 된 느낌을 떨쳐버리면서 적은 글은 통쾌한 느낌마저 든다. 최근 자연과학 도서를 읽어보려고 시도하다가 뭐가 뭔지 모르는 글이 목침 수준의 두께로 위협하는 책을 만지작거리며 좌절했던 경험이 떠올랐다. 삼키지 못할 책이 분명하니 깔끔하게 털어내고 나도 나 자신의 한계와 이제 화해하련다.  

나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한계와 화해했고, 내가 좋아하는 책들이 어느 때보다도 더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그것들을 보라. 재치 있고 우스운 소설들, 군사정보기관과 노숙자들에 대한 논픽션. ...(중략)... 이 정도면 균형 있고 건강에 좋은 식사다. 부족한 비타민은 없다. 나는 시금치가 아니라, 구운 캥거루 고기나 초콜릿을 바른 개미요리에 해당하는 책을 찾고 있었던 셈인데,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보고 캥거루 고기에 끌려본 적이 없으니, 책에 해당하는 것도 삼키지 못하는 일이 놀라운 것 없다.(228쪽)

「캉디드」의 텍스트와 주석 사이를 미친 듯이 뒤적이다 씁쓸한 감회를 적은 글은 보르헤스 전집을 읽다 마찬가지로 주석과 텍스트 사이에서 지쳐 지금 1년 넘게 쉬고 있는 내게 희망을 준다. 닉 혼비는 ‘문학가’이니 캉디드를 어쨌든 소화해야겠지만 ‘독서애호가’인 나는 보르헤스를 지금 당장 집어던져도 될 자유가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인생을 살다 보면 자신이 ‘문학가’인지, 아니면 그저 독서애호가인지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그리고 나는 독서애호가가 더 재미있게 산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문학가는 「캉디드」같은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문학가로서의 함량이 약간 미달되기 때문이다. 반면 독서애호가는 뭐든 원하는 대로 읽어도 된다.(261쪽)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를 통해서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알토란 같은 조언을 들었다. 당분간은 책읽기와 글쓰기에서 닉 혼비의 조언에 충실히 따를 예정이다. 우선 첫 번째로 몇 장을 읽어도 머리와 가슴 어디에도 스며들지 못하고 빙빙 떠다니던 책을 과감하게 집어 던졌다. 평소 같았다면 한번 읽기 시작한 책을 끝내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두 번째는 도서관 서가에서 읽어 보리라 마음먹었던 책을 지나칠 때면 왠지 채무감 비슷한 감정에 한숨을 푹푹 내쉬곤 했었는데 이제 그 앞을 당당하게 지나다닌다. 세 번째 나와 맞지 않는 책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평을 하고 싶지만 그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는 <빌리버>의 의견에 동의한다.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내게는 적절한 시기에 아주 잘 만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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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 몰입해서 책을 읽고 있다면 그 책 제목이 궁금해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어떻게 해서든 표지를 훔치고, 책을 배경으로 누군가 인터뷰를 하거나 서재에서 찍은 사진을 만나면 인물은 관심 밖이고 실눈을 뜨고 배경이 되는 책꽂이의 책등을 훑는 습관이 있고,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면 그 집의 서재부터 살피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책에 유별난 관심을 보일 것이다. 남의 독서일기가 궁금하고 서재가 궁금하고 유별나고 미친(?) 책사랑에 함께 마음이 파르르 떨리며 공감한다. 내 책꽂이에 책에 관한 책이 꽂히기 시작한 것은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과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로부터였다. 지금도 이 두 권은 내 책꽂이에서 무척이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책이다. 집안 구석구석 책이 쌓여가다 책 무게를 못 이겨 책장이 부러져 버리고 현관기둥을 따라 높아져 가다가 현관문까지 막아버리는 상황이 되어버려 더 이상 한권의 책도 사들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집을 통째로 마을 도서관으로 기증한 엘리자베스 브라운이 주인공인 『도서관』(데이빗 스몰 그림/사라 스튜어트 글)은 아이에게 가장 신나게 읽어주는 그림책이고, 바닷가 모래 언덕 위에 자신의 장서들을 벽돌삼아 시멘트로 발라서 집을 지은 카를로스 브라우어의 광기도 이해할 수 있다. (『위험한 책』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전작주의자의 꿈』의 조희봉씨처럼 한 작가의 전작에 몰두하기도 했었고, 『탐서주의자의 책』은 진하게 공감하고 나에게 독서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배움이 있는 책이었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는 궁정식 사랑과 육체적 사랑으로 나눈 책을 사랑하는 방법을 마치 내 것처럼 자주 인용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희귀본 거래상의 세계를 알게 해준 릭 게코스키의 저서와 꾸준히 읽어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읽기』,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일기』, 가장 최근에 읽은 닉 혼비의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런던스타일 책읽기』까지 책에 미친 사람들의 독서일기를 들여다보고 공감하고 부러워하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주책없이 늘어지는 것도 병이 아닌가 싶다.

 

밥 먹고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책과 가까이 하는 것밖에 특별한 소일거리가 없었던 선비들 틈에서 그의 책 사랑이 얼마나 지나쳤으면 ‘책에 미친 바보’라는 별칭이 후대까지 전해졌을까 싶은 이덕무와 책을 사들이느라 가산을 탕진한 최한기의 뒤를 잇는 책에 미친 사람들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수대에 걸친 문중문고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문태갑, 제대로 된 한국어사전이 없음을 한탄하며 사전수집과 연구에 몰두하는 국어학자 박형익, 집안 대대로 천주교 서적과 인연이 깊은 송명근, 괴테 사랑이 넘치는 독문학자 최두환 레기네 부부처럼 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처럼 묶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꼬장꼬장한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볼 수 없으니 마냥 부러워할 따름이다. 이렇게 책이 가업이거나 본업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비해 본업을 따로 두고 책과의 사랑에 빠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언뜻 보이는 내 모습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매달 지출하는 책값 때문에 불필요한 취미나 지출을 줄이게 되고, 한 무더기씩 책이 들어올 때마다 책들의 공간 마련을 위해 고민을 하는 모습은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지만 나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한정된 지출을 내 책과 아이 책의 비율 맞추기로 고민하다 결국 아이 쪽으로 기우는 내 모습의 씁쓸함은 이 책에 소개된 몇몇 책쟁이들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만화 만드는 꿈을 잠시 접어두고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려는 만화 마니아 박지수, 책과 조금 멀어져서 화천 우체국장으로 철마다 시골 마을 사람들의 농산품 판매에 힘을 쓰고 있는 ‘전작주의자’ 조희봉, 가업인 목재상이란 직업과 책을 통한 세상 공부에 몰두하던 목재상 김태석처럼 취재 후 근황을 물으니 사는 게 바빠서 책과 조금 소원하게 지내고 있더라는 얘기가 바로 그것이다. 책에 미쳐 책에 둘러싸여 일생을 보냈다는 책쟁이들의 성공신화(?)만 보여줬다면 한번 읽고 고귀하게 모셔만 두는 책이었을 텐데 평범한 책쟁이들의 인간적(?)인 이야기와 어우러져 서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불문학자 민희식 교수의 인문학 경시 풍조를 개탄하는 말은 계층 간 세대 간 담을 쌓고 편 가르기를 하며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가 유독 인문학 경시풍조로만 생긴 현상이 아닐지라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며 한숨이 새어나온다. 내 그릇이 모자라 턱없이 높고 험한 산이라 오히려 지나치게 중시했던 인문학의 친근한 접근로를 찾고 있는 중이라서 더욱 깊이 다가오는 말이다.

“인문학은 학문의 학문입니다. 상상력, 독창성, 창의력을 길러주지요. 답이 하나이고 그것을 맞히는 식의 교육은 진정한 실력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식은 위험합니다. 한국의 교육은 잘못돼 있어요. 언어, 수학을 잘하면 대학입학시험에 유리하고 음악, 미술은 아예 평가 대상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답을 주고 강요합니다. 잘못이에요. 그것은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회나 정치는 포용력이 없어요.”

 

재밌는 글쓰기와 책읽기를 가르치는 윤태규 선생님의 놀이로 귀결되는 독서론은 지금 당장 아이를 놀이터로 내몰아야겠다는 공감을 불러온다. '만 권의 책을 3대에 걸쳐 대물림하는 집안에서 학자가 나온다'했는데 다행히 책 욕심 많고 책 읽기를 즐기는 아이가 있어서 적극적으로 책을 대주고 있는 내 뒤통수를 한대 치는 말이다.   

“앉아서 책읽기보다는 골목에서 뛰어노는 게 낫습니다. 삶은 상상이 아니라 몸으로 살기 때문이죠.” ‘종이와 활자’는 결국 삶이 말라비틀어진 게 아니겠는가.

책에 대한 이야기처럼 질리지 않게 매력적인 이야기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의 책읽기가 궁금한 관음증적 호기심에 이끌려 이런 종류의 책들을 즐겨 보는 편이다. 국민 일인당 한해 독서량이라든지 인문학의 경시 풍조에 대한 이야기들이 딴 세상 이야기인양 엄청난 독서량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책쟁이들이 넘치는 책동네에 살고 있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늘 부러움을 동반하고 다니며 때로는 과한 욕심에 가랑이가 찢어지기도 하고 가끔씩은 숨어있는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에 소개된 28명의 책쟁이들은 한 달에 수십 만원어치의 책을 사들이고 그 책들에게 방을 내주고 골방으로 쫓겨나면서도 행복해 하는 사람들, ‘왜 사는가’와 ‘왜 책을 읽나’가 동어반복인 사람들, 상식선에서는 결코 이해 못할 책에 미친 사람들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메모해 둔 발터 벤야민의 글을 입으면 딱 맞는 옷이 될 이 책의 책쟁이들의 행복한 해피엔드를 기원하며 옮겨본다.  

 

「수집가와 역사가로서의 푹스」 발터 벤야민. 수집가의 특성에 대하여...

1)수집가는 원래 학자는 아니었지만, 수집활동을 통해 얻어진 박식함과 전문성으로 학자가 될 수 있다. 2)수집가는 고급한 학술적 연구자들에게 “백안시당하는 경전외적 사물들에 시선”을 주고 “이름 없는 자들과 그 이름 없는 자들의 솜씨의 흔적을 보존”함으로써, 대중예술(문화)에 관한 관심을 끌어내고, 예술이나 문화가 천재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3)수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정열적인 사람들로, 공공 박물관은 독창성 측면에서 절대 개인적인 수집가를 넘어설 수 없다. 4)수집가는 가난한 사람이다(부자였던 사람도, 결국은 가난하게 된다). 그러나 호주머니는 텅 비어 있지만 “꿈속에서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백만장자이다. 5)수집가는 광적인 낭만주의자이기보다 냉철한 자본가일 수 있으며, 위대한 수집가는 보물을 보존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의 수집물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고 싶은 노출증을 동시에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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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미술관 1
랄프 이자우 지음, 안상임 옮김 / 비룡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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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입맛에 맞는 것만 먹고 익숙한 곳에만 들르는 것처럼 안이한 내 독서편식을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현재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의 풍미를 더해줄 거라는 아쉬움이 더해지면 더욱 그러하다. 랄프 이자우의 『거짓의 미술관』이 그랬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 미하엘 엔데의 뒤를 잇는 독일환상문학 작가라는 이유로 『거짓의 미술관』을 골라 들었지만 미술 작품들에 대한 지식과 진화를 둘러싼 과학과 종교와 사상의 첨예한 대립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들을 갖고 있었더라면 편안하게 즐길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컸다.  

<르네 마그리트 '경솔한 수면자'>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경솔한 수면자’가 예술품 도난사건의 중심에 있다. 물론 ‘경솔한 수면자’라는 작품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찾아보는 수고를 해야 했다. 작품에 소개된 예술품들에 대한 사진 정도라도 실어주면 좋으련만 독자의 궁금증은 스스로 해결하라는 불친절한 책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헤르마프로디테’ 조각상이 폭파되는 것을 시작으로 세계 유명 박물관의 미술품들이 일주일 간격으로 차례로 파괴되거나 도난을 당하고, 감쪽같이 사라진 미술품이 있던 자리에는 마그리트의 ‘경솔한 수면자’에 등장하는 물건들이 놓인다. 거울, 붉은 이불, 황금사과, 비둘기, 양초, 리본, 모자가 그것이다. 예술품 도난의 시작인 ‘헤르마프로디테’는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아들 헤르마프로디토스가 요정 살마키스와 한 몸이 된 모습을 뜻한다.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관을 둘 다 가진 동물이나 식물을 일컫는 말이다. 루브르 박물관에 범인이 남긴 지문과 일치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수감된 알렉스 다니엘스가 바로 완벽한 헤르마프로디테라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지고, 세계적인 미술품들의 보험사인 아트케어의 보험탐정인 다윈 쇼우는 이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용의자 알렉스 다니엘스를 심문하게 된다. 하지만 알렉스의 혐의가 벗겨지면서 풀려나게 되고 대립관계로 시작된 알렉스와 다윈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점차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의견을 나누는 파트너가 된다. 


미술품 도난사건 배후에는 수십 년 전 비밀리에 진행됐던 인간 유전자를 이용한 비윤리적인 실험의 의해 헤르마프로디테로 복제되어 고통스럽게 살아온 삶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테오’가 있고, 오만하고 무자비했던 실험을 영원히 봉인하려는 ‘경솔한 수면자’가 있다. ‘일반적으로 유효한 대전제’인 진화론의 오류에 대항한 창조론과 지적설계 이론의 불꽃 튀는 대립이 기저에 흐른다. 우리에겐 황우석 사건으로 충격에 빠졌던 기억이 있는 인간 복제에 대한 윤리의식과 인간의 진화과정에 개입하려는 과학의 오만함이 충돌한다. 현생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는 성별 간의 전쟁도 없고,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이 빠르고 생식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고 스스로 번식할 수도 있는 완벽한 ‘진성 헤르마프로디테’여야 한다는 논리에 집착해서 비밀리에 유전자를 이용한 불법 인간 복제 실험을 했던 ‘인간 유전자 연구소(HUGE)’의 마지막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알렉스와 테오를 비롯한 열세 명의 헤르마프로디테 복제인간이다. 인간 유전자 연구 제한을 광범위하게 폐지하려는 법안이 투표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 과거에 자행된 불법적인 실험을 지워버리고 인간 유전자 연구를 선점하려는 음모가 깔려있다. 모든 사실이 밝혀진 결말 부분...인류의 아름다운 예술품들과 유전자실험의 부도덕성을 보여주는 기형의 태아들이 담겨있는 유리병들이 한 공간에 전시된 테오의 기묘한 미술관은 상상만으로도 섬칫하다. 인간 유전자 연구가 활발한 현실에서 과학의 위치가 광기와 치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물론 미술 작품에 대한 이해와 생명의 기원을 둘러싼 이론들에 대한 지식 없이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일반적으로 유효한 대전제’에 대한 맹신과 무지함을 경계하는 마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랄프 이자우가 말했던 ‘수준 높은 오락과 더불어 사고의 동인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소설의 1차적 과제는 성공적으로 수행한 셈이다. 언젠가 읽어보리라 리스트에만 잔뜩 담아놓은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들을 비롯한 자연과학 책들과 미술 관련 책들을 읽어볼 계획이다. 이번만큼은 오랜만에 찾아온 지적 호기심을 내 게으름이 막아서지 않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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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우리 얼 그림책 1
박윤규 글, 한병호 그림, 진용선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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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오늘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우리나라를 되찾은 지 66년 되는 광복절이다. 우리 집 일곱 살 녀석이 요즘 푹 빠져서 읽고 있는 인물전에 등장하는 안중근, 유관순, 윤봉길 선생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이 그토록 바라던 조국의 해방을 맞이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 분들은 나라의 독립의 순간을 못 보고 눈을 감았다는 것을 아이는 온 마음으로 안타까워한다. 그림책 『아리랑』의 원작 영화 ‘아리랑’을 만든 나운규 또한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서른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독립투사가 되어 총칼을 품고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만이 나라를 위하는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암울했던 시절, 나운규의 ‘아리랑’은 나라 잃은 서러움에 가슴 깊이 우러나는 울음으로 공감했고 항일정신을 다지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영화 ‘아리랑’의 기저에 흐르는 우리의 구전민요 ‘아리랑’의 서글픈 가락과 어우러져 우리 민족의 가슴 속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암울했던 시대의 아픔과 함께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이 시대를 넘어 전해온다.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어린이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구성해서 만든 그림책이 푸른숲주니어에서 출간됐다. ‘우리얼 그림책’이라는 테마로 기획한 시리즈의 그 첫 번째 그림책이라 작품선정에 꽤 신중을 기했으리라 짐작된다. 변사의 해설을 곁들여 들었던 무성영화 ‘아리랑’을 박윤규 작가가 글을 쓰고 우리에게 토속적인 도깨비 그림으로 유명한 한병호 그림작가가 호흡을 맞춰 탄생한 그림책 『아리랑』이다. 일본군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해 정신이 나간 영진과 그의 여동생 영희, 영진의 친구 영구, 일본의 앞잡이 기호가 중심인물들이다. 영진의 학비와 약값으로 빌린 돈 대신에 영진의 동생 영희를 탐내는 기호는 영희를 덮치려 하고 영희를 구하려던 현구마저 험한 꼴을 당하는 순간 정신이 돌아온 영진이 기호를 때려눕힌다. 제 정신이 돌아온 영진은 기호를 죽인 살인자가 되어 일본 경찰에 잡혀서 끌려가게 되고 그 뒤를 아버지와 영희와 현구와 마을 사람들이 노래 아리랑을 구슬프게 부르며 뒤따른다.

영진이 기쁠 때나 슬플 때 부르던 노래, 꼭 돌아오마 약속하며 불러주기를 바랐던 노래 <아리랑>은 시대를 돌아 세대로 전해지며 말 그대로 우리 혈관 속을 타고 흐르는 노래가 아닐까. 설움과 한과 슬픔과 더불어 기쁨과 희망 또한 담아내는 희한하고 야릇한 노래가 <아리랑>이 아닐까.

그림책 『아리랑』도 변사의 구성진 해설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책과 함께 들어있는 구연동화와 대표적인 4개의 아리랑 노래는 특별한 선물이다. 정선 아리랑, 진도 아리랑, 밀양 아리랑은 이제 뒤죽박죽 섞이지 않고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반갑다. 훌륭한 기획 의도로 정성스레 만들어진 좋은 책이 널리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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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ㄱ ㄴ ㄷ 비룡소 창작그림책 7
박은영 글.그림 / 비룡소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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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아이 아니랄까봐 자동차 기차에 열광하는 아들녀석...
책표지에 혹은 작은 그림으로라도 자동차나 기차가 나오는 책은 무조건 좋아한다.
'기차 ㄱㄴㄷ'은 돌무렵 구입해준 책이었는데 한글자음을 소재로 다룬 책이라
이제 돌쟁이한테는 좀 이르지 않을까 싶어서 잠시 고민했지만
워낙 기차를 좋아해서 그림감상이라도 하라고 사버렸다.
 
기다란 기차가 나무옆을 지나 다리를 건너 랄랄라 노래를 부르며...
 
이렇게 ㄱ부터 ㅎ까지의 자음을 그림책을 통해서 익힐 수있게 만들어진 아주 유익한 책이다.
한글입문하는 아이 혹은 한글떼기 하는 아이들한테 아주 효과적인 책이라고
엄마들 사이에 추천도서로 입소문도 꽤 나있는 책인지라
두고두고 보려고 구입했는데 별 기대도 안했는데 우리아들 꽤 여러개의 자음을 맞춘다.
 
노래를 부르듯 리듬을 실어서 읽어주면 아이도 금방 따라할 정도로 잘 짜여져있다.
한장 한장 넘기면서 추임새 비슷하게 '칙칙폭폭칙칙폭폭'을 넣어서 읽어줬더니
아들과 조카가 '또읽어줘요'를 쉴새없이 외쳐서 한자리에서 지치도록 읽어줬다.
지금은 혼자 책꺼내서 무릎위에 펼쳐놓고 줄줄 읽어나간다.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마냥...
 
'기차 ㄱㄴㄷ'
내용이 단조로운 부분이 좀 아쉽지만
수채화 같은 그림속의 빨간 기차가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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