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 몰입해서 책을 읽고 있다면 그 책 제목이 궁금해서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어떻게 해서든 표지를 훔치고, 책을 배경으로 누군가 인터뷰를 하거나 서재에서 찍은 사진을 만나면 인물은 관심 밖이고 실눈을 뜨고 배경이 되는 책꽂이의 책등을 훑는 습관이 있고,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면 그 집의 서재부터 살피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책에 유별난 관심을 보일 것이다. 남의 독서일기가 궁금하고 서재가 궁금하고 유별나고 미친(?) 책사랑에 함께 마음이 파르르 떨리며 공감한다. 내 책꽂이에 책에 관한 책이 꽂히기 시작한 것은 김훈의 『내가 읽은 책과 세상』과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로부터였다. 지금도 이 두 권은 내 책꽂이에서 무척이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책이다. 집안 구석구석 책이 쌓여가다 책 무게를 못 이겨 책장이 부러져 버리고 현관기둥을 따라 높아져 가다가 현관문까지 막아버리는 상황이 되어버려 더 이상 한권의 책도 사들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집을 통째로 마을 도서관으로 기증한 엘리자베스 브라운이 주인공인 『도서관』(데이빗 스몰 그림/사라 스튜어트 글)은 아이에게 가장 신나게 읽어주는 그림책이고, 바닷가 모래 언덕 위에 자신의 장서들을 벽돌삼아 시멘트로 발라서 집을 지은 카를로스 브라우어의 광기도 이해할 수 있다. (『위험한 책』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 『전작주의자의 꿈』의 조희봉씨처럼 한 작가의 전작에 몰두하기도 했었고, 『탐서주의자의 책』은 진하게 공감하고 나에게 독서의 영역을 확장시킬 수 있는 배움이 있는 책이었다. 앤 패디먼의 『서재 결혼시키기』는 궁정식 사랑과 육체적 사랑으로 나눈 책을 사랑하는 방법을 마치 내 것처럼 자주 인용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희귀본 거래상의 세계를 알게 해준 릭 게코스키의 저서와 꾸준히 읽어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읽기』, 알베르토 망구엘의 『독서일기』, 가장 최근에 읽은 닉 혼비의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런던스타일 책읽기』까지 책에 미친 사람들의 독서일기를 들여다보고 공감하고 부러워하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다. 책에 대한 이야기가 이렇게 주책없이 늘어지는 것도 병이 아닌가 싶다.

 

밥 먹고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책과 가까이 하는 것밖에 특별한 소일거리가 없었던 선비들 틈에서 그의 책 사랑이 얼마나 지나쳤으면 ‘책에 미친 바보’라는 별칭이 후대까지 전해졌을까 싶은 이덕무와 책을 사들이느라 가산을 탕진한 최한기의 뒤를 잇는 책에 미친 사람들은 의외로 가까이에 있다. 수대에 걸친 문중문고를 계승 발전시켜 나가는 문태갑, 제대로 된 한국어사전이 없음을 한탄하며 사전수집과 연구에 몰두하는 국어학자 박형익, 집안 대대로 천주교 서적과 인연이 깊은 송명근, 괴테 사랑이 넘치는 독문학자 최두환 레기네 부부처럼 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처럼 묶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꼬장꼬장한 고집스러움이 느껴진다.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볼 수 없으니 마냥 부러워할 따름이다. 이렇게 책이 가업이거나 본업인 사람들의 이야기에 비해 본업을 따로 두고 책과의 사랑에 빠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는 언뜻 보이는 내 모습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 매달 지출하는 책값 때문에 불필요한 취미나 지출을 줄이게 되고, 한 무더기씩 책이 들어올 때마다 책들의 공간 마련을 위해 고민을 하는 모습은 정도의 차이가 분명히 있지만 나에게도 익숙한 이야기다.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한정된 지출을 내 책과 아이 책의 비율 맞추기로 고민하다 결국 아이 쪽으로 기우는 내 모습의 씁쓸함은 이 책에 소개된 몇몇 책쟁이들에게서 위안을 받는다. 만화 만드는 꿈을 잠시 접어두고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려는 만화 마니아 박지수, 책과 조금 멀어져서 화천 우체국장으로 철마다 시골 마을 사람들의 농산품 판매에 힘을 쓰고 있는 ‘전작주의자’ 조희봉, 가업인 목재상이란 직업과 책을 통한 세상 공부에 몰두하던 목재상 김태석처럼 취재 후 근황을 물으니 사는 게 바빠서 책과 조금 소원하게 지내고 있더라는 얘기가 바로 그것이다. 책에 미쳐 책에 둘러싸여 일생을 보냈다는 책쟁이들의 성공신화(?)만 보여줬다면 한번 읽고 고귀하게 모셔만 두는 책이었을 텐데 평범한 책쟁이들의 인간적(?)인 이야기와 어우러져 서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불문학자 민희식 교수의 인문학 경시 풍조를 개탄하는 말은 계층 간 세대 간 담을 쌓고 편 가르기를 하며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가 유독 인문학 경시풍조로만 생긴 현상이 아닐지라도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며 한숨이 새어나온다. 내 그릇이 모자라 턱없이 높고 험한 산이라 오히려 지나치게 중시했던 인문학의 친근한 접근로를 찾고 있는 중이라서 더욱 깊이 다가오는 말이다.

“인문학은 학문의 학문입니다. 상상력, 독창성, 창의력을 길러주지요. 답이 하나이고 그것을 맞히는 식의 교육은 진정한 실력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지식은 위험합니다. 한국의 교육은 잘못돼 있어요. 언어, 수학을 잘하면 대학입학시험에 유리하고 음악, 미술은 아예 평가 대상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답을 주고 강요합니다. 잘못이에요. 그것은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사회나 정치는 포용력이 없어요.”

 

재밌는 글쓰기와 책읽기를 가르치는 윤태규 선생님의 놀이로 귀결되는 독서론은 지금 당장 아이를 놀이터로 내몰아야겠다는 공감을 불러온다. '만 권의 책을 3대에 걸쳐 대물림하는 집안에서 학자가 나온다'했는데 다행히 책 욕심 많고 책 읽기를 즐기는 아이가 있어서 적극적으로 책을 대주고 있는 내 뒤통수를 한대 치는 말이다.   

“앉아서 책읽기보다는 골목에서 뛰어노는 게 낫습니다. 삶은 상상이 아니라 몸으로 살기 때문이죠.” ‘종이와 활자’는 결국 삶이 말라비틀어진 게 아니겠는가.

책에 대한 이야기처럼 질리지 않게 매력적인 이야기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의 책읽기가 궁금한 관음증적 호기심에 이끌려 이런 종류의 책들을 즐겨 보는 편이다. 국민 일인당 한해 독서량이라든지 인문학의 경시 풍조에 대한 이야기들이 딴 세상 이야기인양 엄청난 독서량과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책쟁이들이 넘치는 책동네에 살고 있는 축복을 누리고 있다. 늘 부러움을 동반하고 다니며 때로는 과한 욕심에 가랑이가 찢어지기도 하고 가끔씩은 숨어있는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 책에 소개된 28명의 책쟁이들은 한 달에 수십 만원어치의 책을 사들이고 그 책들에게 방을 내주고 골방으로 쫓겨나면서도 행복해 하는 사람들, ‘왜 사는가’와 ‘왜 책을 읽나’가 동어반복인 사람들, 상식선에서는 결코 이해 못할 책에 미친 사람들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서 메모해 둔 발터 벤야민의 글을 입으면 딱 맞는 옷이 될 이 책의 책쟁이들의 행복한 해피엔드를 기원하며 옮겨본다.  

 

「수집가와 역사가로서의 푹스」 발터 벤야민. 수집가의 특성에 대하여...

1)수집가는 원래 학자는 아니었지만, 수집활동을 통해 얻어진 박식함과 전문성으로 학자가 될 수 있다. 2)수집가는 고급한 학술적 연구자들에게 “백안시당하는 경전외적 사물들에 시선”을 주고 “이름 없는 자들과 그 이름 없는 자들의 솜씨의 흔적을 보존”함으로써, 대중예술(문화)에 관한 관심을 끌어내고, 예술이나 문화가 천재 개인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3)수집가는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정열적인 사람들로, 공공 박물관은 독창성 측면에서 절대 개인적인 수집가를 넘어설 수 없다. 4)수집가는 가난한 사람이다(부자였던 사람도, 결국은 가난하게 된다). 그러나 호주머니는 텅 비어 있지만 “꿈속에서처럼 앞만 보고” 달려가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백만장자이다. 5)수집가는 광적인 낭만주의자이기보다 냉철한 자본가일 수 있으며, 위대한 수집가는 보물을 보존하는 사람이면서 자신의 수집물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고 싶은 노출증을 동시에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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