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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채의 그림자 정원
이향안 지음, 호랑 그림 / 현암사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도서와 대한제국 말기에 반출된 직지심체요절의 반환을 위해 평생을 바쳤던 재불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의 타계소식을 병원에서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에서 듣는 사람 없이 웅얼거리는 TV를 통해서 들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약탈해간 조선왕실의 의궤가 89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이틀 뒤 보신각 타종행사까지 가졌었다는 소식도 박병선 박사의 타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 6일 이었다. 박병선 박사가 민간인 여성 최초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아 프랑스를 건너갔고 하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하여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해냄으로써 평생의 업을 운명처럼 만난 것처럼 <채채의 그림자 정원>은 바로 이렇게 시기적절하게 나와 운명처럼 만나게 됐다. 좀 거창한가? 하지만 가끔은 내가 책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책이 나를 선택하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채채의 그림자 정원>은 임진왜란 때 사라질 뻔했던 조선왕조실록 진주사고본을 지켜낸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역사동화다. 임진왜란 때 실록이 보관되어 있던 춘추관과 충주 성주 세 곳의 사고가 불타서 소실되고 유일하게 남은 것은 전주사고본 뿐이었다. 역사가 알려준 대로 당시 유생이었던 안의와 손홍록이 목숨을 걸고 운반하여 내장산 용굴암을 비롯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번을 서며 지켜내 현재의 우리가 온전한 조선왕조실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주사고본마저 유실됐다면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조선왕조 절반의 역사는 영원히 잃어버렸을 엄청난 일이었다. 실록을 지켜낸 것은 안의와 손홍록 뿐이 아니었다. 스님들은 물론이고 약초 캐는 심마니들과 사당패까지 힘을 합쳐서 이뤄낸 결과였다고 한다. 이 책속에 등장하는 채채와 풍이 그리고 나무꾼 아저씨와 약초 할머니 마을 아낙네들이 바로 그들이었을 것이다.
땟거리를 구하기 위해 깊은 산속을 헤매는 오라버니 풍이를 기다리는 게 일과가 되어버린 채채에게 용굴은 혼자만의 놀이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난 밤 내내 용굴 쪽에서 달구지 소리가 들리더니 채채의 용굴을 낯선 할아버지와 나무상자들이 차지해 버렸다. 왜적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는 나라의 보물을 선비 몇이서 몰래 숨겼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아 죽은 아버지, 그리고 양반들에게 속수무책으로 살던 집마저 빼앗기고 산속 움막에 들어와 살고 있는 채채와 풍이 남매. 양반이라면 치를 떨며 돈만 생기면 양반 상놈 없는 나라로 떠날 거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풍이는 곡식을 품삯으로 준다는 말에 양반 할아버지에게 보물을 보관할 누각을 지어주기로 거래를 한다. 하지만 풍이의 속셈은 번을 서가며 지키고 있는 귀한 보물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어쩌면 귀한 보물이 신분차별 없는 세상으로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터이다. 하지만 거풍을 시키려고 나무상자에서 꺼내는 실록을 본 순간 맥빠진 울분만 쏟아내 놓는다. 그깟 책이 뭐라고 애지중지 하는지 도통 모를 일이라고...
굶주림 속의 채채와 풍이, 왜적들에게 위치가 탄로 날까봐 추운 동굴에서 불조차 피우지 못하고 지내던 할아버지 모두에게 모진 겨울이 지났다. 실록을 보관하고 있는 누각 옆 빈터에는 나라를 염려하는 기도와 염원들을 쌓아올린 돌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채채는 달빛을 받아 춤추는 돌탑들의 그림자들을 보며 이 작은 정원을 그림자 정원이라 불렀다. 하지만 실록을 찾는 왜적의 무리들이 용굴로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할아버지는 실록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갈 채비를 한다. 왜적선발대는 점점 가까워지고... 실록 옮길 비용에 쓰일 보석보퉁이를 훔쳐 달아났다가 돌아와 왜적선발대의 위치를 알려준 풍이가 제안한 속임수는 과연 실록을 지켜낼 수 있을까?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용골에 들러 할아버지로부터 실록에 담긴 이야기들을 들은 채채에게 단순히 임금님의 책이었던 실록이 재미있는 이야기책이 되고 신분차별에 분노하여 다른 세상으로 가기를 꿈꿨던 풍이가 실록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까지 거는 위험한 일에 앞장서게 되는 과정이 억지와 무리수 없이 자연스레 흘러간다. 역사적인 사실 위에 허구가 더해진 역사동화는 역사적 현장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몰입도가 중요하다.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무대와 21세기에 창조해낸 동화 속 인물이 자유롭게 어우러져 사실적인 현장감이 느껴지는 감동까지 전해 준다면 진정한 역사동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채채와 풍이 그리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실록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강한 의지가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져 온다. 실록의 피신처였던 용굴에 가면 낡은 사내아이 옷에 빨간 댕기를 한 채채가 나타나 “여긴 내 동굴이야”하며 당차게 외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향안 작가의 전작인 <팥쥐일기>는 배현주님의 그림이 미워할 수 없는 사랑스런 팥쥐 ‘아주’를 만들어주셨다면 <채채의 그림자 정원>은 호랑님의 그림이 이야기를 완성한다. <책과 노니는 집>이 김동성의 그림으로 완성된 것처럼 말이다. 천주교가 탄압받던 시절의 필사쟁이 장이의 이야기 <책과 노니는 집>과 조선왕조실록을 지켜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채채의 그림자 정원>은 역사동화라는 공통점 말고도 멋지다는 찬사가 부족할 정도로 빛나는 그림작가가 든든하게 버티는 작품들이다. 그림의 분위기가 닮은 듯 다른 느낌을 준다. <책과 노니는 집>의 김동성의 그림이 잘 가꿔진 정원처럼 차분하고 단정한 느낌이 든다면 <채채의 그림자 정원>의 호랑의 그림은 산과 들의 거침없는 수목들처럼 자유분방하고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은 아마도 물감이 튀고 번지는 화법이 주는 자유로움이 아닐까 싶다. 단정한 그림에서도 윤곽선을 뚫고 나오려고 꿈틀대는 자유가 느껴진다. 오래 전에 만났던 호랑 작가의 <호랑이가 준 보자기>에서도 인상적으로 느꼈는데 ‘번짐의 미학’을 자유로움으로 구현하는데 탁월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채채의 그림자 정원>은 <광모 짝 되기>, <팥쥐 일기>에 이은 이향안 작가의 세 번째 창작동화다. 사실 주절주절 길어지고 있는 내 글이 부끄러울 정도로 이향안 작가의 글은 늘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예쁜 우리말의 맛을 살려내는 솜씨도 매번 감동받는다. 작품에 등장하는 소녀들은 또 어찌나 사랑스러운지...때로는 당차고 때로는 눈물 많고 여리고, 아픈 상처가 있고, 그러나 아픔을 치유하는 근본적으로 착한 성품이 있다. <광모 짝 되기>의 이슬이, <팥쥐 일기>의 송화와 아주, <채채의 그림자 정원>의 채채가 바로 그런 소녀들이다. 글이 사람을 닮는다 했으니 작가에게도 그런 소녀들의 모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쩌면 내 안의 내 모습과 닮아있어 이 소녀들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다.
양반과 상놈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풍이의 바램이 아이들과 함께 자유롭게 노닐었으면 좋겠다. 역사적 사명감에 바쳐진 개인의 고귀한 희생이 지켜온 문화가 아이들 속을 헤집고 다니며 자부심과 긍지를 팍팍 심어주었으면 좋겠다. ‘책책’책 많이 읽는 사람이 되라고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 ‘채채’. 채채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아이들 사이에서 두루두루 읽혔으면 좋겠다. 더불어 우리 아이들이 ‘채채(책책)’과 친한 벗이 되어준다면 금상첨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