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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 시즈카 ㅣ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다시마 세이조 글.그림, 고향옥 옮김 / 보림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꾸준히 읽어왔고 신문의 북섹션도 꼼꼼히 챙겨 읽었으니 관심분야가 아니고 읽지도 않은 책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분류나 세간의 평가 정도는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였지만 그림책 분야를 처음 접했을 때 정말 암담할 뿐이었다. 완전 백지상태의 미지의 세계에서 어느 길로 가야할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으니 우선 많은 사람들이 낸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베스트셀러라고 분류된 그림책들을 읽어봤지만 읽어본 수십 권의 그림책으로는 수작과 졸작의 기준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더욱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 뿐이었다.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던 초기에 여러 번의 실수 끝에 나름대로 잘 먹혔던 해결책은 괜찮은 그림책을 만났을 때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릴레이로 읽는 방법이었다. 그림책이 아닌 다른 분야의 책읽기에서의 버릇이었던 ‘전작주의’가 그림책 고르기에서도 효과를 톡톡히 발휘한 셈이다. 물론 그림책 고르기가 훨씬 수월해진 요즘도 ‘전작주의’는 스타일로 굳어져있고 특히 그림책 고르기에서 실패할 확률이 적은 좋은 방법으로 추천할 만하다.
<염소 시즈카>는 <채소밭 잔치>를 시작으로 인연을 맺은 다시마 세이조의 그림책이다. 그의 한글번역판 작품들을 거의 다 읽었지만 그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채소밭 잔치>다. 할아버지의 채소밭 채소들 이야기가 매력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아이와 함께 깔깔거리며 유쾌하게 읽은 그림책이었다. 처음처럼은 아니지만 지금도 이 그림책 꺼내서 읽으면 이십팔점무당벌레가 방울토마토를 저글링하는 장면과 참마와 우엉이 깊은 땅속에서 나오려고 낑낑대는 장면과 늙은 호박이 할아버지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면에서는 늘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오곤 한다. <채소밭 잔치> 이후로 다시마 세이조의 그림책들은 신간이 나올 때마다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 <염소 시즈카>는 2010년에 출간된 그림책이다. 앞표지만을 2차원적으로 보여주는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글에서 이 책의 두께를 그냥 흘려보냈다면 책을 받아보고 놀랄 것이다. 무려 208쪽이나 되는 엄청난 두께의 그림책이다. 1981년부터 나온 시즈카 이야기 일곱 권을 합본해서 한글번역판이 나온 것이다. 한권씩 야금야금 번역판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그림책으로서 무지막지한 두께를 감수하며 읽는 것도 즐거움이라 생각된다. 다시마 세이조는 현재 여덟 번째 이야기를 집필 중이라고 한다.
<염소 시즈카>는 아기 염소 시즈카가 나호코네 집으로 온 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강 건너 할아버지네 집으로 뛰어 들어가 상위에다 오도당동당 까만 초콜릿 같은 똥을 푸짐하게 싸놓는 말썽을 부리던 아기 염소 시절부터 발정기에 접어든 시즈카의 이상한 행동과 감격스런 출산 장면과 위대한 모성애를 보여준다. 새끼인 뽀로가 스스로 풀을 뜯어먹을 수 있게 되자 의연하게 떠나보내는 엄마의 모습도 보여준다. 새끼인 뽀로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크게 한번 울며 훌훌 털어버리고는 예전의 시즈카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할아버지의 채소밭과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동백나무 어린잎과 표고버섯들을 먹어치우고 풍선처럼 부풀어 주저앉은 뒤태를 보여주며 다시 사고뭉치 시즈카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젖을 먹을 새끼가 없어 퉁퉁 불은 시즈카의 젖을 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의 모습도 재미있는 장면이다.

다시마 세이조의 그림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그려놓은 그림 같다. 색채도 원색을 즐겨 사용하고 역동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느낌이 든다. 역동적인 그림은 시즈카의 성장과정을 담아내며 한가롭고 조용할 것 같은 변두리 마을에 활기찬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야기 속의 강 건너 사는 할아버지는 <채소밭 잔치>의 할아버지가 아닐까, 시즈카가 망쳐놓은 채소밭도 바로 그 채소밭이 아닐까 유추해 본다. 어쩌면 작가가 살고 있는 마을에 그 모델이 되는 할아버지가 실재하고 있을 거라는 추측에 까지 생각이 미친다. 그림책 한권이 하나의 도록(圖錄)같다. 다시마 세이조의 팬이라면 소중하게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그림책이다.
한가롭고 평화로운 목가적인 삶은 누구나가 꿈꾸는 모습이 아닐까. 밀려나지 않으려고 바둥거리며 먹고 살기 위해 복작거리며 도시에 기생해 살아가면서도 마음은 몸과 별개로 여유롭고 편안하게 자연과 호흡하며 살기를 소망하는 것 말이다. 시즈카와 뛰어노는 나호코의 모습은 토끼나 양을 키우고 싶다고 틈틈이 얘기하는 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한다. 아이들은 이렇게 뛰어놀아야 하는 것을...시멘트 벽 안에서 밖으로 낸 창의 크기 만한 딱 고만큼의 꿈만 꾸게 하는 건 아닌지... 염소 시즈카는 도쿄 변두리에서 밭을 가꾸고 염소와 닭을 키우며 살고 있는 작가 다시마 세이조와 함께 지냈던 염소였다. 작가 후기글을 보니 시즈카는 생을 다하고 죽어서 복숭아 나무 아래 묻혔다고 한다. 하지만 시즈카가 나호코네 집에 와서 지낸 추억들은 <염소 시즈카>를 통해서 이 그림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 마음속을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내 마음 속에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