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감자 밭 비룡소의 그림동화 91
애니타 로벨 글.그림,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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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그득한 도서관 서가를 돌아다니다 익숙한 제목의 책들 사이에 숨어있거나 내가 미처 몰랐던 괜찮은 책을 발견하면 혼자 뿌듯해하곤 한다. 그림책을 몇 년 읽었더니 도서관 책들은 읽었거나 혹은 읽지 않았더라도 알고 있는 책들이 많아서 요즘은 이런 횡재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읽는 보편적 감성을 만족시키는 책들보다 요란하게 소문나지는 않았지만 잔잔하게 오래 남는 느낌 좋은 그림책들을 찾아내는 작업은 보물찾기처럼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어머니의 감자밭>은 한가로운 평일 오전 도서관에서 그렇게 발견한 책이다. 펜으로 그린 그림과 빨강과 파랑이 주조를 이루는 단순한 색깔로 미루어 오래된 그림책 냄새를 풍기는데다 아니타 로벨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개구리와 두꺼비’시리즈의 아놀드 로벨이 스쳐지나갔는데 반갑게도 작가 소개글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다. 아니타 로벨은 칼데콧상과 뉴베리상을 수상한 아놀드 로벨의 아내이자 함께 그림책 작업을 한 파트너이다. 남편인 아놀드 로벨과 함께 작업한 작품도 상당수 있고 유명한 어린이책 작가인 남편의 파트너였지만 아니타 로벨 또한 칼데콧이 인정한 실력 있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아니타 로벨이 아놀드 로벨의 아내라는 사실보다 더 시선을 끄는 이력이 있다. 폴란드 태생인 아니타 로벨. 유태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니타 로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군에게 잡혔다가 극적으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런 그녀의 배경 때문인지 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그녀가 들려주는 전쟁이야기가 어떤 빛깔일지 궁금했다. <어머니의 감자밭>은 휩쓸고 지난 자리엔 황폐함만이 남는 전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빨강과 파랑으로 대조를 이루는 두 나라 사이에 위치해 있지만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감자밭을 일구고 사는 아주머니와 두 아들의 이야기다.

 

집 주변에 높다란 담장을 세워 전쟁이 두 아들과 감자밭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노력을 했지만 담장 밖을 내다볼 수 있을 만큼 자란 두 아들을 언제까지 엄마의 울타리 안에 가둬둘 수 있겠는가. 더러워 너덜거리는 군복과 구부러지고 부러진 칼과 녹슬어 버린 훈장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습으로 가려버리는 무모한 젊음의 끓는 피를 빗장을 걸어 잠근들 막을 수가 있으랴. 엄마의 울타리를 벗어난 두 아들은 각각 동쪽 나라와 서쪽나라의 장군과 사령관이 되었다. 싸움이 격렬해질수록 두 나라는 폐허가 되어가고 군인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게 된다. 두 나라가 전쟁으로 쑥대밭이 됐지만 두 아들은 음식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어머니의 집으로 몰려간 두 나라 군인들에 의해 높다란 담장이 무너지고 집이 무너지고 어머니가 쓰러져있다. 아마도 그제서야 혈기로 가려졌던 눈에 피로 얼룩진 더러운 군복과 녹슬어버린 영광의 훈장이 제대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들의 장군과 사령관이 울부짖는 소리에 병사들도 고향집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기적처럼 어머니가 일어나고 동쪽나라 서쪽나라 가릴 것 없이 어울려 어머니의 감자를 나눠먹으며 기쁨의 노래를 부른다. 두 아들은 감자밭을 일구고 부서진 집을 새로 지었지만 높다란 담장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무모한 전쟁은 끝나고 집 나간 아들들은 어머니들의 품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인류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찰나의 평화적 순간이란 게 있었을까? 아마도 쉼 없는 전쟁의 역사가 인류의 역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인류는 종교문제, 영토문제를 비롯한 여러 이유를 들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대의나 명분은 실종되거나 변색되고 궁극에는 어느 쪽도 전리품으로 황폐하고 메마른 폐허더미의 땅덩어리만을 차지하게 될 게 빤한 소모적인 전쟁을 언제까지 계속해야만 할까. 어머니의 감자밭에서 동쪽과 서쪽이 빨강과 파랑이 뒤섞여 얼싸안은 모습에서 평화를 모색해 보자고 한다면 너무나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시대착오적인 꿈이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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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 아저씨 민들레 그림책 5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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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의 글에 어울리는 그림 옷을 입혀주신 정승각님과 함께 작업한 그림책들을 좋아하는데 『강아지똥』『오소리네 집 꽃밭』『황소 아저씨』가 그것이다. 특히『황소 아저씨』는 겨울철에 읽으면 추위마저 녹일 정도로 마음 한켠이 훈훈해지는 따스한 이야기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세 작품 중 아이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은 『황소 아저씨』이다.^^


황소 아저씨의 포근하고 넉넉한 마음이 겨울 추위를 녹인다. 생쥐 남매들은 추운 겨울날 엄마를 잃었다. 날씨는 춥고 양식은 귀하고 먹이를 구하는 방법마저 서툴 게 뻔하다. 제일 큰 언니 생쥐는 아직 볼볼 기어 다니지도 못하는 동생들을 위해 덩치가 산만한 황소아저씨 구유의 밥찌꺼기를 찾아 황소 아저씨의 등을 타넘는 모험을 감행한다. 황소 아저씨의 등을 타넘다 들켜 두려움에 떨며 사정하는 생쥐에게 황소 아저씨는 몇 번이라도 괜찮으니 배부를 때까지 가져가라고 넉넉한 인심을 베푼다. 등을 타넘지 않고 궁둥이 밑으로 돌아가겠다는 생쥐에게 동생들 기다릴 테니 등 타넘고 빨리 가라는 말까지 보태는 황소 아저씨는 외양간의 산타클로스다. 인심 넉넉하고 사람 좋은 얼굴의 미소란 바로 이런 걸까? 턱을 괴듯 앞발 하나 구유에 걸치고 구유 속 음식 찌꺼기에서 콩 한 조각 챙겨든 생쥐를 바라보는 미소에 흐뭇함과 푸근함이 넘쳐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미소 짓게 한다. 이 그림은 『황소 아저씨』의 앞표지 그림이기도 하다.


아기 생쥐들이 그동안 굶어죽지 않게 음식을 나눠준 고마운 황소 아저씨를 처음 만나러 가면서 꽃단장 하는 모습은 귀엽고 앙증맞다. 추녀 밑 고드름을 녹여 눈곱 닦고 콧구멍 씻고 수염 씻는 모습과 막내둥이에게 왼쪽 볼에 코딱지 묻었다고 지적하는 언니 말에 바로 얼굴을 씻는 아기 생쥐들의 모습에 인정을 베풀어준 고마운 분에 대한 감사가 담겨있는 천진난만한 예의와 첫 대면의 설렘이 함께 한다. 아기 생쥐들이 구유에 들어가 찌꺼기를 실컷 먹는데 구유는 황소 아저씨의 밥그릇이니까 똥을 누거나 오줌을 누거나 코딱지를 묻혀서는 안 된다고 하는 장면과 함께 아이가 가장 유쾌하게 읽는 대목이다.


『황소 아저씨』의 정승각님의 그림은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투박하고 거칠고 입체감을 주는 독특한 느낌을 준다. 손바닥으로 지면을 쓸어보면 입체감이 느껴질 것 같은 독특한 느낌은 각종 동물들과 물건들을 돋을새김 부조를 뜨고 모시를 풀칠을 해서 덮은 위에 그린 그림에서 나오는 것이라 한다. 푸르스름한 색과 은가루 같은 흰 색이 주조를 이룬 그림이 황소 아저씨와 아기 생쥐들이 외양간에서 함께 가족처럼 살게 되는 후반부에 가서는 따스하고 밝은 황금빛이 푸른빛을 조금씩 몰아낸다. 인정 많은 황소 아저씨와 생쥐들이 가족처럼 더불어 살아가며 따뜻하게 겨울을 나게 될 외양간은 어느 곳보다 따스하고 밝은 세상이다. 그림이 들려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다.   


가난한 사람들의 겨울나기는 더욱 힘들다. 기초생활마저 힘든 가정에 겨울 추위는 이중고를 던져 준다. 그래서인지 날씨가 추워지면 가슴 저린 이야기들을 자주 듣곤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근근이 겨울을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 쓸쓸하게 생활할 것이다. 우리 동네 노인정의 무료급식 줄은 요 며칠 매서운 날씨에도 여전히 길다. 엄마를 잃고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는 언니 생쥐의 두려움을 다독거려주는 황소 아저씨의 푸근한 인심처럼 따스하고 훈훈한 소식들이 많이 들려왔으면 한다. 책 속 이야기에서 멈추지 말고 이 책을 읽은 아이가 황소 아저씨가 될 수 있는 멋진 기회를 찾아 나서서 주위에 작은 따스함이라도 나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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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 민들레 그림책 1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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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의 작품들 속에는 선생님 자신이 녹아있다. 작품은 작가의 분신이라지만 이렇듯 완벽하고 진정성이 팍팍 느껴지는 분신이 존재하기는 힘들다.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들을  보면 소외되고 힘없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이 늘 슬프도록 따스했던 권정생 선생님이 보인다. 특히 『강아지똥』은 온 몸을 녹여 아름다운 민들레를 피워낸 강아지똥처럼 살다 가신 선생님의 인생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아동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권정생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수십만 부가 팔린 『몽실 언니』『강아지똥』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허름한 5평 남짓한 흙집에 살며 고무신도 꿰매신고 한 달에 5만원으로 생활하며 교회의 종지기로 살았다는 이야기가 믿기기나 하겠는가. 그렇게 세상을 살다가 마지막 떠나시는 길에 남긴 말씀이 자신의 책으로 생기는 인세는 자신의 책을 사서 읽는 아이들에게 돌려주는 게 마땅하다 하셨다고 하니 이보다 더 완벽한 무소유가 어디 있으며 아동문학가로 사셨던 삶의 이보다 더 완벽한 마무리가 어디 있을까.


골목길 담 밑 구석에 자리한 강아지똥은 부리로 콕콕 쪼아대며 더럽다고 쏘아붙이는 참새나 길에 떨어진 흙덩이의 놀림에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소달구지에서 떨어진 흙덩이는 강아지똥을 달래면서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준다. 흙덩이는 지난여름 가뭄이 심해서 흙덩이가 키우던 아기 고추를 살려내지 못하고 죽게 해버린 사연을 이야기하며 괴로워한다. 흙덩이마저 소달구지가 실어가 버리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상심한 강아지똥은 그렇게 골목길 구석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하게 된다. 슬그머니 싹이 돋아나고 있는 민들레가 하늘의 별만큼 고운 꽃을 피울 거라는 말에 자신의 한심한 처지가 떠올라 한숨짓던 강아지똥에게 민들레는 예쁜 꽃을 피우기 위한 도움을 요청한다. 자신이 쓰일 곳이 있다는 반가운 마음에 민들레 싹을 힘껏 껴안은 강아지똥은 사흘 동안 내린 비에 녹아 땅속으로 스며든다. 어느 화창한 봄 강아지똥이 있던 자리엔 아름다운 민들레가 피어올랐다. 하찮고 쓸모없는 존재인 흙덩이 한 줌이나 강아지똥 한 무더기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는 마음이 써내려간 고운 이야기다. 


처음 이 책을 아이에게 권할 때는 여느 아이들처럼 똥이나 방귀 같은 요소에 웃음보가 터지는 아이였을 때였다. 돌담 밑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똥을 한 무더기 누고 있는 강아지 흰둥이의 뒤태를 담은 표지그림부터 까르르 웃곤 했었다. ‘똥 똥’ 단어에는 어김없이 뭐가 그리 좋다고 깔깔거렸던 것이 서너 살 무렵이었다. 흰둥이는 변함없이 똥을 누고 있는 강아지지만 『강아지똥』을 읽는 아이는 해마다 커간다. 일곱 살 아이는 조금씩 강아지똥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출판사에서 『강아지똥』의 초판본 찾기 이벤트도 벌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강아지똥』처음 세상에 나온 게 1996년이다. 얼마 안 있으면 이 책을 읽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아이에게 이 책을 읽어 주며 감정을 공유할 수 있을 만큼의 세월이 쌓였다는 얘기다. 좋은 책은 시대를 가리지 않으니 그 아이들도 『강아지똥』과 함께 깔깔 웃고 가슴 아파하고 감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50년을 훌쩍 뛰어넘어 감동을 전달하는 외국의 그림책들을 보면서 부러웠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마도 『강아지똥』이 그 출발점이 되어줄 것 같다.    


권정생 선생님의 글은 톡 쏘거나 자극적인 향신료가 없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무미건조하고 밋밋하다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극적인 맛은 순간의 미각을 확 돋워주기는 할 테지만 금방 질려버려서 오래도록 즐길 수는 없다. 물려버린 자극적인 음식에서 입을 씻고 마음을 씻고 싶을 때 찾게 되는 책이 바로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들이다. 민들레 꽃씨 날리는 봄에는 『강아지똥』을, 뙤약볕 아래의 채송화 봉숭아 접시꽃을 볼 때면 『오소리네 집 꽃밭』의 오소리 아줌마를 생각한다. 겨울이면 『황소 아저씨』의 마음씨 좋은 황소 아저씨와 새앙쥐 식구들에게 마음이 쓰이고, 눈이 녹기 시작하고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이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하면 『아기너구리네 봄맞이』의 호기심 많은 아기너구리들을 생각한다. 


읽고 난 후 쉽게 다른 책으로 마음을 넘길 수 없는 감동적인 그림책을 만나면 나는 늘 내 아이에게 감사한다. 독신으로 늙어갔다거나 아이가 없었다면 아동문학은 나와 상관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내게 아이가 있어 그림책을 읽기 시작했으며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처럼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음을 항상 축복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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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두레아이들 그림책 1
프레데릭 백 그림, 장 지오노 글, 햇살과나무꾼 옮김 / 두레아이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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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프로방스 산지가 황폐한 황무지에서 조금씩 숲으로 변모해가는 과정을 수십 년에 걸친 시간의 흐름을 타고 담담하게 들려주는 장 지오노의 글을 읽으며 감동이 점차 고조되면서 불가능을 넘어서 어느 누구도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을 가능케 한 위대한 영혼에 대한 존경심으로 마음 한 편이 뜨거워진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나 공명심조차도 관심 밖이었던 한 인간의 우직한 행보가 풍경을 바꾸고 풍경에 깃든 사람들의 삶을 바꿔 따스하고 윤택하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담은 책이다.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생명이 사라진 마을에 세찬 바람만이 주인행세를 하는 황폐한 그곳에서 한 양치기 노인이 매일 정성스레 고른 100개의 도토리를 황무지에 심고 있다. 3년째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무모해 보이는 행동은 젊은이의 호기심을 끌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젊은이는 5년 만에 다시 황량한 지방을 찾게 됐고 그곳에서 생명이 자라고 있는 숲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인은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나무를 심고 있었던 것이다. 1910년에 심은 참나무는 이제 노인의 키보다 컸으며 숲은 가장 넓은 곳이 11킬로미터나 뻗어 있었다. 숲이 일으킨 변화는 놀라웠다. 말라있던 도랑에 물이 흐르게 하고 공기를 상쾌하게 만들고 바람이 퍼뜨린 씨앗들은 땅을 기름지게 하고 사람들을 돌아오게 했다. 젊은이가 처음 양치기 노인인 엘제아르 부피에를 만나는 길에 거쳤던 폐허마을 베르공에 사랑들이 살기 시작했다.  


바람만이 황량했던 베르공 마을은 환경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도 풍성하게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젊은이가 노인을 처음 만났을 때 지났던 베르공 마을에는 고작 3명이 살고 있었다. 서로를 미워했고 난폭했으며 아무런 희망 없이 죽음만을 기다리는 삶이었다. 인근 마을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날씨와 힘겨운 삶이 이기심만 키우고 다툼만 늘어나고 범죄가 들끓고 있었다. 하지만 숲이 생기고 거친 황야의 바람 대신 부드러운 산들바람이 실어다 주는 희망의 힘은 놀라웠다. 새집이 지어지고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살기 시작했다. 마당에는 채소들과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마을은 활기가 넘쳤고 풍요롭고 행복한 기운이 넘쳤다. 이 모든 일이 오로지 한 사람의 힘이 만들어낸 기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신의 현신한 모습이 엘제아르 부피에가 아니었을까 하는 벅찬 찬사가 절로 나온다.


이 지방의 ‘천연 숲’에 대해서 정부대표단이 조사하러 왔다고 한다. 자신의 공적을 떠벌리고 다니지도 않았고 이름을 알린다거나 보상을 바래서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엘제아르 부피에의 존재를 알 턱이 없었을 거다. 단지 자연이 행하는 믿지 못할 놀라운 기적이라고 생각할 밖에... 엘제아르 부피에의 존재는 이 그림책에서 화자로 등장하는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의 단편소설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장 지오노는 젊은 시절 여행 중에 만났던 특별한 노인에 대해 큰 감명을 받아 초고를 썼고 20년 동안이나 원고를 다듬어 책을 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림책 <나무를 심은 사람>의 그림을 그린 프레데릭 백은 장 지오노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5년 동안 2만장의 그림을 그려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감독이다. 이 그림책에 삽입된 그림은 책의 내용에 맞게 다시 그린 것이라고 한다.


프레데릭 백이 만든 영화를 보고 감동받은 캐나다 사람들은 2억 5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엘제아르 부피에 라는 양치기 노인의 일생을 바친 고결한 실천이 젊은 작가를 감동시켜 문학작품으로 재탄생했고, 그 이야기는 영화감독을 움직여 영화를 만들게 했고, 영화에 감동받은 사람들을 움직여 엘제아르 부피에의 신념에 동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조용하지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엘제아르 부피에의 이야기는 감동 그 자체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엘제아르 부피에의 이야기는 장 지오노의 문학적 완성도가 높은 글을 통해서 더욱 특별한 향기를 입었다. 황무지의 황량함이나 희망 없는 삶에 대한 묘사는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문장들이다. 수십 년에 걸친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는 문장들 속엔 이렇게 향기로운 문장들이 곳곳에 포진해있다. 프레데릭 백은 황량함이 풍요로움으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그림만으로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삶에 대한 찬미, 환경을 지키기 위한 실천에 대한 메시지로 <나무를 심은 사람>을 정의 내린다면 그 또한 이 책을 바라보는 여러 각도의 시선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생각에 머무를 법한 무모한 일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는 과정은 나 자신을 성찰해 볼 시간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실패를 미리 두려워해 지레 포기부터 했던 어리석은 지난날을 반성한다. 그런 좌절과 포기들이 쌓여 현재에 이르고도 새로운 시도조차도 두려워하는 한심한 현재의 날들을 일으켜 세워본다. 척박한 땅에 심어진 엘제아르 부피에의 도토리 한 알처럼 십 년 후 내 키보다 훌쩍 자라있을 희망의 씨앗 하나가 내 마음에 와 콕 박힌다. 그림책 한권이 나 개인의 역사를 훑고 지나는 감동을 주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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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사람 비룡소의 그림동화 43
데이비드 맥키 글, 그림, 김중철 옮김 / 비룡소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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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 그린 단순화된 그림과 펜으로 표현할 수 있는 흑과 백이 전부인 그림인데 전하는 메시지가 강한 그림책이다. 복잡다단하고 첨예한 대립각으로 무장한 전쟁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이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는 전쟁에 대한 쉽고 빠른 이해를 도와주고 어른들은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무릎을 탁 내리치며 공감할 것이다. 평화를 소리 높여 부르짖지도 않고 전쟁의 참상을 과장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 흘려간다.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뒤엉켜 싸우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전쟁터의 모습이 오히려 코믹하기까지 하다. 데이비드 매키의 전쟁에 대한 풍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에서도 만나볼 수 있다.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여섯 사람>은 마치 여섯 사람의 시작과 끝을 들려주는 듯 하지만 전쟁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고 점점 요원해 보이는 평화적인 해결책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 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평화로이 일하면서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떠돌아다니던 여섯 사람이 마침내 정착할 기름진 땅을 찾았지만 자기네 땅을 빼앗길까봐 감시탑을 세워 망을 보게 된다. 초조한 불안감에 보초를 서줄 힘센 군인을 뽑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하지만 평화가 계속되자 군인들이 싸우는 방법을 잊을까봐 또 하는 일도 없이 돈을 주어야 하는 새로운 걱정이 생긴 여섯 사람은 평소 눈독을 들였던 가까운 농장에 군인들을 보내 농장을 빼앗으라고 명령한다. 힘의 맛을 제대로 본 여섯 사람은 그때부터 주변에 있는 모든 농장을 갖고 싶어지고 군인은 여섯 명에서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된다. 한편 여섯 사람의 침략을 피해 강 건너로 도망간 농부들 또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를 여섯 사람 군대에 대비해서 전쟁을 준비한다. 결국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해 있는 두 집단. 중립지역인 강위를 날아오르던 물오리를 향해 동시에 화살을 쏜 보초들이 서로에게 전쟁선포로 받아들이는 오해를 불러오고 큰 싸움을 하기 시작한다. 


양 진영 모두 살아남은 사람은 여섯 사람씩뿐이다. 서로 반대방향으로 길을 떠난다. 이야기의 시작처럼 평화로이 일하면서 살 수 있는 땅을 찾아서 말이다. 결국 숱한 상처들을 남기고 허무하게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니, 오히려 원점보다 못한 상황이다. 적대적 관계가 새로이 생겨났으니 갈등과 반목의 전쟁을 이어갈 명분이 생긴 것이다. 반대방향으로 떠나 새로이 정착한 땅에서는 더 높은 감시탑과 더 막강한 힘을 갖추려 할테고 적대적 관계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갈 것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서 현재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로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전쟁의 시작인 거창한 대의명분 뒤에는 작은 오해나 소소한 이유들에서 그 시작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물오리 한마리 혹은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었던 파리스의 사과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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