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젤과 슐리마젤 - 행운의 요정과 불행의 요정 비룡소 세계의 옛이야기 29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지음, 이미영 옮김, 마고 제마크 그림 / 비룡소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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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면서 어린이책의 노벨문학상이라 불리는 ‘뉴베리상’을 3년 연속 수상한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와 그림책의 가장 뛰어난 삽화가에게 주어지는 ‘칼데콧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마고 제마크가 만난 『마젤과 슐리마젤』은 신간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시선을 집중시키는 그림책이었다. 물론 무조건 번쩍거리는 뉴베리와 칼데콧 혹은 케이트 그리너웨이 메달을 맹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림책 시장이 큰 영미권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해마다 수상작들이 발표되는 시기에는 많은 관심들이 쏟아지고 수상작이 결정되면 서둘러 한국어판을 출간하고 수상작가의 다른 작품들까지 덩달아 주목받는 것을 보면 메달을 신뢰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해마다 1월이면 수상작들이 발표되는데 2012년 수상작들이 바로 며칠 전에 발표됐다. 미국도서관협회 사이트에 들어가면 따끈따끈한 수상작들을 확인할 수 있다. 올해의 칼데콧 위너는 우리 아이가 크게 흥미를 느끼지 않는 글자 없는 그림책("A Ball for Daisy" illustrated and written by Chris Raschka)인데다 유아책에 가까워 우리 아이와 시기적으로 맞지 않을 것 같고, 칼데콧 아너상(2,3,4등상이라고 생각하면..^^)을 받은 작품 중 두 작품 정도가 눈에 들어온다. "Grandpa Green"(illustrated and written by Lane Smith)과  "Blackout"(illustrated and written by John Rocco)이다. 아마존까지 휩쓸고 다니며 열정과 돈을 불사르는 정도는 아니니 한글번역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의 작가들에 대한 화려한 비주얼을 읊어대다 보니 이야기가 삼천포로 많이 빠졌다.^^ 『마젤과 슐리마젤』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져 오는 옛이야기다. 행운의 요정 마젤과 불행의 요정 슐리마젤이 가난한 한 청년을 사이에 두고 서로 힘겨루기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요정이 지나던 마을의 가장 가난한 사람에게 행운의 요정 마젤이 일 년에 걸쳐 행복을 가져다주고 일 년이 끝나는 순간 불행의 요정 슐리마젤에게 넘겨주겠다는 조건이다. 대신 불행의 요정은 그동안의 케케묵은 방법들로 그 사람을 망쳐버리지 않는다는 단서를 붙인다. 예를 들어 사고나 병으로 죽게 하거나 전쟁을 일으키는 방법들 말이다. 불행의 요정 슐리마젤은 행운의 요정 마젤이 일 년에 거쳐 이루어 낸 행복을 단 일 분만에 망쳐버릴 수 있다고 장담한다. 행운의 요정 마젤이 뒤에 서 있으니 가난한 농부 탬은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고 꿈도 꾸지 못할 행운이 따른다. 왕의 신임과 공주의 사랑까지 얻을 위치에 올랐으니 말이다.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오르면 그만큼 시기하고 질투하는 무리들도 뒤따르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행운을 거머쥔 당사자가 과거를 잊어버리고 잔뜩 오만해져서는 행운을 걷어차 버리는 꼴을 당하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 하지만 탬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도왔다. 자신을 시험하려 들고 곤경에 빠트리려는 무리들의 시험에도 묵묵히 임했다. 역시 행운은 아무에게나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우연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저 주어지는 것 같지만 성실하고 노력하고 정직한 사람에게 미리 예정되어 있던 것이 행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탬을 넘겨주기로 한 일 년의 시간이 끝나갈 무렵 왕의 병을 치료할 사자의 젖을 구하러 갔던 탬이 돌아왔다. 하지만 탬의 입에서는 사자의 젖이 아니라 개의 젖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그 순간이 마젤에게서 슐리마젤에게로 탬의 운명이 넘어간 순간이었으니 슐리마젤이 장담하던 대로 순식간에 망가져 버린 것이다. 한번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정정을 하기에도 너무나도 엄청난 말이었다. 지하 감옥에 갇히고 사형집행이 이뤄지려는 순간 다시한번 마젤이 탬을 향해 미소 지으며 위기를 벗어나게 되지만 행운과 불행이 순식간에 뒤바뀌는 혀끝에서 나오는 한마디 ‘말’의 소중함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의 법전이라 하는 ‘탈무드’에는 말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담은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한다. 출처가 어딘지 알든 모르든 탈무드의 교훈은 격언처럼 우리 사회에도 널리 퍼져있다. 어느 날 일곱 살 아이의 입에서도 불쑥 튀어나올 정도다. 집에서는 귀찮을 정도로 수다스러운 아이가 유치원에서는 필요할 말 이외에는 거의 입을 열지 않는 게 안타까워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엄마, 그거 알아요? 사람에게 입이 하나고 귀가 둘인 이유는 말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래요.” 탈무드를 자신의 변호용으로 갖다 붙이다니 놀라웠다. 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사람의 신체를 두고 만들어진 탈무드 속 이야기들 몇 가지 더 들려주고 탈무드에 대한 설명을 보태면서도 내내 신기했던 기억이 있다.               


선과 악처럼 극단적인 개념의 대결 구조는 늘 풍성한 얘기들을 만들어 낸다. 행운과 불행의 요정이 팔꿈치를 건드린 청년 탬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거친 선이 주는 경쾌함과 이야기 속 이야기도 놓치지 않는 섬세함으로 예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자아내는 마고 제마크의 그림에는 숨은 상징들이 가득하다. 대대로 전해오는 옛이야기고, 그 옛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한 이 그림책 또한 오랫동안 해를 묵힌 책이기도 하다. 다른 문학, 사상, 철학서적 같은 경우는 세월의 간격이 어쩔 수없이 느껴지건만 그림책은 5,60년을 훌쩍 뛰어넘어도 그 맛이 늘 신선하다. 그림책만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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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달 위를 걷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3
샤론 크리치 지음,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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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는 상처들이 있다. 째고 짜내고 봉합해놓은 상처는 흉터는 남겠지만 최소한 회복의 의지가 있다. 하지만 덮어두고 외면해 버린 상처는 가벼운 자극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법이다. 꽃으로 때려도 아픈 법이다. 몸에 난 상처는 상처의 경중에 따라 치료과정을 거치면 고통이 지나간 흉터가 훈장처럼 남는다. 하지만 마음에 깃든 상처는 상처 부위도 치유의 흔적도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비밀스런 흉터 자국을 남긴다. <두 개의 달 위를 걷다>는 살라망카라는 열세 살 소녀가 부정하고 거부하고 도피하는 단계를 거쳐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고 치유해가는 기나긴 여정을 담고 있다. 마음의 상처는 그 상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의 과정이 치유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바로보기가 어려운 법이다.


<두 개의 달 위를 걷다>는 액자식 구성의 병렬 구조를 갖고 있는 로드 무비풍의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미스터리와 서스펜스가 가미되어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재미 또한 있다. 가족애와 인간애가 넘치는 감동을 주고, 펑펑 눈물까지 쏟게 하는 카타르시스도 제공한다. 한마디로 소설의 모든 맛이 들어있는 종합 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다. 대개의 경우 여러 가지 맛을 찝쩍거린 소설이 한 가지 맛에도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소설에는 모든 맛이 골고루 잘 살아있다. 


어느 날 갑자기 작별 인사도 없이 떠나버린 엄마를 찾아 오하이오에서 아이다호 루이스턴까지의 장장 3000킬로미터의 대륙횡단 여정을 담고 있다. 루이스턴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엄마를 만나보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를 보러 가고 싶지만 두려워하고 있는 살라망카는 일주일 뒤 엄마의 생일에 맞춰 루이스턴에 도착할 예정으로 자동차로 여행길에 오른다. 오십여 년의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열세 살 손녀딸의 긴 여행에는 살라망카의 친구 피비 윈터버텀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함께 한다. 권위적인 남편과 이기적인 두 딸의 엄마이면서 가정에 헌신하며 틀에 박힌 삶을 살던 피비의 엄마가 어느 날 편지를 남겨놓고 가출을 한다. 엄마가 집을 나가기 얼마 전부터 피비의 집 앞에는 암호 같은 쪽지들이 이어졌고 정신병자 같은 젊은 남자가 피비의 엄마를 찾아오는 일이 있곤 했었다. 두 소녀는 탐정 놀이하듯 쪽지의 비밀을 추리해 가고 있었는데 피비의 엄마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의 모카신을 신고 두 개의 달 위를 걸어볼 때까지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지 마세요.’라는 첫 번째 쪽지에서 제목을 따왔다. 모카신은 인디언들이 신는 신발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남의 입장과 처지에 있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함부로 평가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밖에도 ‘누구나 자신만의 일정표가 있다.’, ‘인생에서 뭐가 그리 중요한가?’, ‘슬픔의 새가 당신의 머리 위를 나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당신 머릿속에 둥지를 트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와 같은 알쏭달쏭한 쪽지들은 과연 누가 가져다 놓을 것일까? 남편의 시체를 뒷마당에 파묻었다는 소문에 휩싸인 마거린 아주머니는 살라망카의 아빠와 어떻게 알게 됐을까? 피비가 정신병자라고 부르는 젊은이의 정체는 뭘까? 피비의 엄마는 왜 갑자기 가출을 했을까? 이런 의문들과 함께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이야기에 끌려가다 보면 하나씩 그 정체가 드러난다.  


피비의 맞은편 집에는 ‘시체’라는 뜻의 ‘커데이버’라는 성을 가진 마거릿 아주머니와 앞을 못 보는 페트리지 할머니가 살고 있다. 마거릿 아주머니는 살라망카의 아빠와 친분이 있는 사이지만 살라망카는 이 아주머니가 남편의 시체를 뒷마당 나무 밑에 묻었다고 생각하는 피비의 말을 더욱 신뢰한다. 엄마의 가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피비는 엄마가 집 주변을 서성거리던 정신병자에게 납치됐거나 마거릿 아주머니에게 살해됐을 거라는 추측을 하며 경찰서까지 찾아가게 된다. 늘 완벽한 식사가 차려져 있고 옷은 깔끔하게 다림질 되어 있었던 집은 엉망이 되고, 그제야 피비네 가족들은 엄마란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리고 또 한 가족, 늘 체계적이고 깔끔한 피비네와 대조되는 메리 루네 집도 등장한다. 아이들 다섯과 늘 한두 명쯤 얹혀사는 친척들이 뒤엉킨 메리 루네 집은 깔끔 떨고 점잔 빼고 경직된 피비에게는 끔찍한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책을 읽고 낮잠을 즐기는 메리 루의 부모님을 보면서 서로 뒤엉켜 마음껏 살을 부비고 뛰어놀며 거친 숨을 함께 호흡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살라망카는 아빠와 엄마와 셋이서 바로 그렇게 한덩어리로 뒹굴던 행복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나무와 호수에 둘러싸인 켄터키주 바이뱅크스란 시골마을의 농장에서 살던 살라망카에게는 서로의 분신과 같았던 사랑이 넘치는 엄마와 가족들의 기운을 북돋워줄 소소한 기쁨들을 만들어내는 좋은 사람 아빠와 더없이 행복하게 살았었다. 하지만 살라망카의 동생을 출산하는 과정에서 사산의 아픔을 겪은 엄마는 마음의 방황을 겪는다. 산달이 다가온 어느 날 나무에서 떨어진 자신을 업고 집까지 뛰어간 탓에 엄마가 그런 아픔을 겪는 거라고 자책하던 살라망카는 작별인사도 없이 여행 가방을 챙겨 홀연히 사라진 엄마와의 이별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부정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던 살라망카는 용기를 얻고 마음을 굳게 다지는 법을 배우기 위해 이사를 간다는 아빠를 따라 어쩔 수 없이 집을 뒤로하고 유클리드로 이사를 한다. 엄마가 사라진 지 일 년쯤 후 할아버지 할머니가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에 지도를 보며 길잡이 노릇으로 따라가기로 결정한 후부터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 내내 온 세상은 살라망카에 귀에 대고 ‘서둘러 빨리 빨리’를 속삭인다. 하지만 여행길에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들려준 피비네 가족의 얘기를 통해서 자신의 슬픔을 바로 보게 된 살라망카는 엄마와의 만남이 다가올수록 ‘천천히 천천히’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 길 끝에서 만나게 될, 그래서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될 슬픔의 실체를 알았기 때문이다.       


살라망카의 이야기는 내게도 있는 비슷한 상처를 톡톡 건드린다. 후반부까지 목울대가 아프게 꾹꾹 눌러 참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청소년 도서지만 450쪽 가까이 되는 적지 않은 분량의 글을 단숨에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리뷰에 담지 못한 소소한 재미들을 그럴 듯하게 담아낸 작가의 역량에 있다. 오십여 년을 함께 해 동지 같은 부부로 살아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과 살라망카와 벤의 블랙베리 맛 첫사랑도 마음을 조몰락거리는 이야기들이다.      

  

시사회에 참석한 영화 관계자 평론가 비평가들과 먼저 본 관객들이 무언의 공범자처럼 보안을 유지했던 영화 「크라잉 게임」의 충격적 여장남자 딜의 비밀처럼 「식스 센스」가 상영되던 영화관 화장실의 ‘브루스 윌리스는 유령이다.’ 낙서처럼 스포일러를 터뜨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눈치 빠른 분의 시선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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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 열린어린이 그림책 21
기 빌루 지음, 이상희 옮김 / 열린어린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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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마주하고 펄쩍 뛰어오른 개구리와 수면 위로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환한 보름달과 잔잔히 일렁이는 파도...『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는 언뜻 봐선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를 표지 그림에 먼저 마음을 빼앗겨 읽게 된 그림책이다. 연못이나 습지에 있어야 할 개구리가 바다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으니 ‘정저지와(井底之蛙)’와 자연스레 연결되면서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결정적인 그림이 아니던가. 하지만 단지 그것이 전부라면 이 그림책을 붙잡고 지금부터 늘어놓을 수다는 하릴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불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표지만으로 유추한 내용대로 흘러가다 딱 멈췄더라면 일러스트만 독특한 책으로 딱 그만큼의 매력으로 끝났을 텐데 작가는 마지막 경쾌한 반전으로 매력을 무한발산 한다.


뒷다리로 스물여덟 번 발길질을 하면 연못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헤엄쳐 갈 수 있는 작은 연못에 사는 개구리 앨리스는 짐작대로 바다를 동경하는 용감한 개구리다. 연못가 부들 숲에서 놀다가 포르르 날아가 사라져 버리는 잠자리들이나 연못 위 하늘을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봄이 오면 사라져 버리는 이유가 궁금했던 앨리스는 갈매기에게 연못 밖 세상에 대해 묻는다. 특히 몇 번이나 발길질을 해야 끝에 가닿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이 넓다는 바다는 앨리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며칠을 고민한 끝에 앨리스는 바다를 보러 가기로 결심한다. 강을 따라 바다에 이르는 길에 오른 앨리스에게 물이 움직이며 흐르는 강도 놀라움의 대상이다. 수련 잎을 뗏목 삼아 급류로 뛰어드는 것도 한껏 용기를 낸 행동이다. 강에서 만난 노인은 앨리스의 모험심은 칭찬했지만 바다가 개구리에게 호락호락 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위험에 빠졌을 때 도움이 될 거라면서 작은 유리병을 건네는 노인을 뒤로 하고 앨리스는 낯선 도시를 지나 바다로 향한다. 드디어 도착한 바다, 발길질 스물여덟 번이면 정복할 수 있었던 연못에 살던 앨리스에게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엄청나게 거대한 파도는 공포였을 것이다. 유리병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파도에 휩쓸리는 위험을 모면하고 연못이 그리워 울던 앨리스에게 물위에 비친 달이 도움의 손길을 보낸다. 어느새 연못으로 돌아온 앨리스는 기쁨에 겨워 밤새도록 달빛 속에서 헤엄친다.


역시 내 집이 최고야, 집 떠나면 고생이야 하면서 연못으로의 복귀에 안도했더라면 밋밋한 이야기였을 텐데 연못으로 돌아온 뒤 몇 달이 지난 여름날 앨리스가 연못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멋진 엔딩으로 폼나게 큰 웃음 날려주면서 말이다. 강에서 만난 낚시하는 노인과 유리병, 달그림자처럼 초현실적 존재들이 요정 할머니나 수호천사처럼 앨리스를 응원한다. 건조하고 생경한 느낌을 주는 그림은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작품을 보는 듯도 하다. <보름달의 전설(미하엘 엔데 글)>의 그림 작업을 한 비네테 슈뢰더를 떠올리게도 한다. 특히 도시의 악어가게를 찾아 떠나는 나일강 악어를 그린 <악어야, 악어야>의 비슷한 플롯과 비슷한 구도의 그림 컷도 겹쳐 떠오른다.

 <<연못을 떠난 앨리스의 첫번째 바다 >>

<<연못으로 다신 돌아오지 않은 앨리스의 바다>>


그림책을 읽다보면 그 안에 의도적이든 아니든 작가 자신의 모습이 담겨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공공연하게 드러내놓았거나 이야기 뒤편에 꼭꼭 숨겨뒀던 비밀을 발견하는 것 또한 내가 그림책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는 낯선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는 사람, 불가능에 도전하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공포 더불어 용기를 주는 그림책이다. 연잎을 돌돌 말아 두루마리처럼 만들어 옆구리에 꼭 끼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작가인 기 빌루의 이야기를 들춰보면 앨리스에 작가 자신이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광고회사에서 일하던 기 빌루는 바다가 보고 싶었던 개구리 앨리스처럼 큰 바다인 뉴욕의 광고계로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동료의 조언으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분야를 바꾸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서 드디어 뉴욕으로 향한다.(연잎 돌돌 말아 옆구리에 끼고 있는 앨리스의 모습이 보인다.^^) 막상 떠날 날이 다가오자 두려움과 공포가 압박해 왔다. 기 빌루는 빠른 비행기 대신 느린 배를 택해 일주일 만에 뉴욕에 도착했다. 자신의 미래를 결정지을 두려움과 공포의 순간을 늦추려는 그 마음이 십분 이해가 간다. 다행히 기 빌루의 포트폴리오는 아트 디렉터의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해서 뉴욕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순조롭게 안착했다는 얘기다. 어떤가, 앨리스는 곧 기 빌루 자신이 아니런가.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도전과 애써 짜낸 용기가 두려움과 좌절의 벽에 부딪칠 수도 있다. 하지만 좌절의 경험들이 쌓여 새로운 도전의 에너지가 되는 법이다. 실패는 성공을 위한 과정일 뿐이라는 말은 두려움과 좌절을 이겨내고 도전해서 성공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여유다. 학교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아이가 언젠가 앨리스처럼 멋진 파도타기에 성공하게 될 날을 기대하면서 앨리스의 연잎 보드 위에 내 아이를 살포시 올려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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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는 법 그림책은 내 친구 22
콜린 톰슨 글.그림, 이지원 옮김 / 논장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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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原註: 원래의 글에서 단 주석이나 주해)와 역주(譯註: 번역자가 단 주석)가 난무하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다보면 단 몇 초간의 방심도 책과 멀찍이 떨어뜨려놓는 글의 오만함에 입이 딱 벌어지는 감탄과 더불어 나 자신을 먼지만큼 쪼그라들게 만드는 좌절을 함께 맛보곤 한다. 보르헤스를 읽음에 있어 역주의 도움이 절대적인데 간혹 역자마저도 ‘그 뜻이 애매모호하다’라든지 ‘...로 추측할 뿐 확실치 않다.’라는 의견을 피력할 때는 그래, 전문가들에게도 쉽지 않단 말이지..하면서 슬며시 미소가 새어나오기도 한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인한 정신적 피로감을 회복하려면 몇 달 혹은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보르헤스 얘기를 그림책 리뷰의 서두로 끄집어 낸 이유가 있다. 영생불사라는 심오한 철학적 주제를 환상적인 일러스트로 구현해낸 콜린 톰슨의 『영원히 사는 법』을 읽는 순간 바로 떠오른 것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단편에서 우주를 무한수의 육각형 진열실들로 구성된 도서관이라고 정의했다. 육각형의 각각의 면들은 똑같은 크기와 형태를 가진 다른 진열실들로 연결된 끝을 측정할 수 없는 영원의 도서관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사서들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사는 법』은 지금까지 출판된 모든 책이 꽂혀 있는 도서관의 문이 닫히면 도서관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 피터는 요리책 책장 ‘ㅁ’부분의 <모과류>라는 제목의 책속에 살고 있는 가족 중 한명이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는 도서관에서 개인적인 혹은 세계 보편적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어 우주의 존재 이유를 밝히려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어 있는데 『영원히 사는 법』의 피터는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사라진 책의 기록 카드를 발견하고 그 책을 찾아 밤마다 도서관 도시를 헤맨다. 「바벨의 도서관」에 등장하는, 미래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예언서를 찾아 방대한 육각형의 방들을 헤매는 사람들의 터무니없는 희망과 절망이 몇 년째 도서관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는 피터와도 함께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는 우연처럼 실마리를 찾게 된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서 한 사서가 어느 육각형 방에서 나머지 모든 책들의 암호임과 동시에 완전한 해석인 책을 훑어보고 신과 유사하게 되었고 그를 찾으러 헤매는 숭배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영원히 사는 법』에서 네 명의 선인을 만나 <영원히 사는 법-초보자를 위한 영생>이란 책을 건네받고 ‘영원한 아이’와 대면한 피터는 「바벨의 도서관」의 숭배자들에게는 꿈의 실현일 것이다.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책을 읽고 자기 정신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래서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영원의 아이는 영원한 삶을 피터에게 들려준다. 영원한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영원의 아이의 모습을 묘사한 글로 대신해 본다. ‘아이는 어리면서 늙었고, 열 살쯤이며 동시에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피부는 아이처럼 매끈했지만 피곤해하며 활기가 없었습니다. 눈은 어려 보였지만 지치고 멍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결국 가진 것은 끝없는 내일들뿐인 영생불사는 애써 구할 만한 매력적인 삶이 아님을 에둘러 말한다. 그렇게 원하던 <영원히 사는 법>이란 책을 손에 들고 있는 피터는 읽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어 버리는 그 책을 절대 읽지 말라는 영원한 아이의 조언을 수용했을까? 영원한 아이로 살아갈 것인가 현명한 아이로 남을 것인가.


이 책에는 공공연하게 드러나 있으면서도 아는 사람만이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즐거움이 숨어 있다. 지금까지 출판된 모든 책들이 꽂혀있는 이 도서관의 서가를 잘 둘러보면 큭큭 웃음이 터져 나온다. ‘전쟁과 편육’ ‘해저 2만 보리’ ‘채털리 부인의 사냥’ ‘폭풍의 언더웨어& 제인 데님’ ‘로미오와 줄자’ ‘베니스의 상추’ ‘와인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몇 권의 책제목만 소개해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저자의 친절함인지 역자의 친절함인지 책 뒷부분에 원래의 문학작품들과 영화제목들이 실려 있다. 그림책을 읽는 아이들은 절대 모를, 어른들만 아는 즐거움이라 할 수 있다. 훗날 많은 책들을 읽고 난 아이가 다시 꺼내보고 지금의 나처럼 키득키득 웃게 될 날을 고대한다.   


철학적인 심오한 주제를 다룬 책, 어른의 마음에 반향을 크게 불러오는 그림책을 읽으면 항상 아이의 느낌이 궁금해진다. 일곱 살 아이의 우주에서 이 책은 어떤 이미지일까? 조심스레 물어본다. “만약에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책을 얻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영원히 사는 법을 읽어볼래? 아니면 읽지 않을래?” “엄마는 참...책을 읽어보고도 몰라요? 영원히 사는 게 좋은 게 아니잖아요. 영원히 산다는 것은 시간이 얼어붙어 버린다는 거예요.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고 고통도 느껴보고 고통을 극복하고 행복도 맛보는 게 훨씬 낫잖아요.” 아이라고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책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은 우주 밖으로 던져버려야 한다. 그래, 내가 연못이라면 아이는 우주다.


보르헤스의 첫 밥벌이 수단은 도서관 사서였다고 한다. 지나친 독서로 인해 서른 살 이후부터 차차 시력을 잃기 시작해서 훗날 국립도서관장직에 임명됐을 때는 거의 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한다. 애서가들의 눈을 사로잡는 환상적인 도서관의 모습을 위트 넘치는 유머를 담아 화려한 색채로 그려낸 콜린 톰슨은 색맹이라고 한다. 도서관장의 시력은 맹인에 가깝고, 세계가 열광하는 환상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그림 작가는 색맹이라니...삶은 진정 아이러니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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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완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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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들어가는 말로 열어주고 나오는 말로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를 주곤 했다. 이윤기의 유작인 5권에는 이윤기의 나오는 말이 없다. 이윤기의 딸이 대신 전하는 ‘맺음말’이 필자의 부재에 대한 확인사살처럼 가슴에 쿵 떨어진다. 신화의 땅을 자유롭게 드나듦에 있어서 이윤기의 친절한 신화 안내서는 언제고 그 통로가 되어 줄 거라는 터무니없고 치기어린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다가 느닷없이 ‘맺음말’을 만나니 기막히고 황망할 따름이다. ‘독자 여러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6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 5권에서 더 이상은 나아갈 길이 없다. 1권을 시작하면서 신화라는 자전거에 올라탄 독자들에게 페달을 밟을 것을 권유하면서 뒤에서 짐받이를 잡고 따라갈 테니 안심하라던 필자의 도움이나 응원은 더 이상 없다. 독자 스스로 힘차게 페달을 밟아나가야 한다. 안내인을 잃고 잠시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 지 멈춰서겠지만 자전거 굴리는 법은 익혔으니 이제부터 나아가는 길은 훨씬 수월할 것임을 안다.


신께서 63세의 그의 심장을 멎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는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을 것이다. 신화의 서사적 구성에 맛깔스런 이야기로 엮을 줄 아는 이윤기에게 수천 년 동안 퇴적된 이야기 보고(寶庫)는 글감을 무궁무진하게 제공할 것이니 부지런을 떨면 될 일이었다. 갑작스런 신의 제동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서양문화의 초석을 이루는 그리스 중심의 헬레니즘과 이스라엘 중심의 헤브라이즘을 두루 다룰 계획이었으니 아직 헤브라이즘으로 건너지도 못한 이 상황이라면 궤도의 절반쯤에서 멈춰선 것인가. 그가 오래도록 구상하고 원대하게 계획했으나 풀어내지 못하고 그와 함께 떠난 이야기들이 아쉽다.

 

‘나오는 말’도 끝내지 못한 유작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아르고 원정대가 무엇이던가. 신들의 여왕 헤라가 뒷배를 봐주고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수호하는 아르고호에 그리스 시대의 걸출한 영웅들이 총집합해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영웅들 면면의 이야기도 다 풀어놓지 않은 듯하고, 무시무시한 메데이아의 이야기도 서둘러 끝난 느낌이 든다.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다. 5권은 10여 년 전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를 구상하면서 그리스와 터키 일대의 신화가 숨 쉬는 현장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던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터키의 ‘흐린 주점’에서 흑해를 내려다보면서 수천 년 전 그곳을 항해했던 아르고 원정대를 떠올리며 현장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화책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두 개의 바위 섬 사이를 통과하는 무엇이든 박치기로 박살을 내버리는 ‘쉼플레가데스’라는 바위섬과 사납고 정복되지 않았던 바다였던 흑해를 지나 ‘금양모피’를 찾아 떠나는 그리스 영웅 이아손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시련과 고난의 모험 끝에 ‘금양모피’를 손에 넣게 되는 이아손의 이야기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권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신화를 우리와 친숙하게 느끼게 해준 이 시리즈의 10년 여정은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에서 시작해서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으로 끝을 맺으니 참으로 운명적인 유작이다.  


이아손은 이올코스의 왕자였다. 아버지 이아손 왕이 연로한데다 왕위를 이을 이아손은 늦둥이 아들이라 고작 다섯 살이라는 상황을 이용한 숙부 펠리아스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장성한 뒤에 왕위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애초에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이었다.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영웅들의 스승이었던 현자 켄타우로스 케이론 밑에서 15년의 세월을 교육받고 자신의 왕위를 찾으러 온 이아손에게 순순히 왕의 자리를 내줄 펠리아스가 아니었다. 교활한 펠리아스는 머나먼 나라 콜키스에 있는 집안의 보물인 프릭소스의 ‘금양모피’를 찾아와서 스스로 왕임을 입증하라는 피할 수 없는 교묘한 제안을 한다. 이아손이 배 짓는 명장 아르고스를 찾아가 빠르고 튼튼한 배를 지어 달라 부탁한다. 아르고호를 타고 저승길에도 비교되는 이 머나먼 원정길에 동참한 대원들의 이름만 거론해도 너무나 화려하다. 우선 헤라클레스가 있고 신부인 에우뤼디케를 찾아 산 자의 몸으로 저승을 다녀온 것으로 유명한 트라키아 명가수 오르페우스,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형제, 여걸 아탈란타를 비롯한 장사, 역사, 예언자, 천리안, 타고난 키잡이 등이 총집합했다.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은 렘노스 섬의 여인들, 나그네를 꾀어 주먹질을 겨루자고 해서 때려죽이는 왕 아뮈코스, 제우스의 노여움을 샀던 예언자 피네우스, 뱃길을 허락하지 않는 두 개의 박치기 섬 쉼플레가데스는 아르고 원정대가 금양모피를 찾아 콜키스로 가는 여정에서 만난 모험들이다. 머나먼 땅 콜키스에 도착한 이아손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콜키스의 왕녀 메데이아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금양모피를 손에 얻게 된다.


메데이아는 영웅들 이야기의 주변인으로 여러 번 등장한다. 테세우스가 아버지인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를 찾아갔을 때 테세우스를 알아보고 독살하려던 계모가 바로 메데이아다. 이아손이 금양모피를 얻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대가로 이아손과 결혼하지만 이아손이 딴 여자에게 한눈판다는 것을 알고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둘을 죽여 버리는 비정한 엄마로도 유명하다. 아르고 원정대와 콜키스를 떠날 때 아버지의 추격을 늦추려고 자신의 막내 동생을 죽여 시체를 토막 내서 바다에 던진 이야기의 주인공도 메데이아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아비와 형제 조국을 배신한 공주의 운명이 순탄할 리가 없다는 것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그 예를 수두룩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메데이아에 견줄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후반부에 성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이 드는 메데이아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 시리즈가 계속 됐다면 이윤기가 담았을 영웅들과 그 곁가지 이야기들을 상상해 보니 아쉬움이 더욱 크다. 이아손(6권)과 헤라클레스(4권)처럼 한 몫을 차지했을 테세우스,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를 만날 수 있는 트로이 전쟁도 맛깔나게 들을 수 있었을까?...아쉽다.           


나의 신화 읽기는 서양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예술적 안목을 높이고 인문학적 교양을 쌓기 위함이었다. 서양의 문학과 예술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신화적 알레고리들을 해독하는데 신화의 절대적인 조언이 필요했다. 서양문화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개운치 않은 느낌 앞에는 신화가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라도 여기저기 건드려 보니 “그래 바로 이거였어.”하며 무릎을 치는 찰나의 개안(開眼)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갈 길이 너무 멀다. 신화를 서술하는 언어는 상징적 언어다. 신화가 담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들을 찾아 상상력의 실타래를 솔솔 풀어가며 미궁 속을 조심스레 걷고 있는 모양새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흑해를 건너 나의 쉼플레가데스를 지나 나의 금양모피를 수습하자던 이윤기의 금양모피는 무엇이었을까? 아득히 높은 하늘 올림포스 산만큼이나 접근이 어려웠던 신화의 세계를 인간의 세상 가까이로 내려놓아 신화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세상은 아니었을까? 도전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 고난과 역경은 영광을 더욱 값지고 빛나게 한다. 나의 흑해와 쉼플레가데스와 금양모피를 찾아 떠나라는 이윤기가 전하는 마지막 조언이다.


나는 내 연하의 독자들을 향하여, 특히 좌절을 자주 경험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활을 겨누듯이 겨냥하고 쓴다. 먼 길을 가자면 높은 산도 넘고 깊은 물도 건너야 한다. 먼 바다를 항해하자면 풍랑도 만나고 암초도 만난다. 이 장애물들이 바로 개인의 흑해, 개인의 쉼플레가데스다. 이것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못한다면, 난바다로 배를 띄우지 못하다면 우리 개개인에게 금양모피는 없다. 흑해와 쉼플레가데스는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쉼플레가데스 사이를 지나고 우리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 시작 없이, 모험 없이 손에 들어오는 ‘금양모피’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넘어야 하는 산은 험악할 수 있고, 우리가 건너야 하는 강은 물살이 거칠 수도 있다. 우리가 건너야 하는 바다도 늘 잔잔하지는 않다. 하지만 명심하자. 잔잔한 바다는 결코 튼튼한 뱃사람을 길러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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