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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완결 ㅣ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5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평점 :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들어가는 말로 열어주고 나오는 말로 새로운 도전에 대한 용기를 주곤 했다. 이윤기의 유작인 5권에는 이윤기의 나오는 말이 없다. 이윤기의 딸이 대신 전하는 ‘맺음말’이 필자의 부재에 대한 확인사살처럼 가슴에 쿵 떨어진다. 신화의 땅을 자유롭게 드나듦에 있어서 이윤기의 친절한 신화 안내서는 언제고 그 통로가 되어 줄 거라는 터무니없고 치기어린 믿음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다가 느닷없이 ‘맺음말’을 만나니 기막히고 황망할 따름이다. ‘독자 여러분,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6권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 5권에서 더 이상은 나아갈 길이 없다. 1권을 시작하면서 신화라는 자전거에 올라탄 독자들에게 페달을 밟을 것을 권유하면서 뒤에서 짐받이를 잡고 따라갈 테니 안심하라던 필자의 도움이나 응원은 더 이상 없다. 독자 스스로 힘차게 페달을 밟아나가야 한다. 안내인을 잃고 잠시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 지 멈춰서겠지만 자전거 굴리는 법은 익혔으니 이제부터 나아가는 길은 훨씬 수월할 것임을 안다.
신께서 63세의 그의 심장을 멎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는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을 것이다. 신화의 서사적 구성에 맛깔스런 이야기로 엮을 줄 아는 이윤기에게 수천 년 동안 퇴적된 이야기 보고(寶庫)는 글감을 무궁무진하게 제공할 것이니 부지런을 떨면 될 일이었다. 갑작스런 신의 제동이 없었더라면 말이다. 서양문화의 초석을 이루는 그리스 중심의 헬레니즘과 이스라엘 중심의 헤브라이즘을 두루 다룰 계획이었으니 아직 헤브라이즘으로 건너지도 못한 이 상황이라면 궤도의 절반쯤에서 멈춰선 것인가. 그가 오래도록 구상하고 원대하게 계획했으나 풀어내지 못하고 그와 함께 떠난 이야기들이 아쉽다.
‘나오는 말’도 끝내지 못한 유작은 듣고 싶은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 아르고 원정대가 무엇이던가. 신들의 여왕 헤라가 뒷배를 봐주고 전쟁의 여신 아테나가 수호하는 아르고호에 그리스 시대의 걸출한 영웅들이 총집합해서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가 아닌가. 영웅들 면면의 이야기도 다 풀어놓지 않은 듯하고, 무시무시한 메데이아의 이야기도 서둘러 끝난 느낌이 든다.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다. 5권은 10여 년 전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를 구상하면서 그리스와 터키 일대의 신화가 숨 쉬는 현장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던 시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터키의 ‘흐린 주점’에서 흑해를 내려다보면서 수천 년 전 그곳을 항해했던 아르고 원정대를 떠올리며 현장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신화책을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한다. 두 개의 바위 섬 사이를 통과하는 무엇이든 박치기로 박살을 내버리는 ‘쉼플레가데스’라는 바위섬과 사납고 정복되지 않았던 바다였던 흑해를 지나 ‘금양모피’를 찾아 떠나는 그리스 영웅 이아손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시련과 고난의 모험 끝에 ‘금양모피’를 손에 넣게 되는 이아손의 이야기는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권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신화를 우리와 친숙하게 느끼게 해준 이 시리즈의 10년 여정은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에서 시작해서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으로 끝을 맺으니 참으로 운명적인 유작이다.
이아손은 이올코스의 왕자였다. 아버지 이아손 왕이 연로한데다 왕위를 이을 이아손은 늦둥이 아들이라 고작 다섯 살이라는 상황을 이용한 숙부 펠리아스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장성한 뒤에 왕위를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애초에 지킬 생각이 없는 약속이었다.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그리스 영웅들의 스승이었던 현자 켄타우로스 케이론 밑에서 15년의 세월을 교육받고 자신의 왕위를 찾으러 온 이아손에게 순순히 왕의 자리를 내줄 펠리아스가 아니었다. 교활한 펠리아스는 머나먼 나라 콜키스에 있는 집안의 보물인 프릭소스의 ‘금양모피’를 찾아와서 스스로 왕임을 입증하라는 피할 수 없는 교묘한 제안을 한다. 이아손이 배 짓는 명장 아르고스를 찾아가 빠르고 튼튼한 배를 지어 달라 부탁한다. 아르고호를 타고 저승길에도 비교되는 이 머나먼 원정길에 동참한 대원들의 이름만 거론해도 너무나 화려하다. 우선 헤라클레스가 있고 신부인 에우뤼디케를 찾아 산 자의 몸으로 저승을 다녀온 것으로 유명한 트라키아 명가수 오르페우스,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형제, 여걸 아탈란타를 비롯한 장사, 역사, 예언자, 천리안, 타고난 키잡이 등이 총집합했다. 아프로디테의 저주를 받은 렘노스 섬의 여인들, 나그네를 꾀어 주먹질을 겨루자고 해서 때려죽이는 왕 아뮈코스, 제우스의 노여움을 샀던 예언자 피네우스, 뱃길을 허락하지 않는 두 개의 박치기 섬 쉼플레가데스는 아르고 원정대가 금양모피를 찾아 콜키스로 가는 여정에서 만난 모험들이다. 머나먼 땅 콜키스에 도착한 이아손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콜키스의 왕녀 메데이아의 절대적인 도움으로 금양모피를 손에 얻게 된다.
메데이아는 영웅들 이야기의 주변인으로 여러 번 등장한다. 테세우스가 아버지인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를 찾아갔을 때 테세우스를 알아보고 독살하려던 계모가 바로 메데이아다. 이아손이 금양모피를 얻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 대가로 이아손과 결혼하지만 이아손이 딴 여자에게 한눈판다는 것을 알고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둘을 죽여 버리는 비정한 엄마로도 유명하다. 아르고 원정대와 콜키스를 떠날 때 아버지의 추격을 늦추려고 자신의 막내 동생을 죽여 시체를 토막 내서 바다에 던진 이야기의 주인공도 메데이아이다. 사랑에 눈이 멀어 아비와 형제 조국을 배신한 공주의 운명이 순탄할 리가 없다는 것을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그 예를 수두룩하게 찾아볼 수 있지만 메데이아에 견줄 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후반부에 성급하게 마무리된 느낌이 드는 메데이아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이 시리즈가 계속 됐다면 이윤기가 담았을 영웅들과 그 곁가지 이야기들을 상상해 보니 아쉬움이 더욱 크다. 이아손(6권)과 헤라클레스(4권)처럼 한 몫을 차지했을 테세우스,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를 만날 수 있는 트로이 전쟁도 맛깔나게 들을 수 있었을까?...아쉽다.
나의 신화 읽기는 서양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돕고 예술적 안목을 높이고 인문학적 교양을 쌓기 위함이었다. 서양의 문학과 예술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신화적 알레고리들을 해독하는데 신화의 절대적인 조언이 필요했다. 서양문화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한 개운치 않은 느낌 앞에는 신화가 버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라도 여기저기 건드려 보니 “그래 바로 이거였어.”하며 무릎을 치는 찰나의 개안(開眼)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갈 길이 너무 멀다. 신화를 서술하는 언어는 상징적 언어다. 신화가 담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들을 찾아 상상력의 실타래를 솔솔 풀어가며 미궁 속을 조심스레 걷고 있는 모양새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의 흑해를 건너 나의 쉼플레가데스를 지나 나의 금양모피를 수습하자던 이윤기의 금양모피는 무엇이었을까? 아득히 높은 하늘 올림포스 산만큼이나 접근이 어려웠던 신화의 세계를 인간의 세상 가까이로 내려놓아 신화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세상은 아니었을까? 도전이 없이는 영광도 없다. 고난과 역경은 영광을 더욱 값지고 빛나게 한다. 나의 흑해와 쉼플레가데스와 금양모피를 찾아 떠나라는 이윤기가 전하는 마지막 조언이다.
나는 내 연하의 독자들을 향하여, 특히 좌절을 자주 경험하는 독자들을 위하여 활을 겨누듯이 겨냥하고 쓴다. 먼 길을 가자면 높은 산도 넘고 깊은 물도 건너야 한다. 먼 바다를 항해하자면 풍랑도 만나고 암초도 만난다. 이 장애물들이 바로 개인의 흑해, 개인의 쉼플레가데스다. 이것이 두려워 길을 떠나지 못한다면, 난바다로 배를 띄우지 못하다면 우리 개개인에게 금양모피는 없다. 흑해와 쉼플레가데스는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쉼플레가데스 사이를 지나고 우리의 흑해를 건너야 한다. 시작 없이, 모험 없이 손에 들어오는 ‘금양모피’가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넘어야 하는 산은 험악할 수 있고, 우리가 건너야 하는 강은 물살이 거칠 수도 있다. 우리가 건너야 하는 바다도 늘 잔잔하지는 않다. 하지만 명심하자. 잔잔한 바다는 결코 튼튼한 뱃사람을 길러내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