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e 1 - 만남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왼쪽 하단 혹은 오른쪽 하단에 적혀있는 쪽수가 털끝만큼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눈대중으로 아무 곳이나 펼쳐 읽으면 그대로 빠져드는데 쪽수가 무슨 대수겠는가. 앤이 머릴러의 자수정 브로치를 훔쳤다고 거짓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앤이 일레인 공주를 연기하다 배가 부서져 물에 빠져 죽을 뻔하고, 길버트의 잘생긴 머리 위로 석판이 내리꽂히기도 한다.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를 쓴 몽고메리도 놀랍지만, 이 모든 사건의 주인공이자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소녀인 ‘끝에 e자가 붙은’ 앤이 사고뭉치임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좋으니 신기한 일이다. 뭘 해도 사랑스러운 건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일까?


고아가 따뜻한 가정을 얻고 사랑을 받으며 비로소 행복한 아이로 거듭난다는 것은 몽고메리 특유의 레퍼토리인데, 이 책 역시 그에 해당한다. 비현실적인 설정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그것은 단지 허구일 뿐이라고 일축하기도 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는데, 몽고메리를 읽으면 읽을수록 비현실적인 걸 알면서도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꿈꾸고 심지어는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고 간절히 믿게 되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가 사랑으로 허기진 배를 가득 채우는 순간,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면서 온 몸이 따뜻해짐을 느끼는 것이다. 머릴러가 앤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나도 같이 그린게이블즈에 살게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점점 앤 셜리에게 동화되었고, 그 아이의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져 우리는 감정의 탯줄로 이어진 혈육관계인 것 마냥 함께, 어떤 일이든 같은 자리에서 느끼고 공유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앤과 마음의 벗이 된 것이다!


기쁠 때든 슬플 때든 이 책을 읽으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진실한 친구와 얘기할 때는 언제나 마음이 편하고 기분 좋은 것처럼, 이 책은 내게 진실한 우정과 사랑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교과서에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을 덕지덕지 붙여 가지고 다니던 것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이것 역시 앤에게로 향하는 나의 순수한 마음의 추억이기에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나의 마음에는 사랑의 온기가 식지 않고 있고, 그 반대편에는 이름 모를 쓸쓸함이 깃드는 것을 느낀다. 나에게는 영원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은 애번리요, 가장 아름다운 소녀는 앤이요, 가장 아름다운 책은 이 책이 되겠지만, 이런 별천지를 다녀오고 나서 쓸쓸해지는 마음을 추스르기는 쉽지 않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애번리만한 마을은 없고, 앤 같은 소녀를 과연 만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은 가능성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현실의 벽에 부딪혀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뒤에 남는 쓸쓸함의 잔해들……. 그러나 이런 행복한 이야기가 있어 실제 삶의 행복은 조금이나마 높아지게 마련이다. 나 역시 이 이야기를 읽고 난 후가 그 전보다 행복하다.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애번리를 꿈꾸고 행복한 고아 소녀를 상상하는 일을 결코 그만들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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