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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펄 벅 지음, 서정태 옮김 / 길산 / 2007년 7월
평점 :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서문에서, 옮긴이는 펄 벅과 버지니아 울프를 비교함에 있어 펄 벅의 대우가 마뜩찮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른바 ‘의식소설’과 펄벅의 페미니스트적이고 그보다는 휴머니스트적인 소설에 대하여 문단에서는 버지니아 울프를 상전 모시듯 했고, 직접 행동으로 실천한 펄벅은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기도 한 것이,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소설기법 자체에 있어 큰 주목과 사랑을 받은 데 비하여 펄벅은 <대지>라는 유명한 작품을 가끔씩 읽어주는 독자가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과연 ‘문학적귀족주의’가 무엇을 의미하고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옮긴이는 자문하고 또 반문하고 있다.
<대지> 이후의 후기작 <만다라>에서도 그녀의 사실적 서사 기법은 여전하다. 뾰족한 주제의식과 그렇다할 독창성이 빛나는 것은 아니지만, 펄 벅의 소설에서의 가장 큰 매력은 누가 뭐래도 ‘삶으로 이어지는 대서사’이다. 펄 벅이 1970년대 들어 집필한 <만다라>는 인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국경전쟁과 인종 그리고 종교적 갈등의 상황과 함께 연인의 사랑이 담겨있다. 타지마할 궁전 앞에서 연인의 실루엣이 우아하게 달빛에 비치는가 하면, 그 와중에도 전쟁과 핍박이 달 건너편에 웅숭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 그리고 건너편의 갈등, 평화 그리고 건너편의 전쟁, 궁전 그리고 건너편의 황무지……. ‘펜은 총보다 강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펄벅은 <만다라> 속의 상황을 그 시대의 현실에 최대한 가깝게 끌어들인다. 총은 파편을 남기지만 펄 벅의 소설은 과거의 상황을 남긴다는 점에서 펜은 총보다 강하다. 잉크는 탄환보다 빠르고 더 깊게 팔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이다.
<만다라>를 읽으며 의아했던 것은 펄 벅의 사실적인 묘사와 휴머니스트적인 소설 전개가 왜 그리도 아름답게 느껴졌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보석이 찬란히 반짝거리는 순간이나 아름답게 어둠을 밝히는 야경 혹은 유연한 춤동작에서나 비롯될 법한 단어다. 하지만 내가 펄 벅의 소설에서 아름다움을 느낀 것은 아름다움의 의미가 단지 ‘특별한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기 이전에 그보다 더욱 자연스러운 ‘삶의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펄 벅은 ‘삶의 아름다움’을 일찍이 깨달은 듯하다. 펄 벅의 소설들은 매우 사실적이고 꾸밈이 없지만, 그 속에 담긴 진가에서 우리들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삶의 아름다움을 조명한 펄 벅은 그에 마땅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충분히 있는 것이고 말이다.
펄 벅은 소설가다. 소설가이기 이전에 여성이다.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이다. 사람이기 이전에 세상에 몸을 담근 하나의 생명체다. 생명체이기 이전에 만물의 씨종이다. 씨종이기 이전에 우주의 빛이 비추는 대상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기 이전에, 삶을 이루는 티끌로서 그녀는 삶의 터울을 메운다. 또 하나의 현실의 대상으로 여지없이 소설을 선택한 펄 벅. 그녀의 파란만장하고도 아름다운 생애와 휴머니스트적 감성은 현대의 우리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곳, 이 땅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그 순간 펄 벅의 존재는 반짝거릴 것이다.
세인들에게 ‘대지’의 아름다움과 세상의 현실적 면모를 동시에 일깨워주는 펄 벅. 그녀의 소설이 한낱 역사로서 낡아지지 않고 점점 미래로 나아가 세상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