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집 범우문고 46
서정주 지음 / 범우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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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 서정주 
 

 시 중에서 미당 서정주의 작품들이 아마도 중 고등학교 교과서, 문제집에 가장 많이 실려 있지 않을까? 추천사, 춘향유문, 국화 옆에서, 자화상, 무등을 바라보며, 동천, 귀촉도... 학창 시절 접했던 작품으로 벌써 이만큼이나 쉽게 제목이 떠오른다.

 

 抒情주인가? 참으로 아름답고 감개무량하게 시를 쓴 사람이다. 게다가 우리 고유는 물론 세계 각국의 신화와 전설을 바탕으로 신비로운 느낌의 시도 남겼다. 옛 동화를 읽으며 꿈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느낌의 시들... 그런 스타일의 시 중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신부(新婦)'라는 시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읍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읍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벼렸읍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난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읍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초록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읍니다.

 

 TT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지? 무표정한 채로 우울하게 앉아 있는 신부의 모습이 떠오른다. 연두색 저고리에 다홍치마 입고,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 쓴 신부가 재로 바스라지는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에로틱한 느낌이 든다. 성적인 묘사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시에서 그가 묻힌 리비도를 감지했다. 내 상상이 지나친건가? --;; 변태인가?? 신부뿐만 아니라 다른 몇몇의 시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화사, 가시내, 입맞춤, 호가의 전설 등에서...

 

 아내를 끔찍히도 사랑한 그의 애틋한 마음을 볼 수 있는 시도 있었다. '내 아내'에서는 '나 바람 나지 말라고' 아내가 떠 놓은 냉숫물 사발에 그녀와 자신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각자의 숨결을 담을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내 늙은 아내'에서는 나이 든 자신의 아내에게 '양귀비 얼굴보다 곱네'라고 말하며 '천국이나 극락에 가더라도 그녀와 함께 가볼 생각이다'라고 고백한다. 말년에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시인은 식사도 제대로 안하고 맥주만 마시다가 곧 아내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그게 아마 2001년 경이지.

 

 이렇게 아름다운 시를 썼고 '아침이 언제나 맨 처음 열리는 나라 사람'들을 칭찬하고 자랑스러워 했던 사람이 무슨 마음을 먹고 친일을 하고 군사 정권을 위해 용비어천가를 불렀을까? 이런 사람이 조선을 유린한 일제를 찬양하고 5월 광주를 짓밟은 전두환을 칭송했다는 사실이 역겹게 까지 느껴진다. 잘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무언가 큰 단점이나 결함을 지니고 있을 때 느껴지는 서글픔, 열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는 그 혼돈.

 

 그런 생각이 마음 속에서 잉크처럼 번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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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22: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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