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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의 시간 - 결국 현명한 자는 누구였을까
안석호 지음 / CRETA(크레타) / 2021년 4월
평점 :

장벽이라 함은 사전적으로 가리어 막은 벽, 둘 사이의 관계를 순조롭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 등을 뜻하는데, 이 책에서는 체제, 민족, 국가, 경제력 등의 다름을 이유로 서로를 나누고 교류를 할 수 없도록 세운 유무형의 장애물을 뜻한다. 상대방과의 연결보다는 단절, 소통보다는 억압, 융합보다는 분리를 위한 목적으로 세운 장벽이기에 그 안에 속하느냐와 밖에 남겨지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운명은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인류사에 수없이 많은 장벽들이 있었겠으나
저자는 20세기에 생겨난 장벽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펼쳐가기에 오래 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건이며 대부분의 장벽은 지금도 사람들을 분리하고 단절시키며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중이다. 유일하게 무너진 사례인 독일의 베를린 장벽을 필두로 중동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미국과 멕시코 국경 문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비무장지대 그리고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무역 장벽까지. 어쩌면 많은 사람에게 지구촌 곳곳의 갈등 사례 중 하나로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장벽이 생겨나게 된 배경에서부터 어떠한 목적으로 세워졌으며 어떠한 과정을 거쳤고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차근차근 설명을 읽다보면 어느 새 그 장벽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는 동시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의 장점은 첫 번째로 장벽이 생겨난 원인과 배경에 대한 이야기를 근본적인 시작점에서부터 풍부하게 서술해 왜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이 생겨나게 되는지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동독이 왜 베를린장벽을 세우게 되었는지, 이스라엘이 서안 지구 곳곳에 정착촌을 지정하며 그 사이사이로 장벽을 세우게 되었는지, 느슨하던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왜 거대한 높이와 엄청난 길이를 자랑하는 장벽이 세워지게 되었는지 다각도로 문제를 접근해 자세하게 갈등이 생겨난 배경을 이해할 수 있어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장벽을 세우는 전개과정과 장벽이 생겨남으로써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는지 중립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잘 서술되어 있으며 최근 발행한 책답게 그 장벽들에 대한 최신 이야기까지 알 수 있어 좋았다.
두 번째로 ‘장벽’ 그 자체에 대해서만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벽 속을 넘나드는 실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덧붙여 담아내고 있기에 더욱 글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가령 예를 들면, 체제를 이유로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뒤 이를 넘어간 많은 사례를 들자면 장벽을 지키던 동독의 경비병 슈만이 철조망을 넘어 서독으로 간 장면이나 자신이 몰던 기관차를 몰고 바리케이드를 부수며 서독으로 향했던 기관사 해리의 이야기 등은 내가 역사 속에서 생각했던 베를린장벽에 대한 서술보다 훨씬 인상적이었으며 장벽으로 인해 분리된 사람들의 절박한 심경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미국으로 불법으로 이민을 하기 위해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지대로 향하는 화물 열차 속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이고 냉혹한 현실과 함께 이들과 거래하며 목숨을 담보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브로커 코요태와 국경지대를 향해 걸어가는 캐러반 행렬 등 목숨을 잃을 각오를 하며 탈출을 감행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장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강이나 바다, 산맥과 평원과 같은 자연적인 지형에서 인간은 오랜 기간 동안 함께 적응하며 융합과 분리를 자연스럽게 겪어왔다면 이와 달리 장벽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세운 장애물이며 그러하기에 건설하는 시간도 급작스러워 사람들도 쉽게 적응하기 어렵다. 또한 장벽을 세우는 특정 집단의 목적이 더해졌기에 이에 반발하는 다른 집단의 저항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장벽을 지키기 위해 특정 국가가 쓰는 병력, 장비, 시간 등은 실로 막대하다. 그럼에도 장벽을 세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를 아끼지 않으며 더욱더 높고 단단하게, 빈틈없이 세워 다른 집단을 막고 내부 결속을 다지려 한다. 그 결정은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 역사 속에서 과연 현명했던 판단이었을까. 책의 부제로 함께 달린 ‘결국 현명한 자는 누구였을까’라는 질문이 떠오르며 우리는 이미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