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하나요?
정창일: 우리에겐 공자님이나 불교의 가르침이 가까이 있는데, 구지 지리적으로도 멀고 우리와 인종과 문화가 다른 예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강훈: 아주 중요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복합적 질문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4대 성현, 즉,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 이 네 분이 다 삶에 유익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 분들 중에서 왜 예수만 특별하다고 하는가?”둘째로, “우리와 유대인의/예수의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우리의/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I. 먼저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의 하나님 신앙은 팔레스틴이라는 작고 특수한 지역에서 발생한 신앙입니다. 어떻게 문화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그들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하나님의 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문화의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뭐죠? 서양식의 옷입니다. 이 옷을 입고 계신 여러분의 느낌이 어때요? 편안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고유의 복장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머리를 기르고, 한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그런 복장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느낌이 어떨 것 같습니까? 몹시 불편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구지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구한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복장을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문화가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을 심각하게 던졌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왜 내가 머리를 잘라야 하는지”, “왜 서양식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묻지 않고, 그냥 당연한 듯이 머리를 자르고 서양식의 옷을 입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문화/종교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화/종교가 어디에서 발생했건, 어느 민족/인종에 의해 시작되었건 간에, 다른 문화권/민족에게로 이동해나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중국, 한국, 일본에서 더 융성해졌습니다. 사실 인도에선 불교인들이 minority입니다. 오히려 힌두교인들이 majority를 차지하죠. 또 그리스도교도 팔레스틴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전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더 융성해졌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문화/종교는 바람처럼 어디로든지 옮겨 다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아무도 문화/종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양식으로 머리를 잘랐다” 해서, “서양식으로 옷을 입었다” 해서, 문화적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은 그들이 했지만, 이 문화는 이미 우리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양 사람들이 우리더러, “야, 왜 너희들 허락도 없이, 우리처럼 머리 자르고 옷 입었어?”하고 묻는다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왜죠? 문화/종교에 관해서는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교나 유교도, 근원적으로 따지면 우리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석가는 인도 분이고요, 공자는 중국 분입니다. 중국 사람은 “한(漢)족”이고 우리는 “몽고족”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와 생긴 것도 한참 다르죠. 오늘날 불교와 유교를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작은 남의 나라에서 되었지만,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정착이 되었으면, 이미 우리 것이 된 것이죠. 자장면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보다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습니다. 시작은 중국에서 되었지만, 이젠 엄연히 한국음식이 되어버렸습니다. 피자는 이태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젠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구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틴 땅에서 유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났지만, 그걸 가지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는 우리 거다”하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구요, 우리도 “그리스도교는 걔네들 거다”하고 거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미 우리에게 들어와서 정착이 되었으면, 그건 이미 우리 것입니다.
II.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님의 가르침도 다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불교 경전을 읽어보면, 복음서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중 아무거나 믿으면 그만이지 구태여 예수를 고집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계시”가 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인간이 신(神)에 관해 다 알 수 있을까요? 다 알 수 있다면, 신(神)을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냥 연구하고 이해하면 되니까. 그렇다면 종교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종교가 있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알려면,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알려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려주시는 사건”을 가리켜서, 우리는 “계시”라 부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계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자연계시. 제가 어렸을 때, '지구는 둥글다'하는 자연과학적 진리에 관해 배운 바 있습니다. '삼십 몇 도의 기울기를 가지고서 지구가 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서 있는 곳이 위쪽 (↑)에 있을 때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만약 제가 서 있는 곳이 아래쪽 (↓)에 가 있으면 어쩌나?'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죠. 지구의 당기는 힘 때문에, 제가 아래쪽에 가 있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죠. 이걸 알기 전까지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모든 물체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 이것이 아이직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이렇게 각자 책상 주위에 빙 둘러앉지 못하고, 우리 열 명이 달라붙어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우리가 산이나 나무나 건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코에 달라붙는다고 상상해보세요! 당기는 힘이 너무 커도 좋지 않는 것이죠. 물체마다 서로 당기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은, 지구가 돌아도 우리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가 서로 마주 앉아도 달라붙지 않을 만큼, 적절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죠. “야, 누가 이 우주를 이처럼 오묘하게 만들었을까? ‘우연’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정밀해! 아마 이 우주는 어떤 지혜로운 분이 만드시고 그 뒤에서 조종하고 계실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읽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똑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실은 하나님이 애초부터 자기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자연 속에 두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에서는 자연계시라 부릅니다.
2. 특수계시. 사람들 가운데는 자연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과 만난 특별한 경험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서는 이런 특별한 하나님 경험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여기서 “특별하다”는 의미는, “나/우리에겐 경험되었지만 다른 사람/그룹에겐 경험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자연계시의 경우, 사람들이,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또 이 우주의 오묘한 질서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신론자건 유신론자건, 비그리스도인이건 그리스도인이건 간에, 모두 한 가지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이 우주에는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질서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질서”는 보편적인 것이며, 누구에게나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특수계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험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험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100명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그냥 구름만 보았습니다. 두 그룹의 경험은 상반되지만, 각자에게는 진실된 경험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경험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는 특수한 하나님 경험들을 가리켜서, “특수계시”라고 합니다. 성서에는 이런 특수한 하나님 경험들, 특수한 계시들로 꽉 차 있습니다.
3. 중요성 (Importance)의 개념.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특별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는데요, 그러면 그 계시들이 똑같이 중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것은 더 중요하고 다른 것은 덜 중요하겠습니까? 모든 계시가 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계시들 중에, 예수의 계시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계시를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K가 S와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크게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K는 "S 그 친구 믿을 사람 못되는구먼!"하고 생각하며 다시는 상종을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전에 S가 베푼 사랑도 속임수로 생각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S가 화해하려고 노력하고 친절을 베풀어 봅니다. 그러나 K는, '저거 다 가식이구먼!'하고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참 좋았다고 생각하고, 또 앞으로도 좋을 거라고 그렇게 기대하며 살아왔는데...쓰라린 배신을 맛보고나니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 배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니까, 과거의 좋았던 관계도 속임수로 보이고, 미래의 친절과 웃음도 가식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K는 S가 선물을 준 것, 비올 때 우산을 받쳐준 것, 생일을 기억해 준 것...이런 일들을 통해서, '아, S가 날 좋아하는구나'하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쓰라린 배신이 모든 해석을 온통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성서에는 수많은 계시들이 있는데. 이 계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계시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그려온 하나님 이해를 온통 뒤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힘이 무한한 분으로 이해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이 무한하신 분으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계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그래서 그 계시로 다른 모든 계시들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교 말고도 여러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논리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보다 더 우수한 편입니다. 유교는 풍부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거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계시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예수의 계시라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계시에 비추어서,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의 가르침을, 과학과 예술을, 다른 종교와 문화를, 성서의 여러 계시들과 우리 자신의 체험을 재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