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카인이 최초의 인간 가운데 한 사람 맞습니까?


정옥복: 창세기를 읽어보면,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뒤 도망을 치게 되는데, 그가 다른 곳에 갔을 때, 거기엔 벌써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최초의 인간이고, 그들 사이에서 난 카인까지 포함하면 이 세상엔 인간이 셋밖에 없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이미 존재할 수가 있었습니까? 제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지, 이 부분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분 때문에, 성경말씀이 잘 와 닿지 않습니다.


이강훈: 아주 오래 전에 '히브리'라 불리는 민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의 노예로 있었어요. 그들은 이집트 사람들을 위해서 피라밋을 짓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집트의 왕 바로의 압제 하에 있던 그들이 극적으로 이집트를 탈출하게 되었어요. 이 출애굽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체성 (identity)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출애굽의 경험이 그들의 신앙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 (the Covenant)을 맺게 되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이지요. 그 내용을 열 가지로 나열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이것을 '율법'이라고도 부르죠. 그래서 “말씀”하면 유대인들은 “율법”을 떠올렸고, (율)법이 그들에겐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곳에서 살게 되었어요. 이집트를 탈출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40년이 걸렸는데, 그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수많은 이방 부족들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이해했어요. 즉, 이웃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가져다주는 분으로 이해했던 것이죠. 그러다가 가나안에 정착해 농사짓고 살다보니, “풍요”를 기원할 필요가 있게 됐어요. 그래서 가나안의 토착신인 “바알”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전쟁의 신이고, 바알은 풍요의 신이다!” 이건 아니잖아요? 그러나 아주 오랜 옛날엔,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리 폭넓게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과의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모세 이래로, 이스라엘에선, 제사장이나 예언자나 사사 같은 종교적 인물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벌써 왕을 세우고, 강력한 중앙집권력을 바탕으로 영토를 넓혀나가고 있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게 아주 부러웠던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졸라댔습니다. 결국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15살 소년의 나이로 골리앗을 죽였던 다윗은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 되어, 영토를 크게 넓힙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솔로몬은 자기 왕궁을 너무나 크게 짓고 호화스런 생활을 하느라 국가의 힘을 소진시킵니다. 결국 그가 죽고 나자 이스라엘은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북쪽을 “이스라엘”이라 했고, 남쪽을 “유다”라 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망하고, 몇 백 년 뒤에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도시와 성전이 불타고, 사람들은 지배국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거기서 이들은, 심각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우리에겐 말씀도 있고, 신앙도 있는데, 왜 망할 수가 있는가?” 그들이 내린 결론은, “우리에겐 말씀대로 살아가는 실행이 없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들은 하나님을 만난 신앙의 경험들을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하나님을 만났던 사건들과 경험들은 있었지만, 성경이라는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글을 잘 몰랐고, 신앙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가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바베론 포로 시절에 비로소 문자로 기록되기시작합니다. 이 때 기록된 책들이 바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다섯 권입니다. (단 신명기의 대부분은 이미 문자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부족이 12이였으니까, 같은 얘기도 조금씩 차이가 났습니다. 이 부족에겐 쭉 전해내려 온 이야기가 저 부족에겐 없었습니다. 또 이 부족에겐 없는 이야기가 저 부족에선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만일 한 부족의 이야기만 기록해서 읽는다면, 아마 다른 부족들은 그걸 성서로 인정하지 않고 외면했을 것입니다. 또 내용도 그렇게 풍부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래서 성서를 기록할 땐, 여러 부족의 이야기를 함께 모아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성경에는 자연히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게 되었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구석들도 있게 된 것이죠. 만약 성경을 어느 한 사람이 혼자의 상상력으로 써 내려갔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불러주신 그대로 받아썼더라면, 성경에는 “최초의 인간 세 명 가운데 하나인 카인이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는 일관성 없는 진술을 기록할 리 없습니다. 아마 매끄럽게 써 내려갔을 것입니다. 성경에 서로 맞지 않는 구절이 있다는 것은, 여러 부족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 데 섞여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한 사람의 종교적 천재가 지어낸 글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 경험을 한 데 묶어놓은 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인이 최초의 인간 가운데 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느냐?”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모른다”입니다. 만약 어떤 종교적 천재가 이 글을 지어낸 것이라면, 아마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을 썼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부족의 다양한 신앙 경험을 함께 묶어놓다 보니까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구절이 성경에 버젓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인의 시대에 왜 사람들이 있었는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자, 이래 놓고 나면, '아담, 이브, 카인이 최초의 인간들이었다'는 가정이 깨지고, 자연히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다”는 대전제도 의심스러워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서의 자료가 되는 신앙경험의 사건들이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A라는 사람이 한 여자를 만나서, 연애를 하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결혼해서 자녀를 낳고, 한 10년 살게 된 다음에, “자신이 한 여인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또 얼마나 그 여인이 내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지”를 쓰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그가 좀 착각을 해서, 처음 만난 날짜와 만났던 장소를, “1950년 겨울 파고다 공원에서...”라고 써야 할 것을, “1950년 봄 남대문에서...”라고 썼다고 해봅시다. 또 S라는 사람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B라는 사람소개로 만나게 되었다고 썼다시다. 또 S라는 사람소개로 만나게 되었는데, B라는 사람소개로 만나게 되었다고 썼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그 사람 말이 다 거짓입니까? 중요한 건, 처음 만난 날짜, 처음 만난 장소, 누구 소개...이런 것들이 아니죠. 그런 것 다 틀려도, “내가 한 여인을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지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죠.


성경은 역사적 사실을 순서대로 설명하려는 책이 아닙니다. 과학적인 지식을 설명하려고 쓴 책도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 만난 사건들, 그들의 경험담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좀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하더라도, 여전히 믿을 수 있는 책이요,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카인이 최초의 인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 당시에 다른 사람들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성경이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관심은, 인류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고, 과학적으로 합리성 있게 증명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데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하나님을 만난 경험을 증거 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나서, 하나님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죽일까 두렵습니다”하고 말하게 됩니다. 카인이 이렇게 두려워 떨고 있자,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표를 주셔서,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고, “그를 죽이는 사람은 7배나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기 형제를 죽인 자라면, 정말로 나쁜 놈 아닙니까? 그가 뭐 자기 죄를 인정한 것도 아니고, 회개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가 아직 죄 가운데 있고, 죄로부터 돌이킨 것도 아닌데,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은혜로 보호하신다고 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카인의 후예”로 부릅니다. 아직 죄 가운데 있을 때, 전혀 자비와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지켜 보호해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카인의 시대에도, 이미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담의 문제가 남습니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 아니었는가? 하나님은 아담을 만들기 전에 또 다른 사람들을 만드셨는가? 그렇다면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 아니질 않는가?...” 이런 질문들이 우리를 계속 괴롭힙니다. 유사 이래로 인간들은 끊임없이 인류의 기원에 대해 물어왔습니다. 즉,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원숭이로부터 진화되었는가? 우연히 생겨난 것인가?...” 이런 물음들에 대해 답변해 온 것입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해 수많은 종교와 철학과 과학이 나름대로 멋진 답변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갈 존재다”라고 믿고 그것을 성서로 기록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유대인의 하나님을 믿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히브리말로 “아담”은 “사람 (man)”이란 뜻입니다. 또 “인류 (mankind)”란 뜻도 됩니다. 즉, 아담은 한 사람의 존재라기보다는 온 인류를 대표하는 인간인 셈이죠.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담을 만드셨다는 얘기는 하나님이 인류를 만드셨다는 얘기가 되고, 아담이 죄를 지었다는 얘기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대해 죄를 지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로,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의 이야기 (his story)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이야기 (my story)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카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야, 이런 못된 놈이 있나?”하고 읽는 것이 아니라, “야, 카인이 바로 나구나! 하나님이 나같이 자격 없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은혜 베푸시는구나!”하고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읽을 때, 우리는 성경에서 무한한 힘(power)과, 용기와, 생명력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죽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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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하나요?


정창일: 우리에겐 공자님이나 불교의 가르침이 가까이 있는데, 구지 지리적으로도 멀고 우리와 인종과 문화가 다른 예수의 가르침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강훈: 아주 중요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복합적 질문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로, “4대 성현, 즉,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 예수, 이 네 분이 다 삶에 유익한 말씀을 해주셨는데, 이 분들 중에서 왜 예수만 특별하다고 하는가?”둘째로, “우리와 유대인의/예수의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우리의/나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I. 먼저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의 하나님 신앙은 팔레스틴이라는 작고 특수한 지역에서 발생한 신앙입니다. 어떻게 문화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그들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하나님의 될 수 있겠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먼저 “문화의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뭐죠? 서양식의 옷입니다. 이 옷을 입고 계신 여러분의 느낌이 어때요? 편안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고유의 복장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머리를 기르고, 한복을 입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금 그런 복장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느낌이 어떨 것 같습니까? 몹시 불편하게 느껴지실 겁니다. (구지 역사적으로 따지자면 “구한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서 지금의 복장을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문화가 격변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가 이런 질문을 심각하게 던졌겠지만, 오늘날 우리는 “왜 내가 머리를 잘라야 하는지”, “왜 서양식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묻지 않고, 그냥 당연한 듯이 머리를 자르고 서양식의 옷을 입습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문화/종교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입니다. 문화/종교가 어디에서 발생했건, 어느 민족/인종에 의해 시작되었건 간에, 다른 문화권/민족에게로 이동해나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중국, 한국, 일본에서 더 융성해졌습니다. 사실 인도에선 불교인들이 minority입니다. 오히려 힌두교인들이 majority를 차지하죠. 또 그리스도교도 팔레스틴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전유럽, 아메리카, 아시아에서 더 융성해졌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문화/종교는 바람처럼 어디로든지 옮겨 다니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아무도 문화/종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양식으로 머리를 잘랐다” 해서, “서양식으로 옷을 입었다” 해서, 문화적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은 그들이 했지만, 이 문화는 이미 우리의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서양 사람들이 우리더러, “야, 왜 너희들 허락도 없이, 우리처럼 머리 자르고 옷 입었어?”하고 묻는다면,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습니다. 왜죠? 문화/종교에 관해서는 아무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불교나 유교도, 근원적으로 따지면 우리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석가는 인도 분이고요, 공자는 중국 분입니다. 중국 사람은 “한(漢)족”이고 우리는 “몽고족”입니다. 인도 사람들은 우리와 생긴 것도 한참 다르죠. 오늘날 불교와 유교를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작은 남의 나라에서 되었지만,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정착이 되었으면, 이미 우리 것이 된 것이죠. 자장면은 중국인들 사이에서보다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있습니다. 시작은 중국에서 되었지만, 이젠 엄연히 한국음식이 되어버렸습니다. 피자는 이태리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젠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구요.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팔레스틴 땅에서 유대 사람들에 의해 생겨났지만, 그걸 가지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는 우리 거다”하고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없구요, 우리도 “그리스도교는 걔네들 거다”하고 거부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어떻게 해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미 우리에게 들어와서 정착이 되었으면, 그건 이미 우리 것입니다.


II. 두 번째 질문에 답해보겠습니다. 소크라테스, 석가, 공자님의 가르침도 다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불교 경전을 읽어보면, 복음서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중 아무거나 믿으면 그만이지 구태여 예수를 고집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당연히 생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계시”가 뭔지를 알아야만 합니다.


먼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인간이 신(神)에 관해 다 알 수 있을까요? 다 알 수 있다면, 신(神)을 믿을 필요가 없겠지요? 그냥 연구하고 이해하면 되니까. 그렇다면 종교도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종교가 있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다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알려면, 하나님이 자신에 관해 알려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려주시는 사건”을 가리켜서, 우리는 “계시”라 부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시는 사건입니다. 계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자연계시. 제가 어렸을 때, '지구는 둥글다'하는 자연과학적 진리에 관해 배운 바 있습니다. '삼십 몇 도의 기울기를 가지고서 지구가 돈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서 있는 곳이 위쪽 (↑)에 있을 때는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만약 제가 서 있는 곳이 아래쪽 (↓)에 가 있으면 어쩌나?'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사실 걱정할 필요가 없죠. 지구의 당기는 힘 때문에, 제가 아래쪽에 가 있어도 떨어지지 않는 것이죠. 이걸 알기 전까지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모든 물체는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 이것이 아이직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이라는 거 아니예요? 그런데 당기는 힘이 너무 강해서, 우리가 이렇게 각자 책상 주위에 빙 둘러앉지 못하고, 우리 열 명이 달라붙어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우리가 산이나 나무나 건물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코에 달라붙는다고 상상해보세요! 당기는 힘이 너무 커도 좋지 않는 것이죠. 물체마다 서로 당기는 힘이 있지만, 그 힘은, 지구가 돌아도 우리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 우리가 서로 마주 앉아도 달라붙지 않을 만큼, 적절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죠. “야, 누가 이 우주를 이처럼 오묘하게 만들었을까? ‘우연’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정밀해! 아마 이 우주는 어떤 지혜로운 분이 만드시고 그 뒤에서 조종하고 계실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읽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똑똑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지만, 실은 하나님이 애초부터 자기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자연 속에 두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이것을 가리켜서 신학에서는 자연계시라 부릅니다.


2. 특수계시. 사람들 가운데는 자연에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과 만난 특별한 경험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서는 이런 특별한 하나님 경험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여기서 “특별하다”는 의미는, “나/우리에겐 경험되었지만 다른 사람/그룹에겐 경험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자연계시의 경우, 사람들이, 이 우주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또 이 우주의 오묘한 질서는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우연히 생겨난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무신론자건 유신론자건, 비그리스도인이건 그리스도인이건 간에, 모두 한 가지 사실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즉, “이 우주에는 뭔가 설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질서가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질서”는 보편적인 것이며, 누구에게나 경험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특수계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경험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험되지 않는 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100명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하나님/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거기서 그냥 구름만 보았습니다. 두 그룹의 경험은 상반되지만, 각자에게는 진실된 경험입니다. 이렇게 어떤 사람(들)은 경험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는 특수한 하나님 경험들을 가리켜서, “특수계시”라고 합니다. 성서에는 이런 특수한 하나님 경험들, 특수한 계시들로 꽉 차 있습니다.


3. 중요성 (Importance)의 개념.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특별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는데요, 그러면 그 계시들이 똑같이 중요하겠습니까? 아니면 어떤 것은 더 중요하고 다른 것은 덜 중요하겠습니까? 모든 계시가 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계시들 중에, 예수의 계시는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계시를 해석하는 열쇠가 됩니다. K가 S와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크게 다투고 헤어졌습니다. K는 "S 그 친구 믿을 사람 못되는구먼!"하고 생각하며 다시는 상종을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전에 S가 베푼 사랑도 속임수로 생각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S가 화해하려고 노력하고 친절을 베풀어 봅니다. 그러나 K는, '저거 다 가식이구먼!'하고 마음을 좀처럼 열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참 좋았다고 생각하고, 또 앞으로도 좋을 거라고 그렇게 기대하며 살아왔는데...쓰라린 배신을 맛보고나니까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 배신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니까, 과거의 좋았던 관계도 속임수로 보이고, 미래의 친절과 웃음도 가식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K는 S가 선물을 준 것, 비올 때 우산을 받쳐준 것, 생일을 기억해 준 것...이런 일들을 통해서, '아, S가 날 좋아하는구나'하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쓰라린 배신이 모든 해석을 온통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성서에는 수많은 계시들이 있는데. 이 계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계시가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그려온 하나님 이해를 온통 뒤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힘이 무한한 분으로 이해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이 무한하신 분으로 나타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계시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그래서 그 계시로 다른 모든 계시들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도교 말고도 여러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불교는, 논리적인 면에서 그리스도교보다 더 우수한 편입니다. 유교는 풍부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거기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계시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예수의 계시라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이 계시에 비추어서, 소크라테스, 공자, 석가의 가르침을, 과학과 예술을, 다른 종교와 문화를, 성서의 여러 계시들과 우리 자신의 체험을 재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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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란 말은 과연 맞는 것일까요.


전종규: 저는 교회의 여러 가지 면을 보고 있노라면 옛날 율법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척했던 생각 떠오릅니다. 현시대에도 삼위일체란 말을 믿으면 정통이고 믿지 않으면 이단일까요? 성경외의 말을 만들어 내어 그것이 성경보다 앞서 있으면 그 교리는 정당한가요?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 66권 어디에도 이런 말은 없습니다. 삼위일체란 말에 잡여 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까요? 요한일서에 있는 말씀을 예로 들어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이 하나이다.”라는 말씀만으로 삼위일체란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말씀자체를 재해석하여 사람의 생각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어서 사람을 미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말씀 그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 말씀으로도 삼위일체를 말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그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한다고 천국 못가고 이단이 될 수 있을까요?


이강훈: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 중 가장 난해한 이슈에 대해 질문해 주셨군요. 이 문제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정통 (orthodox)과 이단 (heresy)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 교리”는 2세기에 시작되어 4-5세기에 활발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때 교회는 어떤 정형화 된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교리”가 아닌] “고백” 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고백을 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유형은 천태만상이었습니다. 그 이상한 고백들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적극적으로 선언하기보다는] “그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라고 방어적으로 (defensively) 해석을 내리게 된 것이 교리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단 (heresy)”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를 지칭할 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정통 (orthodoxy)”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이란 “주류의 (mainline) 고백/사상과 다른 고백/사상을 가진 어떤 집단”을 가리킵니다.


2. 삼위일체 교리의 딜레마


내용적 딜레마


삼위일체 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셋이 하나다.” 이겁니다. 그러니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셋이 하나라면, 각각이 1/3이란 말이냐? 만약 각각이 1/3이 아닌 온전한 하나라면, 셋은 셋이 되어야 하질 않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정통주의자들 (Orthodox Christians)은, “그래서 '셋이 하나'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 (the mystery)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셋은 하나다.' 이건 분명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그래 놓고, "그게 무슨 뜻이냐? 어떻게 가능하냐?"하고 물으니까, "그건 신비다"하고 모호한 답변으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권위의 딜레마


“교리란 무엇이냐? 교리가 성서와 똑같은 권위와 무게를 갖는 것이냐? 아니면 성서보다는 하위의 것이냐?” 이런 질문들이 교리의 등장과 더불어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똑같은 권위와 무게를 갖는다.”는 것이 정통 교회 (=카톨릭 교회)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 반발하는 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발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을 최초로 이끈 루터는 세 가지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솔라 피데, 솔라 그라시아, 솔라 스크립뚜라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가 곧 그것입니다. 이 말을 한글로 옮기면,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 오직 성서로만"이 됩니다. 이 원칙에 입각해 보면, 종교개혁자들에겐, 어떤 교리나 신조도 성서보다는 하위의 권위를 갖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리에 성서와 똑같은 권위를 부여하거나, 교리에 성서보다 더 상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개신교 신앙원리 (the Protestant principle of faith)에 위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삼위일체의 교리'를 성서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개신교 신앙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3. 교리의 중요성과 위험성


중요성


미국에선 지도 한 장만 가지면, 어디든지 여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생전 가보지도 않은 지역의 주소를 주고 “찾아와 보라”고 해도, 지도만 가지고 있으면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지도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는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교리는 지도와 같습니다. 영혼의 순례에 안내를 제공하는 길잡이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교리가 없이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난다는 건, 우리를 곁길로 새게 하거나 엉뚱한 곳에서 맴돌게 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위험성


몇 년 전에 미국에선 몇 명의 teenager들이 술을 먹고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 세워진 도로표지판을 재미로 망가뜨린 일이 있습니다. 몇 시간 후 그 곳을 지나던 두 차량이 충돌하여, 3명의 젊은이가 그 자리에서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teenager들은 각각 10년, 20년, 무기징역 등에 해당하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울음바다로 변했습니다. 잘못된 교리는 얼마든지 수많은 영혼들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안내자로서 좋은 교리를 필요로 합니다.


4. 구체적인 것 (the concrete)과 추상적인 것 (the abstract)


성경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적어놓은 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교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리는 성서를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성서는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을 만난 구체적인 사건들이고, 교리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추상적 체계인 셈입니다.


한 어린이가 잔잔한 연못에 돌맹이를 하나 던졌습니다. 돌맹이가 연못 한 가운데 떨어지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 돌맹이가 물에 떨어진 순간부터 1초 후, 2초 후, 3초 후...의 물결의 변화를 그래프로 그릴 수 있습니다. 이때 파도가 이는 현상은 “구체적인 사건 (a concrete event)”이며, 그것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작성한 그래프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추상화 (an abstraction)”입니다. 이때 그래프는 옆에서 본 단면으로 표시될 수도 있고, 위에서 본 전면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둘은 각각 다른 모양을 보여주지만, 둘 다 파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다 거짓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추상화의 과정이 진실이라면, 그 추상화는 지어낸 것이나 가짜가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교리가 정말로 성서에 근거하고, 성서적 증언에 부합하다면, 그것은 지어낸 얘기도 가짜도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서의 증언들이 교리보다 더 앞선다는 주장은 철학적/물리학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것입니다.]


5. 삼위일체 교리는 과연 성서적인가?


성부, 성자, 성령은 분명 성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분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보니까, 서로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자가 성령을 대적한다든지, 성령이 임의로 행동한다든지 하는 것이 성경에는 전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는 성서적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진술 [첫째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둘째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을 “성삼위 일체”라는 추상적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삼위일체보다 더 나은 추상적 표현을 찾아낸다면, 그리고 그 표현이 우리가 갖고 있는 두 고백--[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 [세 분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을 충족시키실 수 있다면,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표현 대신 새로운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도는 구체적 지형에 대한 추상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도를 보고 “가짜다!” 그러지 않습니다. 지도가 우리의 삶에 유용하듯이, 삼위일체 교리 또한 우리의 영혼의 순례에 유익합니다. 삼위일체는 성서적 증언들의 추상화입니다. 이 말은, 성서에는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성서적 진술에 부합하는 추상적 표현입니다. 성서에 없다고 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배격하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성서보다 더 우위에 놓는 것만큼이나 위험스런 태도입니다. 성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한 표준이요, 교리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 좋은 길잡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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