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란 말은 과연 맞는 것일까요.


전종규: 저는 교회의 여러 가지 면을 보고 있노라면 옛날 율법 학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배척했던 생각 떠오릅니다. 현시대에도 삼위일체란 말을 믿으면 정통이고 믿지 않으면 이단일까요? 성경외의 말을 만들어 내어 그것이 성경보다 앞서 있으면 그 교리는 정당한가요?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 66권 어디에도 이런 말은 없습니다. 삼위일체란 말에 잡여 있다면 더욱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을까요? 요한일서에 있는 말씀을 예로 들어 “하나님과 말씀과 성령이 하나이다.”라는 말씀만으로 삼위일체란 말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말씀자체를 재해석하여 사람의 생각을 중심으로 삼위일체라는 말을 만들어서 사람을 미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말씀 그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요한복음 말씀으로도 삼위일체를 말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 그대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삼위일체를 부인한다고 천국 못가고 이단이 될 수 있을까요?


이강훈: 그리스도교 2,000년의 역사 중 가장 난해한 이슈에 대해 질문해 주셨군요. 이 문제를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정통 (orthodox)과 이단 (heresy)


역사적으로 볼 때, “삼위일체 교리”는 2세기에 시작되어 4-5세기에 활발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 때 교회는 어떤 정형화 된 교리를 가지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교리”가 아닌] “고백” 위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고백을 하는 교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유형은 천태만상이었습니다. 그 이상한 고백들에 대해서 교회가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적극적으로 선언하기보다는] “그건 아니다”, “저건 아니다”라고 방어적으로 (defensively) 해석을 내리게 된 것이 교리의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삼위일체 교리'입니다.


“이단 (heresy)”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를 지칭할 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정통 (orthodoxy)”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이란 “주류의 (mainline) 고백/사상과 다른 고백/사상을 가진 어떤 집단”을 가리킵니다.


2. 삼위일체 교리의 딜레마


내용적 딜레마


삼위일체 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셋이 하나다.” 이겁니다. 그러니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느냐? 셋이 하나라면, 각각이 1/3이란 말이냐? 만약 각각이 1/3이 아닌 온전한 하나라면, 셋은 셋이 되어야 하질 않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정통주의자들 (Orthodox Christians)은, “그래서 '셋이 하나'라는 삼위일체 교리는 신비 (the mystery)다”라고 답변하였습니다.


'셋은 하나다.' 이건 분명 논리적인 설명입니다. 그래 놓고, "그게 무슨 뜻이냐? 어떻게 가능하냐?"하고 물으니까, "그건 신비다"하고 모호한 답변으로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권위의 딜레마


“교리란 무엇이냐? 교리가 성서와 똑같은 권위와 무게를 갖는 것이냐? 아니면 성서보다는 하위의 것이냐?” 이런 질문들이 교리의 등장과 더불어 지금까지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똑같은 권위와 무게를 갖는다.”는 것이 정통 교회 (=카톨릭 교회)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입장에 반발하는 그룹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발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을 최초로 이끈 루터는 세 가지 원칙을 천명했습니다. "솔라 피데, 솔라 그라시아, 솔라 스크립뚜라 (sola fide, sola gratia, sola scriptura)"가 곧 그것입니다. 이 말을 한글로 옮기면,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은총으로만, 오직 성서로만"이 됩니다. 이 원칙에 입각해 보면, 종교개혁자들에겐, 어떤 교리나 신조도 성서보다는 하위의 권위를 갖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리에 성서와 똑같은 권위를 부여하거나, 교리에 성서보다 더 상위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개신교 신앙원리 (the Protestant principle of faith)에 위배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삼위일체의 교리'를 성서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개신교 신앙의 원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3. 교리의 중요성과 위험성


중요성


미국에선 지도 한 장만 가지면, 어디든지 여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에게 생전 가보지도 않은 지역의 주소를 주고 “찾아와 보라”고 해도, 지도만 가지고 있으면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지도가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 그는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거나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 뻔합니다. 교리는 지도와 같습니다. 영혼의 순례에 안내를 제공하는 길잡이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교리가 없이 하늘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을 떠난다는 건, 우리를 곁길로 새게 하거나 엉뚱한 곳에서 맴돌게 할 확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위험성


몇 년 전에 미국에선 몇 명의 teenager들이 술을 먹고 차를 타고 가다가,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 세워진 도로표지판을 재미로 망가뜨린 일이 있습니다. 몇 시간 후 그 곳을 지나던 두 차량이 충돌하여, 3명의 젊은이가 그 자리에서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그 teenager들은 각각 10년, 20년, 무기징역 등에 해당하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재판장은 울음바다로 변했습니다. 잘못된 교리는 얼마든지 수많은 영혼들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안내자로서 좋은 교리를 필요로 합니다.


4. 구체적인 것 (the concrete)과 추상적인 것 (the abstract)


성경은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목적으로 적어놓은 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서에서 '교리'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리는 성서를 토대로 만들어집니다. 성서는 하나님/예수님/성령님을 만난 구체적인 사건들이고, 교리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된 추상적 체계인 셈입니다.


한 어린이가 잔잔한 연못에 돌맹이를 하나 던졌습니다. 돌맹이가 연못 한 가운데 떨어지자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 돌맹이가 물에 떨어진 순간부터 1초 후, 2초 후, 3초 후...의 물결의 변화를 그래프로 그릴 수 있습니다. 이때 파도가 이는 현상은 “구체적인 사건 (a concrete event)”이며, 그것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작성한 그래프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추상화 (an abstraction)”입니다. 이때 그래프는 옆에서 본 단면으로 표시될 수도 있고, 위에서 본 전면도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둘은 각각 다른 모양을 보여주지만, 둘 다 파도에게 속한 것입니다.


추상적인 것이 다 거짓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것으로부터 추상화된 것이라면, 그리고 그 추상화의 과정이 진실이라면, 그 추상화는 지어낸 것이나 가짜가 아니라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추상적인 것은 구체적인 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교리가 정말로 성서에 근거하고, 성서적 증언에 부합하다면, 그것은 지어낸 얘기도 가짜도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성서의 증언들이 교리보다 더 앞선다는 주장은 철학적/물리학적으로도 설득력 있는 것입니다.]


5. 삼위일체 교리는 과연 성서적인가?


성부, 성자, 성령은 분명 성서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삼위일체”란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 분 사이의 관계를 놓고 보니까, 서로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자가 성령을 대적한다든지, 성령이 임의로 행동한다든지 하는 것이 성경에는 전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라는 성서적 증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두 진술 [첫째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둘째로, 성부, 성자, 성령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을 “성삼위 일체”라는 추상적 단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삼위일체보다 더 나은 추상적 표현을 찾아낸다면, 그리고 그 표현이 우리가 갖고 있는 두 고백--[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 [세 분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도 없다]--을 충족시키실 수 있다면,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표현 대신 새로운 표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도는 구체적 지형에 대한 추상화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도를 보고 “가짜다!” 그러지 않습니다. 지도가 우리의 삶에 유용하듯이, 삼위일체 교리 또한 우리의 영혼의 순례에 유익합니다. 삼위일체는 성서적 증언들의 추상화입니다. 이 말은, 성서에는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성서적 진술에 부합하는 추상적 표현입니다. 성서에 없다고 해서 삼위일체 교리를 배격하는 것은, 삼위일체 교리를 성서보다 더 우위에 놓는 것만큼이나 위험스런 태도입니다. 성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한 표준이요, 교리는 좋은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 좋은 길잡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