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덱의 보고서
필립 클로델 지음, 이희수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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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먼저 간 사람들이 생각나고, 마음도 복잡다단해지는 요즘이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는 것이 인간
이며, 이 하나의 손바닥으로 무한을, 한치 시간에서 영원을 쥘 수 있는 존
재가 인간이라고 시인은 노래했었지만, 어디 또 그런가.
아우슈비츠를 만들고 40만의 유태인을 학살하는 것이 또 인간이다.
그렇기에 어떤 작가는 세상은 100퍼센트의 거짓말로 이루어져 있다고 확신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그 작가는 그 중 80퍼센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하얀 거짓말이라고 부연했다.
그런 이면적인 존재가 또 인간이다. 


필립 클로델은 이러한 우리의 이면성, 나약함, 한계, 그러나 아름다운 가
능성을 이야기해온 작가이다.
전작 회색영혼 역시 전쟁의 상흔과 상처, 고독, 이기심, 그러나 순수한 마
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번 신작 브로덱의 보고서는
이러한 그의 작가적 시선이 한층 섬세하게 다듬어져 내놓아진 것으로 느껴
진다.

이야기는 전쟁 후, 수용소에서 돌아온 브로덱에게 마을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맡겨지면서 시작한다.
마을 전체가 공모한 이 공공연하고도 은밀한 살인사건의 전말이 브로덱의
서술을 통해 밝혀지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감춰진 비밀, 욕망, 이야
기가 드러나고 있다.
처음부터 '프렘더(이방인)'였던 브로덱의 눈에 비친 이들과, 프렘더 였기
에 그가 겪어야 했던 일들, 하나의 종(種)으로서의 인간이 자신과 다른 개
체에게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 자신의 안위가 위협당할 때, 혹은 자
신의 안위와 아무 상관이 없더라도 단순한 욕망의 충족을 위해 얼마나 난
폭해질 수 있는지, 그 이기성과 광기, 고등한 저열함 등이 세밀한 눈으로
읽혀 씨실과 날실로 정교하게 짜여져 드러난다.
전작부터 느꼈지만, 필립 클로델은 섬세한 작가이다.
사람의 마음의 결 한올 한올을 세심하게 포착해내고,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단어로 이를 표현해낸다.
마음을 움직이는 서술의 힘도 좋지만,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간사와 사
람의 모습이 여러모로 인상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이토록 유한하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존재라는 사실에.
'인간적'이라는 말의 이중성을 다시금 몇 번이나 곱씹어보게 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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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명법문 - 우리 시대 큰 스승 스무 분의 살아 있는 법문 모음
성수스님 지음, 법보신문.월간 불광 기획 / 불광출판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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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가셨고 얼마 전에는 법정 스님이 열반에 드셨다.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책을 법정 스님에게 선물하며 "부처님 오신 날 초대와 모든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헌사를 보낸 것에서 알 수 있듯, 두 분 모두 종교와 교리를 넘어선 사랑을 실천하고 교분을 나누셨다.
이렇듯 어찌보면 세상살이도 사람살이도 매반 한가지이듯 종교와 믿음도 종국에는 하나로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기독교 인이기에 불교의 교리나 법문에는 무지했다.
불광출판사의 <기억에 남는 명법문>을 통해 처음 불교와 법문의 맛을 보았다.
지난 2009년과 올 2010년 초반 <법보신문>에 연재되었던 "명법문 명강의"와   월간 <불광>에 연재되었던
"살아있는 명법문" 중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법문을 가려 엮은 것이라 한다.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그래서 교리에 무지한 사람이 읽기에도 무리가 없고 말씀들이 거부감이 없는 것을 보면
진리란 참으로 세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무언가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고,
결국 모든 종교의 말씀들이란 이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로구나 싶다.

책 속 통광스님 말씀을 보면 "모든 종교의 목적은 이고득락(離苦得樂)입니다"라 하셨는데,
나고 죽음의 고통, 고해(苦海)라 일컬어지는 세상살이의 고통을 딛고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찾는 것이
결국 우리가 종교와 모든 말씀들에서 찾고자 하는 해답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점에서 명법문을 추려 엮었다는 이 책은 종교와 교리를 떠나 마음에 새겨두면 좋을 훌륭한 가르침들을 담고 있다.
혜인 스님은 "나를 남 아래에 둘 수 있는 마음(하심)으로 자비를 베풀라"고 설파하고,
정련 스님은 "부처와 극락도 내 마음 가운데 있다"며 마음이 결국은 우주만유의 근본임을 깨닫게 하며,
청화 스님은 숲의 헤아릴 수 없는 나뭇잎 중 한움큼을 쥐고 나와 절제된 말의 소중함을 설파하신 부처님 말씀을 예로 들며 분별없는 말을 삼가할 것을 강조한다.
모두가 굳이 불가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챙겨두어도 걸맞을 지당한 지침들이다. 

세상이 점점 강팍해지고 살기가 어려워진다고들 말한다.
지지난 해 세계 경제파동 이후 보다 더 그러한 것 같다. 뉴스에서는 흉흉한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시절이 추울 수록 훌륭한 분들의 부고는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근간 시대의 등불 같던 또 한 분을 먼 곳으로 보내며 휑해진 마음에 정념 스님의 말씀 한 자락이 유독 깊이 남는다.
"세상이 본래 추운 것이 아니라 마음이 추운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춥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이 따뜻하면 세상도 따뜻해질 것입니다.
마음이 하기에 따라 가정도, 세상도, 국가도, 세계도 다 훈훈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 기운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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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사생활 - 세기의 남성을 사랑에 빠뜨린 결정적 비밀들
김정미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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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노래했다,
"이토록 격렬하고, 이토록 연약하고, 이토록 부드럽고, 이토록 망하는" 이 사랑,
"이토록 아름다운 이 사랑, 이 토록 행복하고, 이토록 즐겁고, "
그러나 "기억처럼 잔인하게, 회한처럼 어리석게, 대리석처럼 싸늘하게, 대낮처럼 아름답게
미소지으며 우리를 보는" 이 사랑. (자크 프레베르, "이 사랑")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 중 가장 격렬하고, 깊고, 내밀하며 통제되지 않는 것은 아마
'사랑'이란 감정이 아닐까 한다.
그렇기에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사랑은 때로 인생을, 나라를, 역사를 뒤흔들어놓을 만큼
강렬한 '사건'이 되기도 한다.
"연애의 사생활"은 이렇듯 세기의 사건으로 기억될 만한 러브스토리와 그 안에 숨은
내밀한 속살을 들려주는 책이다.  

슨과 에드워드, 샤 자한과 뭄타스 마할, 히라쓰카 라이초와 오쿠무라, 보니와 클라이드, 칼로와 디에고, 메리와 보스웰 백작, 비비안 리와 로렌스, 다이애나비와 찰스, 레논과 요코 등의 여덟가지 사랑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영국 왕좌를 버리게 한 에드워드의 사랑, 역사에 남을 아름다운 타지마할을 세운 샤 자한의 사랑, 보수적 사회를 뒤흔들 자살스캔들을 터트린 하라쓰카의 사랑...
하나하나 짚어나가다 보면, 그토록이나 비합리적이고 설명되어질 수 없고 순간적인 것이
사랑인가 싶다가도 그토록 숭고하며 어떤 설명도 필요로 하지 않고 지순하게 영원한 것이
사랑인가 싶기도 하다.

그것이 절망인들 혹은 구원인들, 그것이 슬픔인들 혹은 행복인 듯, 무엇인들 어떠하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같고,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린도전서 13장)"하였으니,
사랑이 없다면 인간의 위대함도 삶의 찬란함도 그 빛을 잃어버릴 듯 하다.  

그러한 '사랑'이야기를 '연애의 사생활'은 주인공들의 만남과 매혹과 갈등과 헤어짐까지,
한발한발 따라가며 그 이면에 숨은 심리적 요인까지 그려내보고 있다.
이름으로만 들어보았던 유명인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시대적 상황이나 그들의 스캔들이 역사에 끼친 영향까지 재미있게 훑어볼 수 있다.
가볍고 즐겁게, 그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희로애락의 역사를 함께 맛보며 읽을 수 있는 인상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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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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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의 날갯짓 활개치던 꿈에서 깬 장자가 읊조렸었다. 
꿈에서는 꿈을 꾸고 있음을 알지 못하다가 꿈에서 깨었을 대 비로소 그것이 꿈임을 깨닫게 되듯,
생이란 어쩌면 그렇게도 아련하고, 흔적없이 흩어지는 모래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무상함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 진정한 자유로움으로 삶을 대면하는 경지가 열리는 것이 아니겠나.

<나, 제왕의 생애(我的帝王生涯)>는 ‘20세기 중국문학 베스트 100’에 선정된 바 있는 작가 쑤퉁의 장편소설이다.
황권을 두고 벌어지는 궁중의 암투 아래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열네 살 소년 단백을
주인공으로 고대의 역사와 문화, 궁정의 사건과 비빈들, 옛 악기와 음악, 강호를 떠도는 예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쑤퉁은, 
"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생이란 불과 물, 독과 꿀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역사소설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소설 속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궁정의 음모는 모두, 그저 비 오는 밤에 놀라 깨어났을 때의 
꿈결 같은 것이다. 소설 속의 재난과 살육 또한 내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품고 있는 
걱정과 두려움, 그것에 불과하다. 나는 내가 꿈에 기대어 글을 쓰고, 꿈에 기대어 살았을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 제왕의 생애>는 바로 그 꿈속의 꿈이다." 라고 했다.

 
꿈속의 꿈.
아무리 아름다워도 깨고 나면 잡을 수 없고, 아무리 애달퍼도 눈 뜨면 흔적도 없다.
그러한 꿈속의 꿈이니 그 얼마나 아련한가.
열네 살 왕위에 올라 허울뿐인 치욕스런 권력을 한없이 누리다가
제위에서 쫓겨나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되찾고 광대로 변신, '줄타기의 왕'으로 명성을 얻는 단백의 일생은
삶에서 우리가 쫓는 권력, 사랑, 부와 명예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을 양 어깨에 걸친 우리의 모습이 과연 얼만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도 되묻는다.
단백은 왕의 아들로, 왕의 형제로 태어나 제왕의 권위를 누렸으나 기실 그는 왕이 아니었고
왕이고자 하지도 않았으며, 왕의 그릇으로 태어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철갑같은 그 버거운 외피는 일생 그를 고통스럽게 조여온다.

"나는 금관과 용포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를 깨달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의 옷 바꾸기 놀이를 통해 나는 내가 그 제왕의 표지에
얼마나 많은 미련을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짚더미 위에 엎드려
연랑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의 당혹스럽고 우울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문득 내 섭왕의 표지가 다른 사람의 몸에도 잘 어울리며,
심지어 더욱 위풍당당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관의 누런 옷을 입고 있으면 나는 어린 내시에 불과했다. 금관과 용포를 걸치고 있어야만 비로소 제왕이었다.
그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벗어버리고 싶지만 벗을 수 없는 외피를 피부처럼 두른 삶.
어린아이의 몸으로 제왕이 된 운명은 행복 아닌 불행이지만 벗어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무겁지만 내려놓을 수 없는 짐 같은 것이 인생인 것이다.
호화로운 구중궁궐에서 귀신 꿈에 시달리던 단백은 이복형의 반역으로 궁에서 쫓겨나며 본래 꿈꾸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제목 '나, 제왕의 생애'에서 의미하는 제왕이란 섭나라의 '허수아비 왕'이었던 단백이 아니라,
광대로 명성을 날린 '줄타기의 왕' 단백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짧고, 고풍스럽고, 음울하며, 아름다운 이 소설은 마치 한편의 흑백영화처럼 아련하게 끝이 난다.
잔잔히 미소로 지을 수 있는 해피엔딩으로.
그러나 그 온건한 끝은 불안하고 괴기스러운 작품의 전반부만큼이나 덧없고 흐릿하다.
작가의 말처럼 어차피 이 책 역시 꿈속의 꿈이기에.
책장을 덮고 나니 이 한편의 글이 베겟머리 적신 눈물 자욱처럼 그저 다 지난 뒤 그랬구나, 비로소
깨닫게 하는 하나의 흔적과도 같이 아련하다. 마르고 나면 그 역시 흔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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