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가..."
나비의 날갯짓 활개치던 꿈에서 깬 장자가 읊조렸었다. 
꿈에서는 꿈을 꾸고 있음을 알지 못하다가 꿈에서 깨었을 대 비로소 그것이 꿈임을 깨닫게 되듯,
생이란 어쩌면 그렇게도 아련하고, 흔적없이 흩어지는 모래알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무상함의 깨달음을 얻었을 때 진정한 자유로움으로 삶을 대면하는 경지가 열리는 것이 아니겠나.

<나, 제왕의 생애(我的帝王生涯)>는 ‘20세기 중국문학 베스트 100’에 선정된 바 있는 작가 쑤퉁의 장편소설이다.
황권을 두고 벌어지는 궁중의 암투 아래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제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열네 살 소년 단백을
주인공으로 고대의 역사와 문화, 궁정의 사건과 비빈들, 옛 악기와 음악, 강호를 떠도는 예인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쑤퉁은, 
"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생이란 불과 물, 독과 꿀처럼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것들이 
한데 어우러진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역사소설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소설 속의 아름다운 여인들과 궁정의 음모는 모두, 그저 비 오는 밤에 놀라 깨어났을 때의 
꿈결 같은 것이다. 소설 속의 재난과 살육 또한 내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품고 있는 
걱정과 두려움, 그것에 불과하다. 나는 내가 꿈에 기대어 글을 쓰고, 꿈에 기대어 살았을뿐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 제왕의 생애>는 바로 그 꿈속의 꿈이다." 라고 했다.

 
꿈속의 꿈.
아무리 아름다워도 깨고 나면 잡을 수 없고, 아무리 애달퍼도 눈 뜨면 흔적도 없다.
그러한 꿈속의 꿈이니 그 얼마나 아련한가.
열네 살 왕위에 올라 허울뿐인 치욕스런 권력을 한없이 누리다가
제위에서 쫓겨나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되찾고 광대로 변신, '줄타기의 왕'으로 명성을 얻는 단백의 일생은
삶에서 우리가 쫓는 권력, 사랑, 부와 명예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을 양 어깨에 걸친 우리의 모습이 과연 얼만큼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도 되묻는다.
단백은 왕의 아들로, 왕의 형제로 태어나 제왕의 권위를 누렸으나 기실 그는 왕이 아니었고
왕이고자 하지도 않았으며, 왕의 그릇으로 태어나지도 못했다.
그러나 철갑같은 그 버거운 외피는 일생 그를 고통스럽게 조여온다.

"나는 금관과 용포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를 깨달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의 옷 바꾸기 놀이를 통해 나는 내가 그 제왕의 표지에
얼마나 많은 미련을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짚더미 위에 엎드려
연랑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의 당혹스럽고 우울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문득 내 섭왕의 표지가 다른 사람의 몸에도 잘 어울리며,
심지어 더욱 위풍당당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관의 누런 옷을 입고 있으면 나는 어린 내시에 불과했다. 금관과 용포를 걸치고 있어야만 비로소 제왕이었다.
그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벗어버리고 싶지만 벗을 수 없는 외피를 피부처럼 두른 삶.
어린아이의 몸으로 제왕이 된 운명은 행복 아닌 불행이지만 벗어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무겁지만 내려놓을 수 없는 짐 같은 것이 인생인 것이다.
호화로운 구중궁궐에서 귀신 꿈에 시달리던 단백은 이복형의 반역으로 궁에서 쫓겨나며 본래 꿈꾸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
제목 '나, 제왕의 생애'에서 의미하는 제왕이란 섭나라의 '허수아비 왕'이었던 단백이 아니라,
광대로 명성을 날린 '줄타기의 왕' 단백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짧고, 고풍스럽고, 음울하며, 아름다운 이 소설은 마치 한편의 흑백영화처럼 아련하게 끝이 난다.
잔잔히 미소로 지을 수 있는 해피엔딩으로.
그러나 그 온건한 끝은 불안하고 괴기스러운 작품의 전반부만큼이나 덧없고 흐릿하다.
작가의 말처럼 어차피 이 책 역시 꿈속의 꿈이기에.
책장을 덮고 나니 이 한편의 글이 베겟머리 적신 눈물 자욱처럼 그저 다 지난 뒤 그랬구나, 비로소
깨닫게 하는 하나의 흔적과도 같이 아련하다. 마르고 나면 그 역시 흔적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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