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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청소년 소설들이 좋다. 아이었던 나와 부모인 나의 모습을 모두 돌아볼 수 있어서이다. 그런데 이번 『호수의 일』은 다른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들보다 유난히 더 주인공 호정이에게 몰입해서 읽었다. 그래서였을까 마지막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흐느끼며 울어버렸다. 최근 읽었던 대부분의 청소년 소설이 주인공의 성장을 다루었지만 이번 책은 그간 읽었던 다른 소설들과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주인공들의 아픔에 마음이 아팠고 홀로 그 아픔을 견뎌나가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고등학교 1학년인 호정이. 공부도 곧잘 하고 문제꺼리 하나 없이 학교 생활도 잘 하는 모범생. 아홉 살 차이나는 귀여운 여동생 진주와 엄마아빠 네 식구이다. 사춘기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부모님보다 친구와 더 가까운 사이이고 공부한다는 유세(라고 부모님은 받아들인다)를 부리는 보통의 아이다. 아니, 아이처럼 보인다. 사근사근한 성격의 아이가 있고 데면데면한 성격의 아이가 있다. 잔정이 많아 정을 뿌리고 다니는 아이도 있고 냉정한 아이도 있다. 사람은 다 제각각이니. 호정이는 냉정한 아이편에 속한다. 혹자는 기질이라고 사춘기 때문이라고 공부라는 스트레스 떄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지나온 날들의 아픔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정하지 않았던 임신으로 태어난 호정. 결국 엄마는 커리어를 접어야 했고, 아빠 역시 하려던 일을 하지 못한채 조금은 다른 길로 가야했다. 잘 살고 싶었던 엄마아빠는 모든 자금을 끌어다 중국에서 무리한 일을 별였고 호정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고모와 삼촌의 몫까지 끌어다 시작한 일은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했고 부모님은 빚과 함께 귀국했다. 다른 일을 시작한 호정의 엄마아빠가 다시 일어서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호정은 계속 할머니, 고모, 삼촌과 한 집에 살았다. 계획했던 미래가 어그러진 것은 고모와 삼촌 할머니도 마찮가지였고 그들은 호정의 아빠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을 것이다. 호정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진 않았겠지만 눈 앞의 조카가 떄로는 미웠을 것이고, 어린 호정이는 그 눈치를 견디고 또 견디며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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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렇게 화나는 일이었을까? 삼촌과 고모를 만나면 문득문득 치밀어 오른다. 장남이라고 혜택만 입다가 결국 동생들 몫까지 다 날려 버린 형, 오빠. 나라도 화가 났을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들은 어른이었잖아.
그런 호정의 마음을 쓰다듬어 주고 상처난 자리에 약을 발라주고 밴드를 붙여주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춘기에 공부 스트레스라고 생각한 호정의 엄마는 그저 호정의 눈치만 보기 바빴고 아빠 역시 눈치 보다가도 문득 서운한 마음이 강해지면 '내가 도대체 뭘 그리 잘못한거냐'고 '너를 뒷바라지 하려고 부모가 고생인거 안보이냐고' 화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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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는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 엄마가 밤마다 침대 머리맡에서 『오즈의 마법사』를 읽어 주고 있는 터였다. 나는 『오즈의 마법사』라는 책이 그렇게 긴 시리즈라는 걸 처음 알았다. 엄마가 그렇게 실감 나게 책을 잘 읽는다는 것도,
호정이는 엄마가 책을 읽어준 기억이.... 있을까? 아홉살 어린 동생 진주는 엄마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 자라나는 진주를 보며 호정은 사랑을 듬뿍 받는, 엄마아빠의 곁에서 자라는 진주가 얼마나 부러웠을까. 아홉살이라는 나이차가 현실에선 크게 다가오기에 상대적으로 호정이는 큰 아이처럼 느껴졌겠지만 호정이도 아직은 어린 아이였을 뿐이다. 부모의 사랑이 필요한, 사랑이 그리운 아이. 터울이 많이 나는 아이 둘을 키우고 있어서일까 나는 호정이를 보며 큰아이가 떠올랐다. 지금 둘째의 나이에 동생이 생긴 첫째. 그 당시엔 다 큰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둘째가 그 당시 첫째의 나이가 되자 이 아이가 얼마나 어린 아이였는지 알게 되었다. 엄마의 사랑이 아직 필요한 아이였는데 다 큰 아이 취급하며 까다로웠던 둘째 키우기 힘들다고 첫째를 너무 등한시했던, 첫째에게 내 힘든 감정을 퍼부었던 지난 날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다. 우리 첫째도 호정이처럼 외로웠겠다는 생각이 드니 너무도 미안했다. 그래서 호정이가 안쓰러웠다.
호정이에게도 자신을 아껴주는 친구가 있다. 주변에 보면 여유있는 집안에서 사랑을 듬뿍받고 자란 아이가 있다. 꼬인 것 하나 없이 해맑은 아이. 그래서 가끔은 이유없이 얄밉고 고까운 감정이 드는 아이. 호정에게 나래는 그런 친구였다. 친구의 악의없는 이야기가 가시를 달고 나에게 화살이 되어 날아온다. 내 마음의 비뚤어진 각도는 친구의 선한 말에 가시를 달고 내 마음을 더욱 비뚤어지게 한다. 내 자격지심일수도, 지독히 꼬인 질투일수도 있는 그 감정은 나 자신을 갉아먹고 친구의 선한 마음에 상처를 낸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친구를 잃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래는 호정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였고, 호정이도 나래에게 진심을 담아 미안함을 전한다. 그들은 여전히 절친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라도 하지 못하는 말이 있다. 나와는 다른 상황에서 자란 친구라면 더욱 털어놓지 못하는 감정들을 의외의 친구와 나누는 경우도 있다. 1학년 2학기에 전학온 은기는 호정에게 그런 친구였다. 그들은 각기의 아픔을 가지고 있었고 그 아픔이 어떤 것인지 털어놓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서로가 상처받았음을, 지독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가까워진다. 호정과 은기 역시 그런 사이가 되었지만 그 행복했던 시간은 오래가지 않는다. 너무나 좋은 사람이고,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내가 겪은 아픔을 자꾸 떠올리게 한다면 그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게 만들어서일까. 호정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은기와 오래오래 편한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았을텐데. 은기의 비밀이 밝혀지며 그들 사이는 전과는 다르게 흘러가버렸다.
호정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울컥했고 마지막 부분 은기와의 만남에서는 눈물을 쏟아버렸다. 깊은 마음 속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던 친구와의 관계가 의도치 않게 변하는 것은 얼마나 깊은 슬픔일까. 소설 첫머리에 호정은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다_7"고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 마음은 얼어붙은 호수와 같아 나는 몹시 안전했지만, 봄이 오는 일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_350"고 말한다. 그동안 겨울이었던 호정의 마음이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봄이 되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 봄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봄을 맞이하게 된 호정. 마음을 계속해서 드러내서 찬란히 따듯한 봄을 맞이할 호정을 응원한다.
* 출판사에서 가제본 도서를 제공받아 솔직히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