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신저 -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의 창조자들
이남훈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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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돈 버는 일도 아니요, 밥 먹는 일도 아닌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어린왕자, 그 어린왕자는 돈을 벌고, 밥을 먹는 것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혹자들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어린왕자에게는 시시각각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잡는 게 더 어려웠을 수도 있다.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지구상에 자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한 번쯤은 물어봤으면 좋겠다. 그 다양한 대답들 속에 우리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을 테니깐...


사람의 마음을 잡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사람의 마음은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한마디의 말로 사로잡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 책 《메신저》에 들어가 있다. 세계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의 메시지를 통해 상대방의 마음, 아니 우리 전체의 마음을 움직인 이야기들이 이 책 《메신저》의 주된 이야기다. 이뿐만 아니라 이 책의 주인공들인 메신저들의 이력도 다양하다. 전, 현직 대통령에서부터 내로라하는 CEO, 종교인, 한 나라의 정신적 지배자와 인권운동가, 그리고 회사의 홍보 담당자들까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이 전한 메시지로 인해 여러 사람들의 꽁꽁 얼었던 마음이 눈 녹듯 풀렸고, 울분과 억울함이 용서와 화해의 장으로 변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여러 메신저들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았던 메신저는 이 책의 제일 첫 장에 나오는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였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나치들에게 가장 큰 희생양이었던 폴란드 국민들, 그들의 마음 속에 독일은 내 가족들을 죽인 원수이자 복수의 화신으로 기억될 만큼 그 한이 가슴속 깊이 응어리져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폴란드 국민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바르샤바에 있는 유대인 유령탑을 찾은 빌리 브란트 총리는 유령탑에 묵념을 하고 난 후, 무릎을 꿇는 행위를 통해 폴란드 국민들에 진정으로 사죄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폴란드 국민들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응어리를 한순간에 없애버렸다. 한 나라의 수장이 다른 나라에 가서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를 상상해본다면 빌리 브란트 총리의 무릎을 꿇은 진심어린 사죄는 한 사람의 사죄가 아닌 독일 국민 전체의 사과였으며, 이 사과를 폴란드 국민들은 사심없이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빌리 브란트 총리는 1년 뒤 유럽 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하게 되는 영광까지 누리게 된다.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의 이야기도 나온다. 지금은 그녀를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TV 토크쇼 사회자로 알고 있지만,  과거에 그녀가 사촌에게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녀에게는 평생 고통과 아픔으로 기억될 과거의 상처들을 TV 토크쇼를 진행하는 중에 고백을 함으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응원을 받은 오프라 윈프리, 이 고백을 계기로 그녀는 약자의 편에 서서 약자들을 대변하는 메신저가 되었고, 과거의 상처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치유하는 힐러(Healer)이자 신의 말을 전하는 선지자(prophet)라 부르고 있다.


메신저는 이렇듯 ‘빤해 보이는 상황’에 뛰어들어 층격과 반동(反動)의 메시지를 전파함으로써 예측 가능한 결말의 물줄기를 바꾼다.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결집하여 현실을 변화시키는 물리적인 힘으로 전환시킨다. 이처럼 메신저가 만들어 낸 새로운 상황을 후세의 사람들은 ‘변화’라고 말하고 ‘혁신’이라고 평가한다.(본문 20쪽 中)


그렇다면 메시지는 유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인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도 충분히 우리만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이 책에 나온 메시지의 전달 법칙처럼만 한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어 보인다. 총구에서 나오는 탄환처럼 메시지를 격발(Trigger)해서 계속헤서 그 메시지를 연상(Remind)시키고, 마지막에 가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Diffusion)시키면 된다. 이 T.R.D. 법칙을 회사나 소통이 필요한 집단에서 활용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부단한 노력과 연습을 통해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그 메시지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메신저로 거듭날 수 있을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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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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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드론(Drone, 무선전파로 조종할 수 있는 무인항공기)의 인기가 거세다. 특히나 방송국에서 멋진 풍경을 담기 위해 드론에 카메라를 부착한 헬리캠의 용도로 많이들 사용하고 있다. 이런 인기를 등에 업고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드론에 사람이 타는 자동차용 드론이 나온다고 하니 SF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현실로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미래 언젠가는 버스나 택시, 지하철은 사라지고 대체수단으로 드론이 하늘길을 여는 그런 세상이 도래할 것인데, 이런 현상이 왠지 모르게 달갑지만은 않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리들과 함께 했던 과거의 추억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올더스 헉슬리의 상상력은 자동자형 드론의 탄생을 앞두고 있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80년 전의 상상력이 현재보다도 더 앞서고 있으니 그의 풍부한 상상력에 대단하단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탄생은 지나온 기억 속에 묻혀 버리고, 인간이 부화되는 세상이 온 것이다. 그것도 난자 하나에 태아 하나가 아닌 ‘보카노프스키’란 과정을 통해 96명의 인간이 탄생이 아닌, 부화가 되는 그런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그들은 부화(생성)되었다고 축복해 주는 사람도 없이 정해진 임무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잠을 자는 동안 가르치는 최면학습을 통해 성장하고, 책과 꽃을 보기만 해도 증오심을 일으키게끔 세뇌시키고 훈련시킨다. 이런 반복적인 세뇌와 학습을 통해 역사는 허튼 수작이고, 가정은 육체적, 심리.정신적으로 추악한 곳이라는 명제를 머릿속에 단단히 주입시킨다. 이것뿐이 아니다. 노쇠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노쇠에 따른 생리학적인 문제들을 제거함과 동시에 노인들의 정신적인 특징들마저도 제거함으로써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서조차도 해방에 이르게 된다. 이들에겐 그 어떤 걱정이나 근심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쾌락과 만족에 젖은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설령 이들에게 공포나 근심이 생긴다해도 환각제의 일종인 ‘소마’란 약을 통해 해결하면 그뿐이다. 약을 통해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고,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세상, 이 세상이 바로 유토피아인 것이고, 이런 멋진(?) 신세계가 있다는 것을 올더스 헉슬리는 이 책 《멋진 신세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옛날 인도의 카스트제도처럼 태어나자마자 계급으로 서열화되고, 맞춤형 인간으로 태어나 내 의지가 아닌 타자에 의해 통제받고 지배받는 세상이 정말 멋진 신세계인 것일까? 고통스러우면 소마란 약을 통해 그 고통을 지워버리고, 정신이 소마에 지배당하는 세상이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인 것일까? 책에서 야만인 존이 이렇게나 멋진 신세계를 버리고 다시금 원시지역으로 떠난 이유를 우리는 곰곰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처럼 타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삶보다는 내 의지대로, 내 생각대로 사는 삶이 진정한 신세계이자 유토피아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다시 미래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기로 하자. 만일 지금 이 소설을 다시 써야 한다면 나는 ‘야만인’에게 세 번째 선택권을 부여하고 싶다. 이상향적인 세계와 원시적인 세계라는 갈등의 두 갈래 사이에는 정신적으로 건전한 세계라는 또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이 가능성은 ‘멋진 신세계’로부터의 망명자들과 난민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보호 지역’의 경계선 내부에서 어느 정도 이미 현실화되었다.(본문 12쪽 머리글 中)


멋진 신세계를 꿈꾸었던 올더스 헉슬리의 신세계는 멋지지 않았다. 그가 묘사한 신세계는 우리 인간이 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이 적혀 있는 비문(祕文)처럼 느껴졌다. 그 비문을 그 누구도 열지 못하는 상자에 넣어서 영원히 잠자게 했으면 좋겠지만 그 언젠가는 인간이 열게 될 것이고, 그 상자는 판도라의 상자가 될 거라고 본다.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순간 올더스 헉슬리의 신세계(유토피아)가 우리 인간을 A.F.632년으로 안내할 것이다. 쾌락의 세계로 인도할 소마란 환각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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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16주년을 진심으로 축하, 알라딘으로 고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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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장정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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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한자성어 중에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란 말이 있다. 한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란 뜻인데 배우고 익히는 공부의 즐거움을 표현한 한자성어라 하겠다. 이렇게 말하면 공부하는데 있어서 즐거움이 어디 있고, 기쁨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본인을 포함해서), 모르는 것을 알았을 때의 기쁨을 생각한다면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공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대학교 졸업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해야 하는 게 공부란 걸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 배우고 익히는 것에 소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장정일의 공부》를 읽으면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장정일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치열함은 어렸을 적 방황했던 기억의 파편들과 그로 인해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자책감, 폭력으로 인해 교도소를 들어간 어린 소년의 공포심이 한데 어우러져 광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책 속에서 눈빛이 살아 있는 장정일을 보았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책 속에서 장정일의 치열함을 맛보았고, 그 치열함 속에서 알고자 하는, 꼭 알아서 자신이 과거에 진 빚을 갚고자 하는 굳은 의지에 찬 그의 눈빛을 보고야 말았다. 그 눈빛을 보면서 매서운 바람과 눈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설중매(雪中梅)가 작가 장정일과 여러모로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장정일의 공부》가 이번에 나온 책인 줄 알았는데 10년 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과 잘 어울리는 책이란 느낌이다. 장정일의 공부 스타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광범위하다고 말하고 싶다. 맹자의 성선설부터 조선의 역사와 유럽 여러나라들의 세계사, 대한민국의 근대문학과 모짜르트라는 천재적 음악가와 그 속에 감춰진 비밀들, 미국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그 괴물 속에 살아 숨쉬는 우파와 극우파에 대한 관계 등 인문학과 관계된 여러 분야의 공부 거리를 비교적 자세한 설명과 함께 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 뒤에는 장정일 본인이 읽었던 책이 소개된다. 책을 통해서 맹자를 공부하고, 책을 통해 미국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며, 책을 통해 대한민국 근대의 역사를 공부하는 그의 치열함이 이 책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이 책에 실힌 글들과 선택된 주제들은 2002년 대선 이후로, 한국 사회가 내게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해 보고자 했던 작은 결과물이다.

(책의 서문 中에서)


책 중간 정도를 읽다 보면 「나치 근대화론」이 나오는데 나치는 유태인을 미워했고, 유태인을 미워한 것과 똑같이 집시와 재즈를 미워했다고 한다. 집시들은 노동을 기피하는 반사회적인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재즈는 나치의 규율적이면서 질서정연함과는 다르게 파격적이고, 돌발적인 불협화음이 느슨하고 해이한 삶을 표현한다고 봤기에 미워했다는 나치의 논리가 대단히 아이러니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섭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규범화시키고, 획일화시키는 나치의 문화에서 예측 불가능하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인 유태인은 나치에겐 분명 눈엣가시였을 테고, 이 가시 같은 존재인 유태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이익을 채울 수 없다는 명분 아래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인용된 데틀레프 포이게르트가 쓴 〈나치 시대의 일상사〉란 책에서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중세적 야만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신체로서의 사회”를 “과학적”으로 재편하고 개선하려는 근대적 기획이 폭넓게 현실화된 것(211쪽)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폭력성과 야만성에 기인된 것이라는 내 생각과 정반대(나치의 야만성을 제대로 드러낸 사건)의 의견을 제시하는 데틀레프 포이게르트의 책이 순간 읽고 싶어졌다.


이 책 마지막에 실린 <장정일이 공부한 책 목록>을 읽으려면 장정일 작가처럼 평생을 공부해도 부족할 듯 싶다. 책들의 면면을 훑어봐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책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평생 공부하는 게 무지한 채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삶이라 생각하기에 알기 위해서라도 평생을 학이시습(學而時習)하면서 지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바람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공부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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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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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수명 100세 시대가 되어가는 시대에 잘 먹는 것(Well being)과 함께 이슈가 되는 것이 잘 죽는 것(Well dying)이다. 죽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암이나 다른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들이 한 평 남짓한 침대에서 그 병들과 사투하다 가는 그런 죽음이 아닌,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해 반추해보고 회상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세상과 작별인사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하고 싶은 일도 하면서 마지막을 함께 하는 그런 죽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마지막까지 병실 침대에 누워 진통제를 맞아가며 항암제와 싸우고, 최후엔 수술대에 올라 암이 완치되는 기적을 바라지만 그 바람은 모멸 차게 거절당하고 만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자신도 힘들었겠지만 그 과정을 지켜본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힐거라 생각한다. 이쯤에서 우리 모두 한 번쯤 불치병이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마지막까지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제목부터가 의미심장한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말 그대로 죽음에 관한 책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마지막에 가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진리 아닌 진리 속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죽어야 인간답게 죽는 것인가를 의사이자 사상가인 아툴 가완디를 통해 말하고 있는 책이다. 인간 모두가 결국에 가서는 죽음으로 귀결되는 이 세상에서 과연 아름답게 죽을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죽음에 있어서 아름답게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 사고사나 급작스런 죽음이 아닌 이상 죽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며, 아름답게 죽을 순 없지만 인간답게 죽을 순 있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고 있다. 마지막 죽을 때까지 의학적 기술에 맡겨져서 여기저기 이곳저곳을 수술용 매스로 난도질당하는 그런 죽음이 아닌 내 자신의 죽음을 내 스스로가 인정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때 비로소 그 죽음이 인간다워진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 암이 온 몸에 퍼져 가망이 없는데도 의학적 기술에 매달려서 공격적인 치료에 의존한 나머지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몸 상태로 산소호흡기에 의존에서 1년을 더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생각이 그렇다면 나는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가?다. 상상하기 싫지만 내가, 내 가족이, 내 사랑하는 사람이 회복불능의 암이나 불치병에 걸려 사경을 헤맨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결정하기가 힘들 듯 싶다. 의학의 손을 빌리면 살 수 있는 시간을 더 연장할 수 있고, 아픈 사람의 말을 듣자니 곧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서 내(보호자)가 내려야 할 선택이 무엇일지는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우리도 이제 죽음에 대해 논의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죽음에 임박했을 때 유언을 남기는 것도 좋지만 좀 더 폭넓게 생각해서 우리가 몸이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잘 죽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좀 더 인간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끔 죽음에 대한 계획표를 짜고, 그 계획표에 맞게 실천하는 것도 잘 죽기 위한 하나의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누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은 분명히 찾아온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선택은 바로 내 자신의 몫이라고 본다. 의료기술에 내 아픈 몸을 맡길 수 있고, 요양병원에서의 기계적인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 등으로 구성된 호스피스 케어를 받을 수도 있다. 이것도 싫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정에서의 돌봄을 받을 수도 있다. 인간답게 죽기 위해 위의 방법들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죽음에 대해 먼저 인정하는 용기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본다. 죽음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인정하는 치료를 한다면 이것 또한 잘못된 치료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아툴 가완디가 나이들어 병드는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했던 두 가지! 이 두가지 용기가 갖춰졌을 때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비로소 논의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는 적어도 두 가지 용기가 필요하다.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이는 무얼 두려워하고 무얼 희망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다. 그런 용기를 갖는 것만도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그 진실을 직면하기를 꺼린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용기가 있다. 바로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본문 355쪽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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