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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공부 -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는 삶을 위한 가장 평범하지만 가장 적극적인 투쟁
장정일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평점 :
내가 좋아하는 한자성어 중에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란 말이 있다. 한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란 뜻인데 배우고 익히는 공부의 즐거움을 표현한 한자성어라 하겠다. 이렇게 말하면 공부하는데 있어서 즐거움이 어디 있고, 기쁨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으나(본인을 포함해서), 모르는 것을 알았을 때의 기쁨을 생각한다면 배우고 익히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이다. 공부는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대학교 졸업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해야 하는 게 공부란 걸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 배우고 익히는 것에 소홀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다.
《장정일의 공부》를 읽으면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장정일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치열함은 어렸을 적 방황했던 기억의 파편들과 그로 인해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자책감, 폭력으로 인해 교도소를 들어간 어린 소년의 공포심이 한데 어우러져 광적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책 속에서 눈빛이 살아 있는 장정일을 보았다고 한다면 믿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분명 책 속에서 장정일의 치열함을 맛보았고, 그 치열함 속에서 알고자 하는, 꼭 알아서 자신이 과거에 진 빚을 갚고자 하는 굳은 의지에 찬 그의 눈빛을 보고야 말았다. 그 눈빛을 보면서 매서운 바람과 눈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설중매(雪中梅)가 작가 장정일과 여러모로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장정일의 공부》가 이번에 나온 책인 줄 알았는데 10년 전에 나온 책의 개정판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과 잘 어울리는 책이란 느낌이다. 장정일의 공부 스타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광범위하다고 말하고 싶다. 맹자의 성선설부터 조선의 역사와 유럽 여러나라들의 세계사, 대한민국의 근대문학과 모짜르트라는 천재적 음악가와 그 속에 감춰진 비밀들, 미국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그 괴물 속에 살아 숨쉬는 우파와 극우파에 대한 관계 등 인문학과 관계된 여러 분야의 공부 거리를 비교적 자세한 설명과 함께 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 뒤에는 장정일 본인이 읽었던 책이 소개된다. 책을 통해서 맹자를 공부하고, 책을 통해 미국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며, 책을 통해 대한민국 근대의 역사를 공부하는 그의 치열함이 이 책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공부 가운데 최상의 공부는 무지를 참을 수 없는 자발적인 욕구와 앎의 필요를 느껴서 하는 공부다. 이 책에 실힌 글들과 선택된 주제들은 2002년 대선 이후로, 한국 사회가 내게 불러일으킨 궁금증을 해소해 보고자 했던 작은 결과물이다.
(책의 서문 中에서)
책 중간 정도를 읽다 보면 「나치 근대화론」이 나오는데 나치는 유태인을 미워했고, 유태인을 미워한 것과 똑같이 집시와 재즈를 미워했다고 한다. 집시들은 노동을 기피하는 반사회적인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고, 재즈는 나치의 규율적이면서 질서정연함과는 다르게 파격적이고, 돌발적인 불협화음이 느슨하고 해이한 삶을 표현한다고 봤기에 미워했다는 나치의 논리가 대단히 아이러니하면서 한편으로는 무섭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규범화시키고, 획일화시키는 나치의 문화에서 예측 불가능하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인 유태인은 나치에겐 분명 눈엣가시였을 테고, 이 가시 같은 존재인 유태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이익을 채울 수 없다는 명분 아래 홀로코스트를 자행했다고 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인용된 데틀레프 포이게르트가 쓴 〈나치 시대의 일상사〉란 책에서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중세적 야만성”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신체로서의 사회”를 “과학적”으로 재편하고 개선하려는 근대적 기획이 폭넓게 현실화된 것(211쪽)이라는 해석을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폭력성과 야만성에 기인된 것이라는 내 생각과 정반대(나치의 야만성을 제대로 드러낸 사건)의 의견을 제시하는 데틀레프 포이게르트의 책이 순간 읽고 싶어졌다.
이 책 마지막에 실린 <장정일이 공부한 책 목록>을 읽으려면 장정일 작가처럼 평생을 공부해도 부족할 듯 싶다. 책들의 면면을 훑어봐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책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평생 공부하는 게 무지한 채 지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삶이라 생각하기에 알기 위해서라도 평생을 학이시습(學而時習)하면서 지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바람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공부가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