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읽는 서양 철학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철학
양승권 지음 / 페이퍼로드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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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사회과학 과목을 참 좋아했는데 성적은 별로였다. 교과서를 '교과서'로 본 게 아니라서 좋았고 철학과 역사 공부를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는 교과서 밖의 이야기들은 더 재미있었다. 그러나 시험 볼 때는 오지선다형 문제의 보기가 다 고만고만 비슷해 보였는지 시험 점수는 그저 그랬다. 좋아하는 건 뚝심있게 해내는 성격 탓에 역사와 철학 시험 성적이 어떻든 점수가 좋지 않았어도, 나는 그 과목들을 꿋꿋하게 좋아했다. 학교를 졸업하고나서 깨닫게 된 건 학창시절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철학과 역사 교과서가 동종 인문학서와 비교하면 정말 재미없다는 거다. 재미있는 철학책과 역사책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지! 하나씩 찾아 읽는 게 너무나 즐겁다. 최근 읽었던 철학책 중 가장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철학책 <하룻밤에 읽는 서양 철학>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철학책 추천 <하룻밤에 읽는 서양 철학>은 <니체와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로 철학 '덕후'들의 애정 어린 눈도장을 받은 철학자 양승권이 쓴 '하룻밤' 시리즈의 철학책이다. 수천 년의 역사 속 철학자들을 조망해 흥미로운 그들의 일화를 생생하게 담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술술 읽힐 만큼 쉽고 재미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이 ‘무지에 대한 지’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기본 전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자신의 무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알아낼 자격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과 토론할 때 우선 자신의 의견을 보류하고, 상대의 견해로 들어가 그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유도했다. 끊임없는 반문을 통해 상대방을 모순에 휘말리게 함으로써 상대방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만든 것이다.

<하룻밤에 읽는 서양 철학> p.59



아우렐리우스가 볼 때 정념을 유발하는 것은 우리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다. 늙음 자체가 우리에게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늙음을 악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태도로 인해 불안에 떠는 것이다. 늙음은 필연적으로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죽음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인생에서 아직 육신이 굴복하지 않고 있는데 영혼이 먼저 굴복한다는 것은 치욕이다. 만약 신이 나에게 가난을 예정해 놓았다면, 가난 역시 반드시 닥치게 되어 있다. 이것들은 결정된 것이다. 우리는 가까운 길을 가야만 한다. 가까운 길이란 곧 자연에 순응하는 길이다. 늘 유유자적하게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룻밤에 읽는 서양 철학>  p.165



로마 제국 16대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의 대표 철학자 중 한 명인 아우렐리우스 따르면 인생은 하나의 연극이고, 연극의 무대는 이 우주 전체라고 한다. '나'의 역할은 이미 결정되었고, 설혹 자신의 삶이 비극이더라도 그 비극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자신의 삶에 불만을 표하고 푸념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아우렐리우스의 이야기는 20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탈레스, 소크라테스, 플라톤, 들뢰즈 등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외우고, 오지선다형 문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는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했는지를 거인의 어깨 너머로 배워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철학은 우리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준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말해보자면 제대로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은 불행과 위기의 순간에 더 빛을 발했다. 고통의 순간에 불행에 잠식당하지 않고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고통이나 분노의 감정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승화시킬 수 있도록 나를 다독여주었다. 철학책 <하룻밤에 읽는 서양 철학>에는 수많은 철학자와 그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그중 누구의 생각이 가장 진리에 가까운지, 누가 가장 현명한지는 아무도 알지 못할 테지만 이 책 속에서 당신 인생의 멘토 한 명쯤은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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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읽는 동양 철학 페이퍼로드 하룻밤에 읽는 철학
양승권 지음 / 페이퍼로드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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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라고 하면 소크라테스, 플라톤 같은 서양 철학자의 이름부터 떠올리게 된다. 또 동양 철학하면, 중국의 공자나 도가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공자를 필두로 조선의 대표 실학자 정약용까지 철학책 <하룻밤에 읽는 동양 철학>으로 어쩌면 우리에게 홀대받아온 동양 철학가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유가, 도가, 묵가, 법가를 위시한 중국의 철학과 인도의 종교이자 철학이라고 볼 수 있는 불교, 신유교, 일본 철학, 한국 철학까지 동양 철학을 총망라한 철학책 <하룻밤에 읽는 동양 철학>이다. 



 



인仁은 사람 ‘인人’과 숫자 두 ‘이二’가 합쳐진 한자어다. 즉, 사람 둘이 있다는 의미다. 이 글자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드러낸다. 사람 사이의 양상을 떠올리면 부부·친구·윗사람 혹은 아랫사람 등 숱한 관계가 있다. 부모와 자식을 제외하고 가장 순수한 관계는 남여 사이일 것이다. 인은 마치 남녀 사이처럼 이해를 따지지 않고 관계를 확산시키자는 의미다. “사람을 사랑한다.”라는 공자의 말에는 혈족에 얽매인 사랑을 뛰어넘는 사회적 개방성이 내포되어 있다. 공자 이전에는 교육이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들로만 국한되었기에 개방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공자가 마련한 사적 교육 기관은 국가 교육 기관과 달리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기에 훨씬 좋은 조건이었다.

<하룻밤에 읽는 동양 철학> 중에서





중국의 대표적 철학 사상 중 하나인 유고에서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으로 삼는 것이 바로 '인(仁)'이다. 수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을 지배해온 철학 사상이며 공자의 사후 그의 제자들이 수집하고 펴낸 언행록 <논어>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다. 유고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어 술술 읽힌다.



장자는 정치를 혐오했으며, 세상과도 거리를 두었다. 세상에 대한 장자의 참여는 본래의 성향을 그대로 표출할 수 있는 범위 내로만 한정된 것이었다. 장자는 인위적인 압박감을 동반한 화려한 삶을 선택하기보다는, 소박하더라도 자연 그대로 ‘노니는 것’, 유遊를 선택한다. 사람을 마치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듯이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우리는 폭포나 바다를 볼 때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거기에 자기만의 가치관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법가는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과 미래를 중시했다. 그리고 최고 통치자에게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고 새로운 방식의 정책 대응을 할 것을 강조했다. 천하를 다스리는 원리에 대해, 유가가 인·의·예와 같은 덕치주의가 근본이라고 주장했음에 비래, 법가는 엄격한 법치주의가 근본이라고 주장했다.

<하룻밤에 읽는 동양 철학> 중에서





동양 철학은 나무를 자세히 보도록 도와주는 미시적 관점과 널리 숲도 잘 보게 해주는 거시적 관점을 모두 일깨워준다. 숲을 보며 우주의 섭리를 생각하도록 하면서 숲속의 나무를 보며 인생을 생각하도록 도와 세상의 부분과 전체를 아울러 볼 수 있도록 해준다. 이쪽과 저쪽을 아울러 보는 균형 감각은 디지털 사이언스 시대에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여러 상반된 영역을 넘나드는 데 별 어려움 없이 균형 감각이 뛰어난 인재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간상으로 이는 바로 동양 철학에서 중시하는 인간형과 동일하다. 철학책 <하룻밤에 읽는 동양 철학>을 읽으며 각각의 동양 철학에서 추구하는 여러 인간형 가운데 멘토로 삼을만한 삶의 안내자를 만나보면 어떨까!





며칠 전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른 정보라의 <저주 토끼>를 재미있게 읽었다. 그중 '안녕, 내 사랑'이라는 단편에서 AI 로봇이 자신을 처분하려는 자신의 주인을 살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철학'이 부재한 디지털 사이언스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해준다고 해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며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철학'이 없다면 무소용하다. 진리를 탐구하며, 진리에 부합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를 고민해 지혜로운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은 시대가 얼마나 변하건 간에 시공을 초월해 불변하는 최고 가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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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 - 경이롭고 감동적인 동물과 과학 연구 노트
장구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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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는 클라스'와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에 출연해 동물과 과학 특강을 진행했던 서울대 수의학과 장구 교수의 동물 과학 에세이 <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를 읽었다. 사실 나는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길에서 강아지를 만나면 보고 반가워하는 아이들과 달리 입마개를 했는지부터 살피고 아이들에게 길 한쪽으로 피하게 하거나 막내를 안아올리기 바쁘다. 어디선가 고양이 링웜 사진을 보고 나서부터 고양이는 더욱더 기피 대상이 되었다. 그런 나에게, 동물의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는 걸 동물 과학책 <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는 많은 것을 일깨워주었다. 당뇨병 치료제 개발에 큰 도움을 준 개, 시험관 아기 탄생의 밑거름이 된 쥐 등 과학의 발달에 물심양면(?)으로(자의는 아닐지라도) 도움이 되어준 연구실의 동물들이 있다는 걸 말이다. 



 

동물 과학책 <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세상을 바꾼 동물학자의 연구실에 숨은 주역으로서 동물의 흔적들을 더듬어본다.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개, 인류에게 최초의 백신을 선물한 소, 질병 연구 모델이 되어준 낙타, 신약 개발에 임상실험 대상으로 큰 역할을 했던 원숭이 등 실험동물의 희생 덕분에 우리는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다. 과학 연구실의 숨은 주역인 동물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게 한다. 2부는 세상을 바꿀 동물학자의 연구실로 자리를 옮긴다. 세계 최초로 사람에게 돼지 심장을 이식하는 수술이 성공한 이야기가 함께 펼쳐진다. 3부에는 수의사로서 저자가 만났던 반려동물과 반려동물의 보호자와의 감동어린 이야기가 담겼다. 



우리는 인슐린뿐 아니라 많은 질병 치료제를 개와 소, 돼지 등 동물들로부터 얻어왔습니다. 또 역사적으로 인류는 많은 동물 유래 단백질을 이용하면서 발전해 왔기 때문에, 동물의 질병 발생을 관찰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대단히 많습니다. 따라서 동물을 보살피고 그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단순한 동물 치료를 넘어서, 사람의 질병 치료와 예방을 위한 자료로도 쓰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장은 사람의 치료와 관련이 없어 보여도 관심을 가지고 꾸준히 연구할 필요가 있는 이유입니다.

 <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 중에서


과학기술 선진국으로서 우리나라는 생명과학 분야에서도 놀라운 연구 결과들을 내왔지만, 유전자 변형 생물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으로 인해 산업화가 승인된 사례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같은 기술을 이용해 만들어진 항체 치료제, 바이러스 치료제, 유전자 변형 세포 치료제 등 다양한 단백질 의약품에 대해서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죠. 최근에는 외부 유전자를 도입하지 않고도 우리가 원하는 특성을 가진 동물과 식물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많은 국가가 관련 제도를 다시 정비했습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이미 제도를 완비했고, 2021년 가장 먼저 제품(토마토 및 참돔)을 출시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하루빨리 새로운 규정을 만들고 인식의 폭을 넓혀야 할 것 같습니다.

<동물을 돌보고 연구합니다> 중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꾼 과학 이면에 숨은 주역, 실험동물들. 하지만 여기에 윤리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첨단과학 기술의 발달에 불가피한 동물 실험은 놀라운 연구 결과들을 냈지만 동물을 실험 대상으로 쓴다는 것 자체로 부정적인 시선이 뒤따른다. 실험동물의 수를 줄이고, 가급적 동물을 이용하지 않는 다른 실험으로 대체하며 실험 현장에서 동물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는 대목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모든 생명은 같은 무게를 가지고 동일한 가치가 있다. 동물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주변에 있는 다양한 동물의 존재와 그들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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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주성철 지음 / 김영사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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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세이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가 나의 젊은 시절을 소환해 준 덕분에 며칠 동안 행복했지만 또 슬프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참 행복했다. 홍콩에서 느꼈던 행복감을 다시 떠올리니 지금의 나도 따라 행복해지는 것 같았지만 이내 슬퍼졌다. 언제고 다시 홍콩을 찾을 수는 있겠지. 그러나 그때 그 시절로는 돌아갈 수는 없겠지. 새벽 1시 뜨겁던 란콰이퐁의 클럽 거리, 끝없이 길게 이어지던 미들 레벨 에스컬레이터 위에 올랐을 때의 근사함, 아쿠아 루나에서 바라보던 화려한 심포니 오브 라이츠, 빅토리아 피크에서 맞던 서늘한 여름 바람. 홍콩의 그 시간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헤어진 이도, 잃어버린 나 자신도 홍콩에서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을 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한때 홍콩을, 홍콩 영화를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결코 놓쳐서는 안 될 여행에세이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를 소개한다. 이 여행책으로 추억을 더듬어보길!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는 '홍콩' 그리고 '홍콩 영화'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영화평론가 주성철의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의 개정판이다. 홍콩에 갈 때면 늘 찾던 이곳저곳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 천천히 홍콩을 거니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안부를 건네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 홍콩 여행책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는 코즈웨이베이, 센트럴, 셩완, 애드미럴티 등 아무 곳이나 내가 원하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이 여행책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자유롭게 맥주를 마시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내고 싶어 캔맥주를 따게 됐다. 맥주 한 캔과 홍콩 여행책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이 주는 행복이라니 :) 오래도록 열어보지 않았던 여행 폴더도 열어 홍콩의 사진들을 보며 아련한 추억에 젖었다.



 


여행 에세이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의 저자는 홍콩 영화에 빠져 홍콩 여행까지 떠나게 되었는데 나는 그 반대의 경우다. 휴가차 떠난 홍콩의 매력에 흠뻑 빠진 뒤부터 홍콩 영화들을 하나둘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홍콩의 거리, 음식점, 카페 들을 영화 속 장면으로 만나면 또 감회가 새로웠다. 당장이라도 홍콩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을 홍콩 영화로 꾹꾹 눌렀다. 





<중경삼림>의 모든 주인공들은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만우절의 이별 통보가 거짓말이길 바라며 "내 사랑의 유통기한을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는 경찰223(금성무)은 허탈한 마음에 자정이 지나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를 막 뛰어오른다. 매일 고단한 하루를 살아가며 술에 의지하는 금발머리 마약밀매상(임청하), 여자친구가 남긴 이별 편지를 외면하며 매일 똑같은 곳을 순찰하는 경찰 663(양조위), 경찰 663의 단골 식당에서 이라며 그의 맨션 열쇠를 손에 쥔 페이(왕정문) 모두 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치는 인연을 반복한다.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p.87



 


 

홍콩의 미드 레벨 에스컬레이터는 세계 최장 에스컬레이터로 800미터에 달한다.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건물과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곳은 많은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했지만 그중에서 영화 <중경삼림>은 빼놓을 수가 없다. 아쉽게도 <중경삼림>에 나오는 양조위의 집이나 코크레인 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미들 레벨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왕정문처럼 각양각색의 건물을 구경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하다. 설렘에 가득 차 마음에 드는 음식점이나 카페, 바를 발견하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달려가곤 했던 그 시절이 그립다. 린드허스트 테라스에 가면 늘 들렀던 타이청 베이커리 에그 타르트도 그립다.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다. 주윤발, 장만옥, 유덕화 등 내가 애정하는 배우들은 그야말로 추억의 배우들이 돼 버렸고 골드미스로 평생 자유롭게 살 줄 알았던 나도 세 아이의 엄마가 됐다. 언젠가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 책 한 권을 들고 홍콩 영화의 흔적을, 그리고 그들에 열광하던 젊은 시절의 나를 만나러 가고 싶다. 내가 가장 만나고 싶은 '헤어진 이'는 다름 아닌 홍콩과 홍콩 영화에 열광하던 나의 젊은 시절이라는 걸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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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머시기 - 이어령의 말의 힘, 글의 힘, 책의 힘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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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 소통할 때 나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 마음을 표현하기에 '언어'라는 그릇이 작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단어들을 골라보지만 가끔 언어로는 내 마음을 다 담아내지 못할 때가 있고 또 그로 인해 오해가 빚어지는 경우도 많다. 언어의 부족함이 만들어내는 불통과 오해 사이에서 '거시기'나 '머시기'라는 무한한 확장의 언어는 얼마나 근사한지! 무엇이라 단정짓기는 좀 애매하지만 말하는 이나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력과 상상력, 공감력까지 무한히 끌어올리는 환상적인 언어다. <거시기 머시기>라는 근사한 제목의 이 책은 그 이름 자체가 그의 정의이자 수식어인 '이어령' 선생이 여덟 곳에서 했던 강연의 내용이 담겼다. 책의 부제로도 알 수 있듯이 이어령이 80년 동안 읽고, 쓰고, 발화한 그 모든 행위가 담긴 책이다.





이미 알고 있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을 나타내는 주어가 ‘거시기’이고 언어로는 줄 긋기 어려운 삶의 의미를 횡단하는 행위의 술어가 ‘머시기’다. (...) ‘거시기 머시기’나 ‘카오스모스’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암호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생각 장치라 할 수 있다.

<거시기 머시기> p.9


그의 생명은 이미 스러졌지만 그가 지녔던 말의 힘, 글의 힘은 더 큰 힘과 빛을 발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더 그럴 것이다. 사실 <거시기 머시기>를 편집하던 중 이어령 선생이 영면에 들게 되어 책의 머리말을 쓰지 못하셨지만 201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주제 강연인 '집단 기억의 잔치 카오스모스의 세상'을 머리말 대신 실었다고 한다. 편집자의 후기가 아니었더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책의 전체적인 내용과 머리글이 절 어우러졌다.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의 언어인 거시기와 머시기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태까지 껴안는다.이미 알고 있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을 나타내는 주어가 거시기이고 언어로는 줄 긋이 어려운 삶의 의미를 횡단하는 행위의 술어가 머시기라고 정의했다. 더 나아가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암호이자 그것을 실행하는 생각 장치라고 했다. 




이 세상에는 똑같이 생긴 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벽돌 하나가 부서지면 규격이 같은 다른 벽돌로 갈아 끼울 수 있지만 돌 하나가 깨지면 그 자리만큼 지구는 비어 있게 됩니다.(...)

어느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세계를 노래하는 것이 시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 법, 경제에서는 ‘베스트 원’을 추구하지만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서는 ‘온리 원’을 지향합니다. 장미를 맨 먼저 미녀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이지만 그것을 두 번째 말한 사람은 바보입니다

<거시기 머시기> p.18


언어의 세계에는 인간의 창조적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절대 변화가 불가능한 자연법칙이 아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언어의 세계 속에서 나의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word’로 ‘world’를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희망이 넘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거시기 머시기> p.180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이어령 선생이 언급한 word가 world를 바꾸는 것을 증명하는 대사가 나온다. 구씨와 미정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가짜로 해도 채워지나? 이쁘다, 멋지다. 아무 말이나 막할 수 있잖아?"라는 구씨의 말에 미정이 답한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해봐요, 한번. 아무 말이나."라고 대답한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되버리는 것, 절대 변화가 불가능한 자연법칙이 아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언어의 세계 속에서 얼마든지 나의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자랑과 희망을 품어도 된다고 타일러준다. 책의 힘, 말의 힘, 글의 힘을 믿자. 80년 동안 이어령 선생 그 자체와 그가 남긴 글, 말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낸 책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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