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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기 머시기 - 이어령의 말의 힘, 글의 힘, 책의 힘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4월
평점 :

타인과 소통할 때 나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 마음을 표현하기에 '언어'라는 그릇이 작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가장 가까운 단어들을 골라보지만 가끔 언어로는 내 마음을 다 담아내지 못할 때가 있고 또 그로 인해 오해가 빚어지는 경우도 많다. 언어의 부족함이 만들어내는 불통과 오해 사이에서 '거시기'나 '머시기'라는 무한한 확장의 언어는 얼마나 근사한지! 무엇이라 단정짓기는 좀 애매하지만 말하는 이나 듣는 이로 하여금 이해력과 상상력, 공감력까지 무한히 끌어올리는 환상적인 언어다. <거시기 머시기>라는 근사한 제목의 이 책은 그 이름 자체가 그의 정의이자 수식어인 '이어령' 선생이 여덟 곳에서 했던 강연의 내용이 담겼다. 책의 부제로도 알 수 있듯이 이어령이 80년 동안 읽고, 쓰고, 발화한 그 모든 행위가 담긴 책이다.
이미 알고 있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을 나타내는 주어가 ‘거시기’이고 언어로는 줄 긋기 어려운 삶의 의미를 횡단하는 행위의 술어가 ‘머시기’다. (...) ‘거시기 머시기’나 ‘카오스모스’는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암호이고 그것을 실행하는 생각 장치라 할 수 있다.
<거시기 머시기> p.9
그의 생명은 이미 스러졌지만 그가 지녔던 말의 힘, 글의 힘은 더 큰 힘과 빛을 발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더 그럴 것이다. 사실 <거시기 머시기>를 편집하던 중 이어령 선생이 영면에 들게 되어 책의 머리말을 쓰지 못하셨지만 2013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주제 강연인 '집단 기억의 잔치 카오스모스의 세상'을 머리말 대신 실었다고 한다. 편집자의 후기가 아니었더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책의 전체적인 내용과 머리글이 절 어우러졌다.
언어적 소통과 비언어적 소통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곡예의 언어인 거시기와 머시기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태까지 껴안는다.이미 알고 있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때 그 답답함을 나타내는 주어가 거시기이고 언어로는 줄 긋이 어려운 삶의 의미를 횡단하는 행위의 술어가 머시기라고 정의했다. 더 나아가 절대적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암호이자 그것을 실행하는 생각 장치라고 했다.
이 세상에는 똑같이 생긴 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벽돌 하나가 부서지면 규격이 같은 다른 벽돌로 갈아 끼울 수 있지만 돌 하나가 깨지면 그 자리만큼 지구는 비어 있게 됩니다.(...)
어느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세계를 노래하는 것이 시요,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 법, 경제에서는 ‘베스트 원’을 추구하지만 문학과 예술의 세계에서는 ‘온리 원’을 지향합니다. 장미를 맨 먼저 미녀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이지만 그것을 두 번째 말한 사람은 바보입니다
<거시기 머시기> p.18
언어의 세계에는 인간의 창조적 의지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요. 절대 변화가 불가능한 자연법칙이 아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언어의 세계 속에서 나의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word’로 ‘world’를 바꿀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희망이 넘치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거시기 머시기> p.180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이어령 선생이 언급한 word가 world를 바꾸는 것을 증명하는 대사가 나온다. 구씨와 미정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가짜로 해도 채워지나? 이쁘다, 멋지다. 아무 말이나 막할 수 있잖아?"라는 구씨의 말에 미정이 답한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될텐데? 모든 말이 그렇던데. 해봐요, 한번. 아무 말이나."라고 대답한다. 말하는 순간 진짜가 되버리는 것, 절대 변화가 불가능한 자연법칙이 아닌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언어의 세계 속에서 얼마든지 나의 삶을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자랑과 희망을 품어도 된다고 타일러준다. 책의 힘, 말의 힘, 글의 힘을 믿자. 80년 동안 이어령 선생 그 자체와 그가 남긴 글, 말 그리고 그것들을 엮어낸 책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