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여지
마보융 지음, 임주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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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가 여지를 좋아해 먼 남쪽 지방에서 수천 리를 달려 신선한 과일을 진상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익숙한 일화다. 마보융의 소설 <장안의 여지>는 이 익숙한 역사적 사실 뒤에 가려진 이름 없는 개인들의 피땀 어린 사투를 그린 소설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백미는 역사적 큰 틀은 사실로 유지하면서, 그 틈새에 허구의 인물을 배치해 극적인 생동감을 불어넣었다는 점이다. 작가 마보융이 소설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은 '큰 사건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고, 작은 일은 역사에 구애받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는 엄격한 사료 검증을 거친 역사적 골조 위에, 기록이 부족한 역사의 여백을 상상력으로 자유롭게 채워넣었다.



나는 이 책을 조금 특별한 마음으로 읽었다. 사실 이 책은 한때 내가 직접 기획했던 작품이기도 하다. 마보융의 신작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아래 깔린 개인의 애환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에 매료되어 기획서를 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출판사 내부 사정으로 기획서는 통과되지 못했고, 이후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반가움과 기쁨이 함께 밀려왔다. 내가 끝내 번역을 맡은 것도 아니고,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함께한 것도 아니지만, 이 작품이 지닌 이야기의 힘만큼은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안의 여지>가 더 많은 독자에게 가닿았으면 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장안의 여지>는 당 현종 천보 연간을 배경으로 한다. 대출을 받아  장안성 귀의방에서 간신히 집 한 채를 마련한 상림서 소속 종9품하의 관리 이선덕은 뜻밖에도 "여지사"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양귀비의 생일인 6월 1일까지 영남의 신선한 생여지를 장안까지 운송하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였다.



주인공 이선덕은 허구의 인물로 설정되었지만, 소설 속 배경과 사건, 주변 인물 대부분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다. 귀의방과 평강방 같은 지명은 물론, 당시 장안의 부동산 시세와 절에서 향적전 대출을 받던 금융 시스템까지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한다. 





영남과 장안의 거리는 무려 5,447리, 약 2,139km에 이르며, 아무리 빨리 달려도 최소 11일이 걸린다. 그러나 "가지에서 꺾은 여지는 하루면 색이 변하고, 사흘이면 맛이 변한다"고 기록되었을 만큼 여지는 쉽게 상하는 과일이다. 과연 이선덕은 이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를 완수하고 여지를 장안까지 가져올 수 있을까?



이선덕은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그는 영남으로 내려가 직접 재배지를 둘러보며 방법을 찾는다. 지역 수장은 등을 돌리고, 하급 관리는 그의 실패를 기회로 삼으려 한다. 배신과 기만 속에서 그가 붙잡은 것은 여지 농장 사람들이 건넨 뜻밖의 호의였다. "우리는 다르지 않다. 모두 좋은 벗이다"라는 그의 말은 힘없는 이들끼리 나누는 온기이기에 더욱 애틋하다.



생여지 두 단지를 장안으로 보내기 위해 20년 동안 자란 여지나무 수십 그루가 도끼에 베이고, 말들이 쓰러졌으며, 사람마저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여지를 맛본 귀비의 미소로 끝나는 이 여정에서 정작 온몸으로 고난을 감당한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다.



마보융은 "여지를 좋아했던 양귀비를 위해 신선한 여지를 진상했다"는 역사서의 한 문장 뒤에 가려진 사람들을 불러낸다. 기록되지 않은 삶, 성취라는 결과 아래 짓밟힌 개인들, 웅장하고 화려했던 당나라 제국의 이면에 숨겨진 백성들의 피눈물까지 조명한다. 결국 이 소설은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말단 관리의 생존기이자,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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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날레 - 끝까지 강하고 자유로운 나
수전 구바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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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여성의 삶을 떠올릴 때 우리가 그리는 이미지는 대개 무해하고 귀여운 할머니이거나, 돌봄이 필요한 쇠약한 존재가 아닐까. 에드워드 사이드가 명명한 남성 거장들의 <말년의 양식>은 널리 연구되고 칭송받아 왔다. 반면 여성 예술가들의 노년은 제대로 기록조차 남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젊은 남성을 표준으로 삼는 사회에서 늙은 여성은 가장자리 중에서도 가장자리로 밀려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수전 구바는 삶의 종반부에 접어든 여성들이 어떻게 자신만의 창조성을 끝까지 피워냈는지 집요하게 탐구하며 <피날레: 끝까지 강하고 자유로운 나>를 써냈다.





저자는 2008년, 예순셋의 나이에 난소암 진단을 받고 길어야 5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 예상을 넘어 살아남았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이 다시 얻은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으려 할 때, 그 시선은 어디로 향하는가. 저자의 시선은 자신보다 앞서 노년을 살아낸 여성 예술가들에게 향했다.





이 책은 총 3부에 걸쳐 9명의 위대한 여성 예술가를 조명한다. 그들은 노년을 단순한 쇠락의 시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삶의 후반부에 이르러 더욱 선명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조지 엘리엇, 콜레트, 조지아 오키프, 이자크 디네센, 메리앤 무어, 루이즈 부르주아, 메리 루 윌리엄스, 그웬돌린 브룩스, 캐서린 던햄은 각자의 방식으로 노년을 통과했다. 그들은 연인이었고, 이단아였으며, 현자였다. 무엇보다 자기 삶의 마지막 장면을 남이 정해준 방식대로 살아내지 않았다.






책 속 콜레트의 말 역시 오래 남는다. 그는 사랑이 결코 나이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아무리 늙더라도 사랑을 잊지 않고, 사랑에 관해 생각하고 말하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태도는 단순한 낭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있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우리를 초대한 '리틀 올드 레이디 랜드'는 결코 서글픈 곳이 아니다. 그곳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맹렬한 기개로 삶의 마지막 장까지 온전히 채워 살아낸 강하고 자유로운 여성들의 영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노년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달라진다. 노년이 우리 모두의 현재이자 미래라면, 이 책은 그 미래를 두려움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바라보게 한다. 





592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지만, 한 인물 한 인물의 삶이 독립된 이야기처럼 읽히기에 부담스럽지 않다. 이 책은 주름진 손과 쇠락해가는 육체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내면의 불꽃을 끝내 발견하게 만든다. 책장을 덮고 나니, 언젠가 맞이하게 될 나의 피날레가 조금은 기대되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책 #피날레 #피날레_끝까지강하고자유로운나 #수전구바 #북하우스  #신간도서 #이달의도서 #북하우스 #페미니즘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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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류 오늘의 젊은 작가 40
정대건 지음 / 민음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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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담은 한 소년과 자꾸만 눈이 마주쳤다. 진평강에 열을 식히러 온 사람들 사이에서 한눈에 도담의 눈길을 끄는 소년이 있었다. 낯선 얼굴. 하얀 피부에 잡티도 없이 매끈한 몸. 세상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품은 듯한 크고 맑은 눈동자. 도담은 소년을 빤히 바라봤다. 시선을 느꼈는지 소년도 도담을 물끄러미 건너다봤다. 무안해진 도담은 뭘 보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눈싸움에서 진 소년은 도망치듯 물로 들어가 버렸다.

p.15


소설의 시작은 한 편의 눈부신 청춘물처럼 펼쳐진다. 수영에 자신 있던 도담은 진평강에서 물에 빠질 위기에 처한 낯선 소년 해솔을 구하기 위해 거침없이 뛰어든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우연을 계기로 점차 비밀 없는 관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잔잔하고 평화로울 것만 같던 첫사랑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발생한 균열로 인해 산산조각 난다. 해솔의 엄마와 도담의 아빠 사이에 드러난 불륜 정황, 그리고 이를 함께 추적하던 어느 밤 폭우로 물이 불어난 계곡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고는 두 아이의 삶을 완전히 뒤흔든다. 오직 서로가 전부였던 두 사람은 이 예기치 못한 급류에 휩쓸려 전혀 다른 궤도로 튕겨 나간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 걸까. 물에 빠지다. 늪에 빠지다. 함정에 빠지다. 절망에 빠지다. 빠진다는 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p.100


도담과 해솔은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존재였지만, 동시에 가장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사건은 단순한 비극에 그치지 않고 이후의 삶 전체를 바꾸어 놓는 거대한 물살이 된다. 도담은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해솔은 죄책감과 상실감 속에서 계속 흔들린다. 두 사람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지만, 재회가 곧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도담에게 사랑은 급류와 같은 위험한 이름이었다. 휩쓸려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 발가벗은 시체로 떠오르는 것, 다슬기가 온몸을 뒤덮는 것이다. 더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p.130



두 사람은 다시 연인이 되지만, 이들의 사랑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그것이 죄책감인지 진정한 사랑인지 분명히 구분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날 밤의 기억이 반복해서 떠오른다. 



소설은 같은 상처를 지닌 두 사람이 그 상처를 어떻게 다르게 통과하는지, 그리고 같은 자리에 다시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헤엄이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급류>가 그려 내는 사랑은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하나의 결정체가 아니라, 오랜 시간 여러 감정이 쌓여 형성된 퇴적암에 가깝다. 배신감, 미안함, 원망, 끝없는 애처로움이 오랜 시간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감정 역시 훌륭하고 단단한 사랑이 될 수 있음을 이 소설은 증명해 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에서 지옥 같았던 과거를 떠올리면서도 끝내 손을 놓지 않고, 기꺼이 상대의 지옥을 함께 짊어지기로 선택한다.



해솔과 얽힌 사연 때문에 연상되는 슬픔. 같은 상처를 가진 동질감. 연민이다. 우리가 보통 지독한 인연은 아니지. 해솔과의 재회에 운명 같은 단어가 연상되는 건 우연에도 인과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의 습성 때문이다. 추억 때문이다. 좋았던 날들에 대한 반가움과 지나가 버린 한때에 대한 슬픔일 수도. 이성에 대한 열정? 호르몬 작용은 진작 끝났다. 소식이 궁금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걱정하고 애타게 보고 싶은 마음. 꽉 끌어안고 안기고 싶은 마음. 그런 때도 분명히 있었다. 마음의 불씨는 전부 사그라져 버렸다. 완전한 전소. 남은 거라고는 그을린 시커먼 자국과 탄내 가득한 폐허.

p.226



<급류> 속 사랑은 순수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오히려 의심과 원망, 죄책감과 연민이 뒤섞여 있어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마음이 언제나 깨끗한 하나의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소설은 복잡한 마음들을 억지로 정리하지 않는다. 대신 사랑이라는 단어 안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함께 흐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과거의 물살에 휩쓸렸던 사람도 다시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이 반드시 구원이 아니더라도 삶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조용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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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만날까 이야기친구
최영희 지음, 곽수진 그림 / 창비교육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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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구들, 겨울방학 잘 보내고 있나요? 오늘은 추운 겨울방학에 읽기 좋은 SF동화 <우리 만날까>를 소개해볼게요! :) 이 책에는 여섯 편의 SF 동화가 실렸는데요,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이제 아이가 초등 고학년이 되다 보니 마냥 쉬운 그림책은 시시해하고, 그렇다고 어른들 소설은 너무 어려워해서 책 고르기가 참 쉽지 않더라고요. 이 책은 짧은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아직 긴 장편 소설을 읽기 부담스러워하는 아이들도 한 편씩 끊어서 읽을 수 있어서 '완독의 기쁨'을 맛보기에 아주 딱이더라고요.


이 책은 단순히 로봇이 나오고 우주선이 날아다니는 뻔한 공상과학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따뜻하고 다정한 시선으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나무, 로봇, 땅, 문어, 외계 생명체까지 우리가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요. 아이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혀주고 다른 존재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워줄 수 있겠죠!


책에 실린 이야기 몇 가지만 살펴볼게요. 첫 번째 이야기 '걷는 나무 목격자 진술 녹취록'에서는 지구의 사막화를 막기 위해 미래에서 왔지만 인간이 놓은 덫에 끼어 위험에 처한 걷는 나무가 등장합니다. "진짜로 본 거 맞다니까요. 제가 왜 거짓말을 해요?"라는 주인공 강뉴원의 절박한 외침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학원을 땡땡이치고 길고양이를 보러 간 평범한 중학생이 시간을 넘어온 나무를 만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녹취록 형식으로 쓰여 있어 마치 실제 사건 기록을 읽는 듯 생생했어요!


'비가 그치면 고백할게'는 전 국민의 97퍼센트가 초능력자인 독특한 세계를 배경으로 합니다. 아직 초능력이 생기지 않은 예비 중학생 강휘슬은 우연히 땅의 부름을 듣게 되는데요. "그러니까 우리 친구의 능력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보탬이 될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라는 문장에서 볼 수 있듯, 남들과 다른 것에 대한 고민과 함께 땅이라는 존재와 소통하며 성장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휘어지는 직진'은 감정 로봇 토토와 소녀 해니의 우정을 그린 작품인데요, 오빠들과의 전쟁놀이에 필요한 전투 로봇을 원했던 해니는 대신 감정 로봇 토토를 얻게 돼요. "아주 멀리까지 갔더니 직선으로도 곡선이 그려지더군요."라는 문장처럼, 토토는 직진만 할 수 있다는 오빠들의 불공평한 규칙 속에서도 해니는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어른이 되기로 다짐합니다. 정해진 규칙을 넘어서는 성장의 과정이 오래 마음에 남았던 이야기예요 :)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존재들과 공존해야 하는 세상이겠죠! 이 책을 통해 타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초등 5~6학년 고학년 친구들이나 중학생 친구들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창작동화예요. 단순히 재미를 넘어서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줄 수 있는 그런 책이네요. 이 책을 통해 더 큰 우주로 상상의 세계를 확장해보길!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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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가해자에게 - 이 대화는 가능할까?
사이토 아키요시.니노미야 사오리 지음, 조지혜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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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이라는 말이 너무 가볍게 쓰일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는 위로나 극복의 서사를 믿고 싶지만, 실제 피해자의 삶에서 회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시간이 흘러도 기억은 선명하고, 상처 입은 채 사건 이후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니노미야 사오리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은 매일 드문드문 끊긴다. 1995년 직장 상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찾아오는 해리성 기억 장애 때문이다. 팔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잊기 위해 그은 자해의 상흔이 선명하다. "왜 나였을까?" "나여야만 했던 걸까?" 이 질문은 그녀를 떠난 적이 없었다.




피해를 입은 지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니노미야씨의 마음속에서는 '왜 나였을까?' '나여야만 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들의 입으로 듣지 않고서는 그 답을 얻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계속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 '가해자와의 대화'였다고 합니다.

p.10




그녀가 가해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한 것은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자신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질문의 답을 듣지 않고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는 그렇게 시작된 7년여의 기록이다. 성폭력 피해 당사자인 니노미야는 일본 도쿄의 의존증 치료 전문기관인 '에노모토 클리닉'에서 가해자들과 서신 교환이나 대면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니노미야는 한 달에 한 번 가해자들을 직접 대면하기도 했다. 자해의 흔적이 남은 팔을 가리지 않은 채 "하루에 단 1분이라도 좋으니 피해자를 떠올려주세요"라고, 피해자는 혼란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하라고 가해자들에게 말했다.




가해 기억을 아예 망각하는 가해자, 언제까지나 피해 기억이 되살아나는 피해자. 너무나 비대칭적입니다. 성폭력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p.27



가해자가 가해 기억을 망각하는 것은 자신의 가해행위를, 심지어 피해자의 피해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배경에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고 봅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모른다'라는 점입니다.

 p.33




이 책의 공저자이자 3,000명이 넘는 성범죄자를 상담해 온 임상 전문가 사이토 아키요시는 가해자들이 가진 공통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의 범죄를 너무나 간단히 잊는다는 것이다. 습관처럼 저지른 일이라 피해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감옥에 다녀왔으니 죗값을 치렀다"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설명의 책임'입니다. 왜 자신은 이토록 심각한 짓을 했을까. 왜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이어야만 했을까. 자신이 저지른 짓임에도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에 대해 말할 언어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중략) 그들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할 책임이 있습니다.

 p.51




니노미야가 7년간 이 고통스러운 대화를 이어온 이유는, 가해자들에게 '설명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단순히 "죄송합니다"라는 의미 없는 사과는 무용하다. "왜 이토록 심각한 짓을 했는지", "왜 하필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을 휘둘렀는지"를 언어화해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이 자신을 언어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성 가해를 저지른 남성들은 자신의 약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경험을 회피해왔다.




성 가해행위를 멈추려는 목적으로 클리닉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무척이나 어려워합니다. 특히 자신의 약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언어로 드러내는 경험을 그때까지 인생에서 회피해왔습니다.

p.81




대화 프로그램의 목적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아는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가해자를 아는 것'이기도 했다. 가해자란 어떤 인격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삶의 방식을 지속해왔고, 무슨 생각으로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을 선택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쩌면 성폭력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대화 프로그램의 목적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안다'가 있고 (...) 이와 맞물려 양 날개를 이루는 것이 '가해자를 안다'입니다. (...) 가해자란 어떤 인격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삶의 방식을 지속해왔고, 무슨 생각으로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을 선택했는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뒤집어보면 성폭력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p.118~119




니노미야가 죽을힘을 다해 건넨 말들이 가해자들의 머리 위로 공허하게 흩어질 때면 안타까웠고, 가해자의 무성의한 언어에 불쾌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화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장소가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는 실패한 대화조차 무용하지 않다는 믿음 위에서, 회복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간 시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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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기억을 아예 망각하는 가해자, 언제까지나 피해 기억이 되살아나는 피해자. 너무나 비대칭적입니다. 성폭력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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