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루스트의 소설을 읽는 것은 거대한 바다를 항해하는 일과 같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4 -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는 그 기나긴 항해에서도 유독 눈부시고 감각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구간인 동시에,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완독하기 쉽지 않은 난관이기도 하다. 1편 <스완네 집 쪽으로>가 유년기의 기억과 풋사랑을 다루었다면, 2편에 해당하는 이번 권에서는 발베크 해변을 배경으로 예술에 눈뜨는 과정과 찬란한 청춘의 순간, 그리고 사랑과 존재의 본질을 향한 깊고 예리한 성찰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화자는 할머니와 함께 노르망디의 휴양지 발베크로 떠난다. 새로운 공간에서 그는 사랑과 예술,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한층 넓혀간다. 전편까지 머릿속의 상상과 동경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면, 이번에는 실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눈앞의 풍경을 마주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경험한다.



'바다들'은 매번 하루도같은 모습인 적이 없었으니까. 다음 날이면 다른 바다가 나타나고, 이따금 전날 바다와 비슷할 때도 있었지만, 같은 바다를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P. 112



발베크의 바다는 이 작품을 대표하는 이미지처럼 다가온다. 화자에게 바다는 결코 매일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빛과 날씨,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프루스트의 세계에서는 사람 역시 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누군가를 안다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 자체라기보다 그 사람 위에 덧씌운 기억과 욕망, 상상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삶에서 중요한 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하고 그는 전문가다운 단호하고도 거의 단정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랑한다는 그 자체입니다."

P. 209



4권에서는 이후 이야기를 이끌어갈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금빛으로 빛나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이 속한 계급을 경멸하는 귀족 청년 생루가 있고, 위험한 불빛을 머금은 듯한 눈빛 뒤에 속내를 감춘 샤를뤼스 남작도 있다. 과장된 맹세와 허풍을 일삼는 블로크 역시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샤를뤼스가 화자에게 무례하게 대한 뒤 물망초가 새겨진 책을 보내오는 장면은 짧지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이 가운데 사랑의 속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알베르틴이다. 처음에는 해변을 돌아다니는 소녀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지만, 화자는 그녀를 바라보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마음속에 수많은 알베르틴을 만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실제의 알베르틴보다 화자의 기억과 욕망,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알베르틴의 존재가 점점 더 커진다. 결국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사람에게 투영한 자신의 욕망과 상상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한 여인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여인에게 우리 영혼상태를 투사하는 일일 뿐이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여인의 가치가 아니라 그 상태의 깊이다. 그리고 어느 평범한 소녀가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훌륭한 사람과의 대화나, 그 작품에 대해 감탄하며 감상할 때의 기쁨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고 깊이가 있으며 본질적인 우리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에 우리 의식이 닿게 해 준다는 점이다.

P. 320




사랑은 상대를 발견하는 일인 동시에 자신의 내면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상대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가보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이미지를 덧씌우는지가 사랑의 크기와 형태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는 사랑을 아름답게만 그리지 않는다. 화자가 날마다 말을 걸고 마음속에서 대답하게 했던 상대는 실제 알베르틴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알베르틴에 가까웠다. 해변에서 마주한 실제의 그녀는, 화자의 내면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긴 공연에 잠시 모습을 드러낸 배우에 불과했다. 이 통찰은 사랑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욕망과 상상을 투사하는 일에 더 가깝다는 결론에 이른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2>를 읽으며 "잃어버린 시간"이란 단순히 지나가 버린 시간이 아니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흘려보낸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와 같은 바다가 없듯 어제와 같은 나 역시 없다. 순간마다 풍경도 달라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 자신도 달라진다.


긴 문장을 따라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그렇게 시간을 들여 읽고 나면 평범했던 풍경과 감정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한 권을 다 읽은 뒤 마음에 남는 것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다. 바다 위에서 시시각각 달라지던 빛, 해변을 지나가던 소녀들의 모습,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마음처럼 쉽게 사라질 법한 작은 순간들이다. 프루스트는 바로 그러한 순간들이 쌓여 한 사람의 기억이 되고, 마침내 한 사람의 시간이 된다는 사실을 끈질기게 보여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쉽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다. 문장은 길고, 사건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며, 한 장면을 설명하는 데만 몇 페이지가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데도 책장을 덮고 나면 그 느린 문장들이 오래 남는다. 프루스트가 붙잡으려 한 것은 단순한 줄거리나 인물의 운명이 아니라, 우리가 잊었다고 생각한 시간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


'스완네 집 쪽으로 1'은 콩브레의 기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은 어린 시절 밤마다 어머니의 입맞춤을 기다리던 순간, 낯선 방에서 깨어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더듬던 감각, 가족과 이웃, 산책길과 성당, 냄새와 소리와 빛의 인상을 되살려낸다.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은 기억들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문장 속에서 그 기억들은 삶 전체를 떠받치는 거대한 구조물이 된다.


​


가장 유명한 마들렌 장면이 바로 '스완네 집 쪽으로 1'에 등장한다. 침울했던 어느 겨울날, 주인공이 어머니가 내준 프티트 마들렌 과자를 홍차에 적셔 한입 베어무는 순간, 미각과 후각을 매개로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폭발적으로 되살아난다.



​


콩브레 주변의 두 갈래 산책로인 스완네 집 쪽과 게르망트 쪽을 거닐며 마주하는 풍경은 그야말로 한 폭의 명화처럼 펼쳐진다. 특히 산사나무꽃에 대한 찬미는 읽는 내내 눈앞에 선명한 색채가 번지고, 코끝에는 짙은 꽃향기가 스치는 듯한 공감각적 체험을 하게 한다.


​


빗소리, 성당의 채색 유리, 시골 방의 냄새, 산사나무꽃의 향기, 종탑의 빛깔 같은 장면들이 놀라울 만큼 세밀하게 펼쳐진다. 어떤 문장은 너무 길어 숨이 차고, 어떤 문장은 의미가 한 번에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 선명한 풍경이 떠오른다. 프루스트는 풍경을 단순히 보여주지 않는다. 그 풍경이 한 사람의 의식 안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변형되며, 마침내 기억으로 저장되는지를 보여준다.


​


이 책은 수려한 자연 묘사뿐만 아니라 프루스트의 놀랍도록 예리한 인간 관찰도 담고 있다. 인물 묘사는 사진 속 한 장면처럼 생동감 넘치고 유머러스하다. 하녀 프랑수아즈의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상냥하고 헌신적인 인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기 눈 밖에 난 부엌 하녀를 내쫓기 위해 천식 발작을 일으키는 아스파라거스 껍질을 매일 벗기게 만드는 교묘하고 가혹한 인물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 사실을 짐작하면서도, 프랑수아즈가 끓여주는 완벽한 커피와 닭고기 요리를 포기할 수 없어 모른 척 눈감아버리는 레오니 아주머니의 비겁함이다(!!)


​



우리 인간은 마치 회계 장부나 유언장처럼 가서 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물질로 구성된 전체가 아니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아는 사람을 보러 간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아주 단순한 행위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지적인 행위다. 눈앞에 보이는 존재의 외양에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 모든 관념들을 채워 넣어 하나의 전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p.43




그러나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 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p.90


심부름 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가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들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p.91



읽는 동안 자주 멈춰섰다.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라는 대목, 존재가 사라지고 사물이 파괴된 뒤에도 냄새와 맛만은 영혼처럼 살아남아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떠받친다는 대목에서 오래 머물렀다. 프루스트는 정밀하게 인간의 마음을 해부하지만, 그 시선은 차갑기보다 오히려 아름답다. 습관, 기다림이 배고픔처럼 고통으로 변하는 순간, 속물근성에 대해 그가 남긴 문장들은 백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놀라울 만큼 현재적이다. 특히 은둔자인 척하면서도 실은 누구보다 귀족 사교계를 갈망하는 르그랑댕의 초상은 자기 욕망을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처럼 읽혔다.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뚜렷한 기승전결이나 긴박한 사건 전개가 있는 소설이 아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처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인물의 사유와 감각을 오롯이 체험하게 하는, 거대한 직물 같은 텍스트다.



​


처음에는 이 방대한 직물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막막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조금만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프루스트가 쳐놓은 눈부신 언어의 그물에 기꺼이 갇힌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사소하고 덧없는 일상의 조각들이 문학의 힘을 빌려 어떻게 불멸의 예술품으로 재탄생하는지 목격하고 싶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펼치길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 소녀
우샤오러 지음, 정세경 옮김 / 빈페이지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방과 후 38분 뒤. 백 년 역사의 명문 치화여고에서 한 학생이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담임 교사 우이광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그 학생이 우울증을 앓던 종량이 아니라, 조용하고 평범했던 쑤밍쉬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소설은 한 소녀의 죽음으로 문을 열지만, 단순히 명문고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의 진상을 쫓는 추리 소설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 속에서 상처받은 채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 모두를 향한 서늘하고도 슬픈 진혼곡에 가깝다.


우이광은 사건을 수습하고 해명해야 한다는 끔찍한 압박에 시달리던 중, 교무실 책상에서 섬뜩한 쪽지를 발견한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쑤밍쉬안이 있었던 밴드부에 가서 물어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날카롭게 그녀를 찌르는 문장이 뒤따른다. "당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선생인지 알아?"


죽음의 원인과 맥락을 추적하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시작된 소설은 이내 진실을 마주하기보다 회피하고 싶은 우이광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독자를 이끈다. 겉으로 보기에 우이광의 삶은 흠잡을 데가 없다. 명문 여고에서 교사로 일하고 어머니가 골라준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정작 그녀 자신의 선택은 없었다.


성적으로만 딸을 평가하고 친구 관계마저 무너뜨리던 어머니와 그 곁에서 침묵하던 아버지. 열일곱 살의 우이광은 결국 유서를 썼지만 가까스로 그 결심을 접었다. 그렇게 봉인해 둔 과거를 다시 끄집어낸 것은 다름 아닌 제자의 죽음이었다. 진실을 좇을수록 드러나는 것은 쑤밍쉬안의 비밀만이 아니라 우이광 자신의 오래된 상처다.


<그 소녀>에서 아이를 무너뜨리는 폭력은 언제나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기대, "너를 위해서"라는 부모의 말, 성적을 기준으로 아이를 판단하는 시선처럼 너무나 익숙해서 폭력으로 인식하기조차 어려운 것들이 서서히 아이를 몰아붙인다. 특히 부모는 사랑과 보호라는 명분으로 자녀의 삶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다. 소설은 그렇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통제가 정작 사랑받아야 할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지 끈질기게 보여준다.


우이광이 친구의 가족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랑받을 수 있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 역시 씁쓸하다. 어떤 아이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부모의 포옹과 위로가 다른 아이에게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된다. 결국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성공이나 완벽한 미래가 아니라,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 자체가 환영받고 있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에서 우이광은 진실을 파헤치는 정의로운 구원자도, 철저히 무능한 방관자도 아니다.  그녀는 어른이 되었지만 마음 한편은 여전히 열일곱 살에 머물러 있는 불완전한 인물이다. 어머니의 숨 막히는 통제와 성적 지상주의에 짓눌린 십 대를 보냈고, 열일곱 살에는 유서를 쓰며 삶을 끝내려 했던 상처받은 생존자이기도 하다.


간신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른이 되었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여전히 열일곱 살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남편의 외도와 제자의 죽음을 겪으며 우이광은 비로소 애써 외면해 온 과거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리고 그 끝에서 쑤밍쉬안의 모습과 자신의 열일곱 살이 겹쳐진 "그 소녀"를 발견한다.


이 소설의 제목 <그 소녀>는, 힘든 시간을 견디고 끝까지 통과해냈다고 믿지만 마음 한편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사람, 어른이 되었어도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 모두가 "그 소녀"일 수 있다. 우이광이 "나는 살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 소녀>는 타이완의 교육 현실을 다루지만 한국 독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성적과 입시, 부모의 기대,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압박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교육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삶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거운 이야기를 다루지만, 결국 이 소설이 바라보는 방향은 죽음보다 삶에 가깝다.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지만 그 상처를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일, 그리고 잃어버린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는 일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그 소녀>는 과거의 어느 순간에 멈춰 있던 한 사람이 다시 자신의 삶을 향해 걸어가는 이야기가 된다.


살아남았다는 것과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는 힘든 시간을 견디고 버텨냈다는 이유로 이미 그 시간을 통과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몸은 그 시간을 빠져나왔어도 마음은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소녀>가 읽고 난 뒤 오래 남기는 것은 비극 자체보다 "살아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그 소녀
우샤오러 지음, 정세경 옮김 / 빈페이지 / 202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른 읽어보고 싶네요! 출판사 인스타에서 출간 소식 보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르웨이의 숲>을 몇 년 만에 다시 꺼내 읽었다. 읽는 내내 오래전 지나온 계절들이 자꾸 떠올랐다. 그때는 너무도 선명해서 절대 잊지 않을 것 같았던 사람과 장소, 감정도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희미해진다. 한때는 분명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기억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순간도 있을 것이다.




소설은 서른일곱 살이 된 와타나베가 독일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노래가 흐르는 순간, 그는 스무 살 무렵의 기억과 그 시절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와타나베에게는 기즈키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고등학교 시절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와타나베와 기즈키, 그리고 기즈키의 여자친구 나오코는 늘 함께 어울렸다. 그러나 열일곱 살이던 어느 날, 기즈키는 아무런 예고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와타나베는 고향을 떠나 도쿄의 대학에 진학하지만 기즈키의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도쿄에서 우연히 나오코와 다시 만난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기즈키를 잃은 슬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지만, 그 관계는 평범한 사랑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나오코의 스무 살 생일날 두 사람은 함께 밤을 보내고, 이후 나오코는 갑자기 와타나베의 곁을 떠난다.




몇 달 뒤 도착한 편지를 통해 와타나베는 나오코가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교토의 산속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나오코를 찾아간다. 아름답고 고요한 자연 속에서 나오코는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지만, 기즈키의 죽음과 내면에 자리 잡은 어둠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와타나베는 그런 나오코를 기다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러던 중 와타나베는 대학에서 나오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미도리를 만난다. 봄날의 들판을 뒹구는 새끼 곰처럼 생동감 넘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미도리는 와타나베의 고독한 일상에 거침없이 뛰어든다. 나오코가 상실과 죽음의 세계에 가까이 서 있다면, 미도리는 지금 살아 있는 현실과 앞으로 나아갈 삶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점차 미도리에게 끌리기 시작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흔들리며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이 뒤엉킨 스무 살의 시간을 통과한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미도리를 향해 커지는 감정 사이에서 계속 흔들린다. 그러는 동안 나오코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결국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기즈키에 이어 나오코마저 잃은 와타나베는 커다란 충격을 받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듯 홀로 여행을 떠난다. 바닷가를 걷고 낯선 곳을 떠돌며 나오코의 죽음을 오래도록 슬퍼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겪은 뒤 와타나베가 깨닫는 것은 죽음이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소중한 사람들을 연이어 잃으며 그는 이 묵직한 진실을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배워나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죽음을 조금씩 품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잃은 슬픔은 어떤 진리나 강인함만으로 온전히 치유되지 않는다. 결국 그 슬픔을 끝까지 겪어내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며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 소설의 시선은 놀랄 만큼 담담하다. 상실을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기보다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태도 때문에 오히려 더 깊은 슬픔과 짙은 여운이 남는다.




<노르웨이의 숲>은 청춘의 사랑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기억과 죽음, 고독과 성장에 관한 소설이다. 이제 막 뜨거운 청춘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미 그 시절을 멀리 보내고 가끔 뒤돌아보는 사람에게도 권하고 싶다. 책장을 덮고 나면 오래전 잊고 지냈던 누군가와 그 시절의 나 자신이 문득 떠오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