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자 거장의 클래식 1
바이셴융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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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왕국에는 밤만 있고 낮은 없었다. 날이 새면 우리 왕국은 자취를 감췄다. 그곳은 비합법적인 나라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부도 없고 헌법도 없었으며 승인되지도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합지졸인 한 무리의 국민뿐이었다.

p.21


<서자>는 1970년대 타이베이 신공원(현재 228공원)을 배경으로, 거리로 내몰린 청년들의 삶과 아버지 세대의 회한을 그린 소설이다. 단순히 퀴어 소설이 아닌, 사회적 소수자의 고립과 연대,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담았다. 저자는 서문에서 "깊디깊은 어두운 밤에 홀로 거리를 방황하던 돌아갈 데 없던 그 아이들에게 바친다"고 밝혔는데, 과연 거리를 방황하던 그 아이들의 "왕국"에는 놀랍고도 비통한 역사가 있었다. 



주인공 아칭은 고등학교 화학실험실에서 실험실 관리원 자오우성과 외설행위를 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퇴학당했다. 연대장을 역임하고 퇴역한 아버지는 아들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해 자신의 뜻을 이어주기를 바랐지만, 그 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퇴학 후 아칭은 집에서도 쫓겨나 거리로 내몰린다.



왕국에서는 귀천의 차이도 없고 노소와 강약의 구분도 없었다. 우리에게 똑같이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욕망으로 단련된 몸뚱이와 미칠 듯이 외로운 마음이었다. 그 미칠 듯 외로운 마음은 밤만 되면 우리를 부수고 나온 맹수처럼 사방에서 흉폭하게 컹컹대며 사냥에 나섰다. 검붉은 달빛을 맞으며 우리는 몽유병 환자마냥 서로의 그림자를 밟으며 미친 듯이 뒤쫓기 시작했다. 연못을 가운데에 두고 끝도 없이 뱅뱅 돌며 거대하기 짝이 없는, 사랑과 욕망으로 가득한 우리의 악몽을 뒤쫓았다. 

p.43



더 이상 돌아갈 집도 학교도 없는 아칭은 "왕국"에 발을 들이게 된다. 거기에는 양사부를 중심으로 거리의 소년들(샤오위, 우민, 아슝 등)이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성매매로 생계를 이어간다. 모두 비정상적인 가정, 가난, 폭력, 혹은 성정체성 때문에 집과 제도적 보호망 밖으로 내던져진 존재들이다. 그들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사랑받지 못했고 이해받지 못했지만 여전히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정상적인 삶에 대한 희미한 희망을 품고 있다. 샤오위는 사라진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일본으로 떠나고, 우민은 번번이 버려지면서도 ‘진짜 사랑’을 꿈꾼다. 아칭도 자신을 미워하는 아버지를 걱정하고 그리워한다. 



사실 나는 아버지의 고통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었다. 특히나 집을 나온 요 몇 달 동안 갈수록 아버지의 태산처럼 무거운 고통이 느껴져 시시때때로 가슴이 답답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아버지의 그 고통을 피하려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뼛가루를 들고 집에 돌아간 날, 음침하고 축축하며 조용히 곰팡내가 풍기는 거실에 서서 아버지의 그 반들반들해진 대나무 의자를 봤을 때 나는 돌연 숨이 막혀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아버지를 피하려는 것은 고통에 시달리는 그의 어둡고 늙은 얼굴을 감히 똑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p.455



그들은 양 사부와 함께 '안락향'이라는 게이바를 차려 자신들만의 파라다이스를 만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한다. 소설은 이 실패를 파국적 결말로 그리지 않는다. 제각각 뿔뿔이 흩어지지만 부서지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다. 


"아버지는 제가 마지막으로 당신 시신을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어요. 저는 10년을 기다렸어요. 아버지가 용서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마치 부적처럼 몸에 낙인찍혀서 그 추방령을 등에 진 채 유배자처럼 뉴욕의 그 해도 안 보이는 마천루 밑을 여기저기 떠돌았어요. 10년을, 저는 10년을 도망쳐 다녔어요. 아버지의 그 부적은 제 등에서 매일매일 뜨겁게 타올랐고요. 오직 아버지만, 아버지만 그걸 없앨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한마디로 안 남기고 땅속으로 들어갔죠. 아버지는 그렇게 저를 저주했어요. 제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게 저주했어요!"

 p.438



"아버지의 고통을 너희가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냐? 맞다, 쿠이룽. 네 아버지는 나한테 네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동안 왕래가 거의 없기도 했고. 하지만 나는 안다, 네 아버지가 겪은 고통이 절대 너보다 가볍지 않다는 걸. 그동안 네가 바깥에서 온갖 괴로움을 다 겪었다는 걸 나는 믿는다. 하지만 너는 네 고난이 단지 너 한 사람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네 아버지도 여기서 너와 함께 나누고 있었다. 네가 아플 때 네 아버지는 더 아팠어."

p.439


푸 어르신과 왕쿠이룽의 대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동성애자 아들을 잃은 푸 어르신과, 아버지에게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채 그를 떠나보낸 왕쿠이룽, 두 사람의 대화에는 서로의 상실이 겹쳐져 보였다.



소설은 내내 잔혹한 현실을 이야기했지만 서정적이고 유려한 문장들 때문에 슬프고 아름다운 시처럼 읽혔다. "왕국"의 밤, 싸구려 여관방, "안락향"등 은 퇴락한 공간이지만 바이셴융은 그곳에 머무는 인물들의 감정과 상처를 섬세하게 포착해 아름다운 문장으로 직조해냈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절망과 희망, 갈등과 화해, 추방과 구원 그 모든 것들이 뒤엉킨 세계를 온몸으로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책을 읽는 내내 바이셴융이 되살린 타이완의 한 시절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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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제가 마지막으로 당신 시신을 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어요. 저는 10년을 기다렸어요. 아버지가 용서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마치 부적처럼 몸에 낙인찍혀서 그 추방령을 등에 진 채 유배자처럼 뉴욕의 그 해도 안 보이는 마천루 밑을 여기저기 떠돌았어요. 10년을, 저는 10년을 도망쳐 다녔어요. 아버지의 그 부적은 제 등에서 매일매일 뜨겁게 타올랐고요. 오직 아버지만, 아버지만 그걸 없앨 수 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한마디로 안 남기고 땅속으로 들어갔죠. 아버지는 그렇게 저를 저주했어요. 제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게 저주했어요!" - P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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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왕국에는 밤만 있고 낮은 없었다. 날이 새면 우리 왕국은 자취를 감췄다. 그곳은 비합법적인 나라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부도 없고 헌법도 없었으며 승인되지도 못하고 존중받지도 못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오합지졸인 한 무리의 국민뿐이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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