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가해자에게 - 이 대화는 가능할까?
사이토 아키요시.니노미야 사오리 지음, 조지혜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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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이라는 말이 너무 가볍게 쓰일 때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리라는 위로나 극복의 서사를 믿고 싶지만, 실제 피해자의 삶에서 회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시간이 흘러도 기억은 선명하고, 상처 입은 채 사건 이후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건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니노미야 사오리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은 매일 드문드문 끊긴다. 1995년 직장 상사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찾아오는 해리성 기억 장애 때문이다. 팔에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잊기 위해 그은 자해의 상흔이 선명하다. "왜 나였을까?" "나여야만 했던 걸까?" 이 질문은 그녀를 떠난 적이 없었다.




피해를 입은 지 20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니노미야씨의 마음속에서는 '왜 나였을까?' '나여야만 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들의 입으로 듣지 않고서는 그 답을 얻지 못하는 게 아닐까, 계속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 '가해자와의 대화'였다고 합니다.

p.10




그녀가 가해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결심한 것은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였다. 자신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질문의 답을 듣지 않고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는 그렇게 시작된 7년여의 기록이다. 성폭력 피해 당사자인 니노미야는 일본 도쿄의 의존증 치료 전문기관인 '에노모토 클리닉'에서 가해자들과 서신 교환이나 대면의 방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니노미야는 한 달에 한 번 가해자들을 직접 대면하기도 했다. 자해의 흔적이 남은 팔을 가리지 않은 채 "하루에 단 1분이라도 좋으니 피해자를 떠올려주세요"라고, 피해자는 혼란과 고통 속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직면하라고 가해자들에게 말했다.




가해 기억을 아예 망각하는 가해자, 언제까지나 피해 기억이 되살아나는 피해자. 너무나 비대칭적입니다. 성폭력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p.27



가해자가 가해 기억을 망각하는 것은 자신의 가해행위를, 심지어 피해자의 피해를 가볍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배경에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고 봅니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모른다'라는 점입니다.

 p.33




이 책의 공저자이자 3,000명이 넘는 성범죄자를 상담해 온 임상 전문가 사이토 아키요시는 가해자들이 가진 공통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자신의 범죄를 너무나 간단히 잊는다는 것이다. 습관처럼 저지른 일이라 피해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감옥에 다녀왔으니 죗값을 치렀다"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기도 한다.




'설명의 책임'입니다. 왜 자신은 이토록 심각한 짓을 했을까. 왜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이어야만 했을까. 자신이 저지른 짓임에도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그에 대해 말할 언어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중략) 그들에게는 그렇게 해야만 할 책임이 있습니다.

 p.51




니노미야가 7년간 이 고통스러운 대화를 이어온 이유는, 가해자들에게 '설명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단순히 "죄송합니다"라는 의미 없는 사과는 무용하다. "왜 이토록 심각한 짓을 했는지", "왜 하필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을 휘둘렀는지"를 언어화해서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가해자들이 자신을 언어화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특히 성 가해를 저지른 남성들은 자신의 약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드러내는 경험을 회피해왔다.




성 가해행위를 멈추려는 목적으로 클리닉에 다니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말하기를 무척이나 어려워합니다. 특히 자신의 약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언어로 드러내는 경험을 그때까지 인생에서 회피해왔습니다.

p.81




대화 프로그램의 목적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아는 것'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가해자를 아는 것'이기도 했다. 가해자란 어떤 인격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삶의 방식을 지속해왔고, 무슨 생각으로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을 선택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어쩌면 성폭력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대화 프로그램의 목적에는 '가해자가 피해자를 안다'가 있고 (...) 이와 맞물려 양 날개를 이루는 것이 '가해자를 안다'입니다. (...) 가해자란 어떤 인격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삶의 방식을 지속해왔고, 무슨 생각으로 성을 매개로 한 폭력을 선택했는지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뒤집어보면 성폭력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p.118~119




니노미야가 죽을힘을 다해 건넨 말들이 가해자들의 머리 위로 공허하게 흩어질 때면 안타까웠고, 가해자의 무성의한 언어에 불쾌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화하지 않으면 도달하지 못하는 장소가 있다. <피해자가 가해자에게>는 실패한 대화조차 무용하지 않다는 믿음 위에서, 회복을 향해 한 발씩 나아간 시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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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 기억을 아예 망각하는 가해자, 언제까지나 피해 기억이 되살아나는 피해자. 너무나 비대칭적입니다. 성폭력이 얼마나 잔혹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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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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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00년대생 작가 최초 아쿠타가와상 수상자, 연간 천 권이라는 "괴물" 같은 독서량 , 대학 도서관에서 단 30일 만에 완성했다는 집필 비화까지, 작가 스즈키 유이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이 화제의 중심이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스물셋 청년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토록 사랑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었는가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라는 문장에서 시작된 이 소설은 문장 그 자체가 되어 끝을 맺는다. 오래도록 다시 읽고 싶은 소설을 만났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의 발단은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문학적이다. 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자 히로바 도이치가 결혼 25주년 기념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홍차 티백 꼬리표에 적힌 문장을 발견한다. 그가 평생 연구해온 학문적 명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처럼 보였고, 그는 곧바로 출처를 좇기 시작한다.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 —Goethe"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p.38-39



사실 평생 괴테 연구에 천착해온 도이치조차 처음 보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으리라 자신만만하게 생각한다. 진짜 괴테가 했던 말일지 의구심도 품지 않는다. 왜냐하면 도이치는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이치가 어째서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믿는지 내막을 알기 위해서는 도이치의 20대 독일 유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젊은 도이치는 한때 이웃으로 만난 미술학도 요한과 각별한 사이였는데, 요한은 훗날 괴테 전문가로 대성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던 도이치에게 "독일 사람은 말이야, 명언을 인용할 때 그게 누구의 말인지 모르거나 실은 본인이 생각해 낸 말일 때도 일단 '괴테가 말하기를'이라고 덧붙여 둬. 왜냐하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거든."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을 건넨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기 때문에 어떤 명언이든 "괴테"라는 라벨만 붙이면 진실로 통용된다는 것이었다. 이 문장은 도이치에게 어느샌가 잊힌,  청춘 시절의 유희 같기도, 저주 같기도 한 주문이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번에는 일본어로 옮겨봤다. 그러자 조금은 괴테스러워졌다. 그때 도이치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물론 잼과 샐러드였다. 사랑은 모든 사물을 잼처럼 혼동시키지 않고 샐러드처럼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렇게 파우스트 박사처럼 자기식으로 번역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mix'를 어떻게 해석할지 아직 뚜렷한 확신이 없었다. 'confuse(혼동하다)', 말하자면 잼적 도이치에 대한 대립 개념으로서 'mix(뒤섞다)'를 일단 샐러드적 도이치로 해석했는데,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p.45





세계는 죽이나 잼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딱딱한 음식을 씹어야 한다.

<격언풍으로>에서 

세계는 말하자면 안초비 샐러드다. 모든 것을 하나로 뒤섞어 먹어야 한다.

<비유적 및 경구풍으로>에서 

도이치는 이 서로 다른 두 세계관을 각각 '잼적 세계' '샐러드적 세계'라고 이름 붙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잼적 세계란 모든 것이 하나로 녹아든 상태, 샐러드적 세계란 사물이 개별적 구체성을 유지한 채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킨다.

 p.41


도이치는 자신의 저서 <괴테의 꿈ㅡ잼인가? 샐러드인가?>를 통해 세계를 '잼'과 '샐러드'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해 왔다. 모든 재료가 형체 없이 녹아들어 구분할 수 없는 혼돈의 상태가 '잼적 세계'라면, 각 재료가 고유한 맛과 형태를 유지한 채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상태가 바로 '샐러드적 세계'다. 티백 속 문장의 'confuse(혼동하다)'는 잼에, 'mix(뒤섞다)'는 샐러드에 정확히 대응된다. 즉, 출처를 알 수 없는 그 문장은 도이치의 학문적 세계관을 한 문장으로 완벽하게 요약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문장의 진위다. 도이치는 여러 판본의 괴테 전집을 뒤지고, 동료 연구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출처 탐색에 몰두한다. 동료 교수인 시카리, 논문을 쓰는 딸 노리카, 아내 아키코, 그리고 아키코가 즐겨보는 유튜버 베버와 과거 유학 시절 친구 요한까지, 도이치의 주변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하며 이야기는 점차 풍성해진다. 도이치가 말한 '샐러드적 세계'처럼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도이치의 탐색 과정에 섞여들며 예상치 못한 맛을 낸다.




"도이치, 괴테의 그 말 말이지, 자네는 그걸 찾을 수 있을 게야. 그 말이 진짜라면."

도이치는 마나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잘 알 것 같으면서도 곰곰이 생각할수록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짜'라는 건 무슨 뜻일까? '진짜 괴테의 말'인가? 아니면...

 p.157




출처를 찾을 수 없는 말은 거짓인가, 아니면 새로운 진실인가. 괴테가 실제로 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그 문장이 담고 있는 통찰은 유효한 것인가. 검색창에 단어 몇 개만 입력하면 AI가 수만 가지 정보를 쏟아내는 시대에, 도이치의 방식은 지극히 아날로그적이고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다. 결국 도이치는 문장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오른다.




지난번 꽃 정말 고마웠습니다. 다소 특이한 모양이지만 향기는 분명 장미와 비슷하니 참 신기했습니다. 친구에게 보여주자 이런 것도 꽃이냐며 놀라더군요. 하지만 실로 조물주의 사랑은 하나의 꽃에서 모든 꽃을 싹트게 했습니다. 그걸 알면 우리 인간도 언젠가는 혼란 없이 뒤섞이리라 믿을 수 있습니다. - 괴테

이 문장을 베버 씨가 "조물주의 사랑은 모든 것을 혼란 없이 뒤섞는다”라고 요약했고, 그걸 본 중국인 명언 사이트 운영자가 조물주를 빼고 영어로 옮겼다. 그것을 발견한 미국 티백 회사가 자사의 꼬리표에 명언으로 실었다. p.216~217



결국 도이치의 집요한 추적 끝에 밝혀진 문장의 진실은 허탈하면서도 유쾌하다. 그 문장의 출처는 괴테가 남긴 것인지 확실치 않은 미공개 편지였는데, 여러 단계의 번역과 요약을 거치며 재탄생한, 일종의 ‘창조적 오역’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이 결말이 도이치의 여정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도이치는 가족, 제자, 동료와의 관계를 건강하게 재정립한다. 출처 불명의 명언일지라도, 그것이 도이치의 삶을 움직이고 변화시켰다면 그 문장은 그에게만큼은 진실이 된다.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는 농담은,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 무엇을 읽어내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될 수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혼동(Confusion)을 넘어 진정한 혼연일체(Mix)로 나아가는 이 유쾌하고 지적인 소설,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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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세계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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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에 빠질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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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유물 -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의 가장 빛나는 보물들
정잉 지음, 김지민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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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 고궁박물원 가기 전 꼭 읽어야 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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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삼국지 세트 - 전8권 정사 삼국지
진수.배송지 지음, 김영문 옮김 / 글항아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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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은 정사 삼국지와 함께 즐겁고 따뜻하게 날 수 있겠습니다!!ㅎㅎ 늘 좋은 책 출간해주시는 글항아리 출판사 선생님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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