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 세계 역사를 바꾼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 서해역사책방 7
안토니 비버 지음, 안종설 옮김 / 서해문집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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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제목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나오는 문장을 인용했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전쟁을 다룬 책 제목으로 참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그 곳은 바로 전쟁터가 될 터이니.

이 책은 세계사에서 가장 유명한 전투중의 하나가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 590일의  기록을 담고있다.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2차 세계대전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보여주기 위해서 작가는 양측 군인의 일기와 편지, 군목들의 보고서, 개인적 메모 등 다양하고 방대한 사료들을 인용하고 있다. 덕분에 책은 살아있는 책이 되었다.

파죽지세로 소련을 점령해가던 독일군이 어떻게 전쟁에서 졌는지 스탈린의 공포정치체제속에 익숙해져 있던 소련군들이 어떻게 대규모의 독일군을 맞아 전쟁에서 승리했는지 그 숨막히는 드라마가 흥미진진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읽는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앞으로 나가면 적군에게 죽고 뒤로 물러나면 아군에게 죽는 전쟁의 참혹한 실상앞에서 전쟁엔 승자도 패자도 없음을 느끼게 해준 책이기도 했다. 

독일군은 2차 세계대전 전체 전사자중 80%를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잃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전사자는 9백만, 부상자는 1천8백만, 민간인 사망자는 1천8백만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밖에도 집계하기 어려운 사망자와 부상자까지 합친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스탈린그라드에서 사람들은 그들이 병사이건 장교이건 민간인이건 모두 지옥을 경험했다.

히틀러의 광기와 스탈린의 자존심의 한 판이 된 스탈린그라드전투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할지 혹은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사실 그것은 잘 모르겠다.

나의 관심이 가는 건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은 항상 전쟁의 현장과 떨어져있다는 것이고 전쟁을 수행하는것은 이름도 확인할 길 없이 무명의 병사로 죽어간 수 많은 병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지옥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나라와 조국을 위해 싸운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며 죽어갔다. 독일군이건 붉은 군대이건 그들은 모두 그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전쟁의 아이러니는 항상 여기에 있다. 전쟁의 당위와 필연성은 위에서 정한다. 병사들은 명령에 따를 뿐이다.  나는 침략자의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고 잘못된 전쟁을 수행할 수도 있고 무고한 시민을 죽이기 위해 투입될 수도 있다.  나는 옳을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가치의 부재 한 가운데에 던져져

그 가치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고 고민할 여지도 없이 단지 살기위해 죽이고 생존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속에서 병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낄까?

나의 관심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느낀 건 그들은 모두 그들이 사랑하는 조국과 가족을 위해 싸웠다는 사실이고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헛되이 죽어갔다는 것에 또한 전쟁의 비극이 있다.

이 책엔 수 많은 사병들이 전쟁터에서 쓴 일기와 편지의 일부분들이 인용되어 있다.

왜 싸워야하는지 회의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배고픔에 고통스러워하고 그러면서도 용기를 보여주는 사병들의 글 속에 전쟁의 진실과 실상이 담겨있다. 그 보다 더  절실하고 더 간절히 전쟁에 대해 고발하는 고발장은 없을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 전쟁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그 전재의 한 가운데에 지옥이 있다. 그 입구엔 이렇게 써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라고.

그러나 나는 언젠가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지는 날을 희망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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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게임
리처드 바크만 지음 / 반도기획 / 199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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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시점의 전체주의 국가가 되어 있는 미국. 100여명의 소년들이 롱 워크(Long walk)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모여있다.

긴장과 흥분이 감도는 분위기 속에 주인공 거래티도 들어있다.

게임이 시작됐다.  100명의 소년들은 자신들의 앞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약간은 산책나온 기분으로 걷기 시작했다.

소년들이 참가한 롱 워크란 게임은 걷는 게임이다.  끝은 없다. 거리는 무제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경기는 계속된다.  게임의 규칙은 단순하다.

소년들은 몇날 며칠이고 쉬지 않고 걷되 속도가 시속4마일 이하로 떨어지면 경고를 하나 받는다. 다음 경고까지 30초가 주어지고 1시간 안에 다시 경고를 받지 않으면 경고 하나가 사라진다. 경고를 3개 받으면 군용트럭을 타고 따라오는 군인들의 총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최후의 승자 한 사람에게는 평생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상이 기다린다.

소년들에겐 전국의 수 많은 사람들의 내기 돈이 걸려있다. 시민들은 소년들이 지나가는 길에 나와 소년들을 응원한다.

2시간이 지나자 첫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또 한명의 희생자가 나오고 또 한명....

소년들은 비로소 이 게임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처음에는 이 게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99명이 죽어야 게임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99명 중의 한 사람이 이제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소년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자 깨달게 된 것이다.

이 게임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했다.  '걷든가 죽든가'   이야기는 이제 팽팽한 긴장감을 띄기 시작한다.

소년들은 홀로 혹은 몇명씩 짝을 지어 걸어간다. 게임은 진행되고 소년들은 서로의 가슴속에 있는 얘기들을 하나 둘 꺼내놓기 시작한다. 직면한 죽음의 공포가 그들에게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참가한 소년 하나하나의 사연들이 밝혀지면서 독자들은 소년들의 죽음에 태연하기가 힘들게 된다. 이 게임엔 친구도 동료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위하는 소년들의 우정이 들어난다.  죽음의 순간에서 구해주기도 하고 결혼해서 이제 곧 아버지가 될 소년이 죽게 되면 최후의 승리자가 누가 되든 그의 남은 식구를 돌봐주기로 약속하기도 한다.

물론 마지막에는 누구도 서로를 도와서는 안된다. 자신이 살기위해서 절대적으로 혼자와의 싸움을 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걷는다는 단순한 설정의 게임에 소년들을 몰아넣고 극한 상황속에 처한 인간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성공이다. 소년들은 끊임없이 이어진 길 위에서 새로 태어나고 자라고 그리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죽어간다.  때론 소리치고 때론 반항하고 때론 후회하고 그러면서 소년들이 걷는 길은 모든 인간 삶의 축소판이 된다.

죽음과 싸우는 소년들을 응원하러 길가에 나온 시민들은 소년들의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소년들, 그리고 웃고 소리치며 소년들을 응원하는 시민들. 그 둘은 모두 이 게임을 만든 소령의 동물원에 갇혀있을 뿐이다. 뒤에서 이 모든 것을 조종하고 계획하는 소령은 전체주의와 감춰진 권력의 상징이다.

이 책은 저자가 리차드 바크만이란 가명을 써서 출판한 4권의 책 중 하나다. 대학 신입생때 썼다는 걸로 보아 저자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단순한 설정이 지루함을 줄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만 책은 정말 재미있다. 시종일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장감과 스릴이 있다.

아쉬운 건 1994년에 처음 출판 된 이 책을 지금은 서점에서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의 다른 책에 비해 덜 알려져서 인지 재간행도 안되고 있다.

친구의 오빠가 번역한 책이어서 운 좋게 친구에게 다시 빌려서 읽게 됐다. 15년만에 다시 읽었지만 변함없이 재미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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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세트 - 전3권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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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라는 여류작가는 우리에게 낯선 이름이다.

그녀가 쓴 책 세권이 우리나라에서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이란 제목으로 발간됬다.  이미 10년전에 한 번 출판된 적이 있었으나 절판되었었다.  10년전 상당한 마니아층을 만든 이 책은 최근 다시 발간 되었다.  그러니 지금 이 책을 모두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행운아다.

많은 사람들이 10년간 절판된 이 책을 찾아 헤맨것을 생각 해 보자.

서평이고 리뷰고 다 필요없이 무조건 일단 사서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값도 싸다. 인터넷서점에서 7천원이면 일단 한권을 사서 읽을 수 있다. 일단 한 권만 사서 읽자.  그 다음에 나의 말이 필요없을 것이다.  두번째 세번째권을 사서 안 읽을 수 없을 테니. 내기를 해도 좋다.

읽기도 쉽다. 일단  문장이  짧고 명확하다.  주관적인 느낌이나 감상적인 서술이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 우리는 호두를 많이 먹는다 라고 쓰지  호두를 좋아한다 라고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좋아한다 는 단어는 막연한 단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확성과 객관성이 부족하다. 호두를 좋아한다 와 엄마를 좋아한다 는 같은 의미일 수가 없다. 첫번째 문장은 입안에서의 쾌감을 말하지만 두번째 문장은 감정을 나타낸다."

이 글은 이렇게 생각하는 우리의 시점에서 쓰여진 것임을 기억하자.

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순진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편견을 버려라. 이 책에 등장하는 우리는 악마의 자식들일지도 모른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나 태교에 신경써야 하는 임산부는 이 책을 읽지 말자.

인간의 악마적인 본성과  자신을 비롯한 타인의  고통앞에 철저하게  무감각한 인간의 잔혹함에 치를 떨지도 모른다.

그러나 읽다보면 그 잔혹하고 냉정함 너머 눈물 스미고 심장이 아픈 슬픔과 연민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지독하게도 건조하게 쓰여 있어서 내 가슴의 눈물이라도 쥐어 짜줘야 할 것 같은, 이 책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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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산과의사
미셀 오당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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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저자는 산업화된 농업과 산업화된 출산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산업화된 농업은 대량의 살균제와 화학비료, 제초제등에 의존한다.  수확량은 예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지만  땅은 자연의 힘을 잃어가고 우리가 먹는 음식은 농약에 찌들어 버렸다.  농업에서 뿐만이 아니다. 구제역이니 광우병이니 하는 것들이 생겨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산업화된 출산은 산모로부터 자연스럽고 자기의지적인 출산의 자유를 빼앗아  모든것을 의사의 권위 밑에 두었다.  산모는 환자로 분류되고 출산은 수술대 위에 누워 환한 조명 아래 의사와 간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다.  의사는 언제든 필요하면 제왕절개 진통유도 약물 투입에 개입한다. 사실 산모나 다른 가족의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다.
저자는 출산시에 기술적인 개입이 많을수록  그 아이는 공격적인 성향의 아이로 자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난 문화권은 그만큼 더 폭력적으로 될 가능성 또한 높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늘어나는 십대들의 약물복용 ,자살, 폭력, 범죄, 알콜중독등도 산업화된 출산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 역시 간단하다.
산업화된 농업의 대안은 유기농업이다.  땅의 힘을 살리는 농업이 인간이 사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산업화된 출산의 대안은 최대한 기계나 의사가 개입하지 않는 자연분만이다.
저자는 특히 자연분만을 위해 지켜져야 할 요소로 산모의 프라이버시, 흐릿한 조명,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아버지가 참석하지 말 것을 권유하고 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산모의 진통이 시작되면 마을에서 아이를 받아본 경험이 많은 나이 지긋한 여자 어른을 데리고 왔다. 그 여자 어른은 때로 할머니가 될 수도 있고 어머니가 될 수도 있었다.
산모는 익숙하고 편안한 자기 집에서 어머니나 할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다.  예비 아빠는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출산은 전적으로 여자들의 문제였다.
지금이라면 집에서 아이를 낳는 일은 위험하고 감염 가능성이 큰 모험으로 여겨진다.
수천 년 여자들은 집에서 아이를 낳아 왔는데도 말이다.
 
저자가 주장하듯이 오늘날 산업화된 출산이 태어나는 아이들을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의 아이들로 만든다는 주장에는 전적으로 동감하지는 않는다.  다소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전혀 영향이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태어날 때의 환경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일 뿐이다.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정성으로 대움받고 태어난 후 사람의 정성과 사랑 속에서 자란다면  병원에서 출산했든 제왕절개로 출산했든 바르게 자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연스런 분만으로 태어난 아이라도 얼마든지 잘 못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각성의 의미정도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내가 아이를 갖게 되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병원은 싫다. 편안하게 꾸며진 방에서 내가 원하는 자세로 아이를 낳고 싶다. 그럴 수 있는 곳들이 요즘은 하나 둘 생기고 있다. 자연스럽고 조용한 출산의 바람은 이미 불고 있다.
오늘날처럼 과학과 물질문명이 발달한 시대에 모든 것을 옛날처럼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그것이 다 바람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아이가 행복한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온다면 이 세상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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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 할 길
M.스캇 펙 지음, 신승철 외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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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한편에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에 대답해주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질문에 정답이 있을까마는 답해주는 이들은 단지 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만 있을 뿐인데 답을 구하는 사람들은 달을 쳐다보는 대신에 손가락만 쳐다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는 묻는다.  달은 어디에 있느냐고.

세상에 널려있는 수많은 삶의 지침서나 교훈적인 내용의 책, 성자나 현인들의 말씀을 실은 책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사랑의 의미, 삶의 의미, 죽음의 의미, 보다 행복해지는 법, 진정한 자아를 찾는 법, 고통을 이겨내는 법등, 질문은 끝도 없다.  그리고 찾는다.  무언가 자신들의 질문에 대답이 될만한 것들을.

교회를 가기도 하고 절에 가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성자나 현인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고 한다.  그 모든 것들 속에 자신들이 찾는 대답이 들어있는 것 같으면 사람들은 무언가 안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무언가 찾은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여 기쁜 마음으로 현실의 삶속에 돌아온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모든 것은 다시 되풀이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는 내가 달이 아닌 손가락 끝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물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이 내겐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감동이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것도 아니다.  사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시간동안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아야 했다.

아마도 이 책에는 잘 드러나 있지 않은 작가의 삶의 이면이 궁금했던 것과 내안에 있는 교만함이 작용했던 것 같다.  자꾸 책의 한계가 느껴지니 말이다. 그 한계가 나 자신의 한계가 아니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적어도 몇 가지 면에서 나는 스캇팩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나는 사랑에 대한 그의 시각이다.

스캇팩은 사랑을 '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 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 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적인 성장은 스스로의 문제를 직면할 수 있는 용기에서부터 비롯된다.

저자는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전체적인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게으른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보기를 두려워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정신을 성숙시키기는커녕 타인의 정신적 성장까지 가로막는다. 그래서 게으름을 스캇팩은 죄라고까지 말한다.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고 참다운 사랑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 훈련 - 저자는 이 훈련을 배움이라고도 바꿔 말한다.- 이 필요하다는 말에도 어느 정도 동감한다. 사랑도 하나의 배움의 과정이다.

사랑이라는 것에서 잘못되고 거짓된 것을 구별하고 참되고 진실 된 것을 찾아내는 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움과 훈련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오로지 참다운 사랑만이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의 영혼까지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라는 질문에 그 해답을 신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저자의 권유도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를 떠나서 한 번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한 주제인 듯 하다.

저자는 개인의 정신적 성장은 결국은 신과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며 그 과정 속에서 신의 은총이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저자의 종교적 신념으로 보고 넘어갈 수도 있겠고 자신의 문제로 가지고 들어와 한 번 고민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을 쓸 때 저자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미 저자의 마음속이나 생각 속에 나름의 종교적 신념과 믿음이 분명히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다행인건 저자의 종교적 신념이 상당히 진보적이고 개방적이어서 상당부분 종교적 편협함을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인의 시각에서 볼 때 더 많은 비판을 받지 않을까 싶다.

정신분석의인 저자는 수많은 임상사례들을 통해 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의 정신적 성장을 성공적으로 이뤄나가는지 혹은 실패해 나가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환자 한사람 한사람을 올바를 삶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을 여기저기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개인의 정신적 성장을 돕는 것, 저자는 그것이 정신분석의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만한 정신분석의가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 든다.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스캇 팩은 이 책에서 여러 가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보려고 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찾으려 고 하는 사람은 이 책을 통해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적어도 저자가 삶을 통해 실현하고 깨달은 깊이만큼의 진실이 찾으려 하는 사람에게는 전해질 터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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