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가
케빈 워릭 지음, 정은영 옮김 / 김영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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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이보그로 진화할까?

진화는 인간에서 그 끝을 본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되어 언젠가 지금의 인간종은 사라지고 지금과는 전혀다른 신인종이 촐현하게 될까?  캐빈 워릭은 그렇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신인종은 사이보그가 될 것이라고.

인간과 기계의 결합, 또는 인간의 마음을 갖게 되는 기계의 이야기 따위는 SF소설의 소재가된지 오래다. 그래도 사이보그니 로봇인간이니 하는 것이 이야기속에서  현실의 세계로 쉽게 걸어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캐빈 워릭은 그 자신이 직접 사이보그가 되어 보임으로써 그 현실을 앞당긴 인물이 되 버렸다.

이 책은 그런 캐빈 워릭의 이야기다. 과학자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과, 사이보그가 되기위한 실험의 대장정, 그리고 그 결과 그가 느끼고 알게 된 사실, 그가 바라보는 미래의 전망까지가 담담한 어조로 쓰여있다.

캐빈 워릭이 전망하는 미래의 사이보그 세계는 이러하다.

인간은 신체에 이식한 인공칩과 컴퓨터 네트워크가 서로 연결됨으로써 외부로 무한히 확장된 개념의 업그레이드 된 인간이 될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해 인간의 신경망이  서로 연결되어 정보의 자유로운 교환이 가능하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주고 받는 사회가 될 것이다. 언어는 점점 필요없는 것이 되 버리고 인간의 능력은 지금보다 더 확장될 것이다. 기억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음으로써 인간의 기억력은 크게 향상될 것이다.

이러한 확장된 인간인 사이보그가 미래의 사회를 지배하게 되고 지금과 같은 인간은  아류로 전락하여 점점 도태된다.

사이보그는 인간의 일부가 기계화 된다는 점에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많은 혼란과 의문을 가져올 수 있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인간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많은 개념에 수정을 가져 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이건 가정이다. 캐빈 워릭이 그리고 있는 미래의 사이보그 세상은 그의 생각에  불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실험을 통해 그가 전망하는 미래의 가능성 몇가지를 시현해 보였다.

이미 기계는 인간의 일부가 되어있다. 인공 심장이나 몸의 기능을 도와주는 여러 기계장치를 비롯하여 인터넷이나 핸드폰이 없으면 당장 불편함을 느낄정도로 기계와 가깝게 지내고 있지 않은가?

컴퓨터나 핸드폰등이 과거의 인류보다 현재인류에게 더 많은 능력을 부여하고 더 확장된 세계를 열어 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런 기계적 요소들이 인간의 신체내부로 들오옴으로써 더 자유롭고 강력한  능력을 갖게 되는 쪽으로 인간이 진화해가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미래의 모습이 어떻든 과학의 발저은 끊임없이 인간의 사고와 가치에 수정을 요하고 때로는 혁신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이보그도 그렇고 복제인간도 그렇고 장기만 제공하고 버려지는 무뇌인간도 그렇고 밖에서 이뤄지는 수정과 출산도 그렇고...

조만간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옳다고 믿고 있는 많은 가치들이 완전히 달라지는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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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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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림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으려면 그 그림속에 화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영혼이 그림 속 화가의 영혼과 만났을 때 비로소 그 그림은 내게 의미있는 것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고흐의 자화상을 보았을 때 나는 그 비슷한 마음의 울림을 느꼈다. 고흐에 대해 알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고흐를 만나고 그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아주 잠시라도..

나는 고흐에 대한 제 3자의 글이 아닌 고흐 자신이 직접 쓴 편지글 모음을 골랐다.

이 책엔 고흐가 동생 태오에게 보낸 편지들로 주로 이루어져 있다. 단 몇 통만이 다른 사람에게 보낸 편지일 뿐이다. 고흐는 동생에게 800통이 넘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이 책에 실린 편지의 내용은 주로 경제적인 도움을 호소하는 것과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 대한 것들인데 그 속에는 고흐의 고뇌와 좌절 기대와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무엇보다도 고흐가 그림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상을 사람을 사물을 얼마나 애정어린 눈으로 보고있는지를  알 수 있다.

고흐는 경제적인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는 평생을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으며 모든 경제적 원조를 동생으로부터 받아야만 했다.

동생에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는 것에 대해 고흐가 얼마나 괴로워 했는지 그가 쓴 편지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돈은 꼭 갚겠다. 안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 "

반면 그림에 대한 열정은 지독한 가난과 고독 속에서도 고흐가 살아갈 유일한 희망이 되주었다. 고흐에게 그림은 자신을 나타내고 삶의 의미를 찾으며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많은 화가가 그랬듯이 고흐는 그림으로 세상에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고흐는 빵을 살 돈으로 캔버스를 샀고 물감을 샀다. 먹는 걸 포기해도 그림은 그렸다.

검은 빵과 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버티며 그려낸 그림들이 허다하다.  고흐의 유명한 그림들은 모두 그러한 고통의 과정속에서 탄생했다.

고흐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강렬하면서도 원색의 꿈틀거리는 이미지는 고통가운데 그가  피워낸 영혼의 꽃과 같다.

고흐가 그림 속에서 내게 말을 건다. 그림 하나하나 마다 이야기가 있고 땀의 노고가 있고  인간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있다.

나는 조용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내게 오는 그의 이야기를...

 

지나고 나서 : 고흐의 가난에 대한 부분은 과장된 면이 많다는 시각이 있다.  고흐를 극적인 비운의 화가로 만들기 위한 채색이 그의 인생에 가해졌단 얘기다. 분명 맞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 대해서 혹은 무언가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얻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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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 푸른숲 비오스(Prun Soop Bios) 1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푸른숲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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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그 시작이 있고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원죄를 벗어던질 수 없으며 오로지 예수라는 한 존재를 통해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의 구원자이자 메시아로서의 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물론 많은 기독인들이 그 믿음 속에는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철저히 실천적이며 자기
초월적인 메시지가 있음을 잊는 경우가 많지만 어쨌든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이 죄로
부터 구원을 받고 마음의 해방을 얻기 위해서는 신에 대한 믿음과 그에 따른 보상으로서 신의 자
비가 필요할 뿐이다.
 
붓다는 그런면에서 기독교와는 매우 대조적인 입장에서 인간의 구원과 해방의 길을 제시한 사람
이다.  물론 붓다 자신은 예수를 몰랐겠지만 말이다.
 
붓다의 삶을 바라보고자 함은 이렇듯 그가 자기 안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붓다는 인간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인간 내부에 있다고 보았다.
내안에 괴로움을 일으키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집착이 있고  괴로움
과 고통이 있다.
따라서 내가 그 욕망의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나는 마음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를 
것이었다.
붓다는 바로 그러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였다. 그 스스로 마음의 해방을 이룬 사람이 되었고 해
탈의 경지에 이르렀으며 인간이 가야할 참된 길을 발견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가 되었다.
 
붓다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내가  말하기에는 어렵다.
다만 이 책을 쓴 카렌은 매우 깊고도 세심하게 붓다를 이해하고 있어 그녀의 눈을 따라 붓다의
일생을 되짚어 나가면서  이해할 뿐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붓다가 한 말의 내용보다는 그가 보여준 삶의 태도에 있다.
붓다는 '내가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나를 믿어라' 라고 한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너희도 될 수 있으니 스스로 깨어나는 자가 되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붓다 자신이 하는 말을 믿지 말고 그 말이 사실인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확인해보도
록 이끈 사람이다.
붓다가 위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 아닐까?
 
나는 예수가 나를 믿어라 라고 했던 말도 붓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예수가 말한 믿음은 결코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나와 같은 삶을
공유하자는 뜻이었을 것이고 나와 같은 길을 가자는 호소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너희가 천국에 이를지어다 라는 말은 하늘 어딘가 존재하는 천국이 아니라 마음속의
천국일 거라고 믿는다.
누구든 예수와 같은 삶을 실천적으로 살아간다면 죽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마음속의 천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붓다가 말한 해탈의 경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붓다는 인간으로서 가기 힘든 길을 걸어갔다. 그리고 도달하기 힘든 경지에 올라섰다.
그러나 붓다가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은 그가 자신의 삶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수 많은 스승과 안내자를 만날 수는 있으나 결국 깨달음의 길은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것임을 말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
 
붓다는 생전에 수 많은 제자와 상가를 거느렸지만 죽을 때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작고 보잘
것 없는 마을에서 평생을 따라 온 제자 한명과 그를 따르는 몇명의 사람들 속에서 죽었다.
자신을 숭배하거나 우상시하는 것을 철저히 금했던 붓다의 소박하고 자유로은 죽음이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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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크로노스 총서 4
카렌 암스트롱 지음, 장병옥 옮김 / 을유문화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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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한 편견과 오해는 사실 이슬람에 대한 무지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보통 이슬람하면 지하드, 차도르를 입은 여성,무장단체, 테러, 이런것들을 떠올리기 쉽다.

이런것들은 기독교하면 예수의 인자한 얼굴이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구절 따위를 떠올리는 것에 비해 상당히 대조적이다.

이슬람에 대해 특히나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는 서양문화의 영향탓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서양은 오래전부터 이슬람을 오해와 편견의 눈으로 바라봐 왔다. 십자군의 패배가 서양인들의 마음속에 이슬람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를 갖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이슬람에 대한 서양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자 하는 목적으로 씌여졌다.

카렌은  모든 종교에 대해 매우 균형있고 공정한 시각을 갖고 있는 종교연구가로 유명한 작가다.

이 책에도 그런 카렌의 태도는 잘 나타나 이슬람에 대한 그동안의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보인다.

작가는 먼저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무함마드에 의해 시작되는 시점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슬람의 성서 즉 코란의 구절들과  무함마드의 행적을 통해  이슬람이 원래가 폭력이나 전쟁과는 거리가 먼 자비와 관용과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임을 지적한다.

또한 이슬람은 코란에 나와있는 이상적인 움마 공동체를 현실 가운데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종교임을 밝힌다.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어 있는 서양과 달리 이슬람은 종교와 정치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슬람사회를 바라보는데 매우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슬람인들은 정치를 그 안에서 신을 체험하고 종교적 삶이 실현되는 하나의 장으로 보고있기 때문에 무함마드의 사망이후 현재까지의 이슬람의 역사는 종교를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한 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서양의 역사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다. 서양식 민주주의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특히 더 그렇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폭력성과 과격함의 일부는 서구식 가치관에 의해 그들의 가치와 신념이 도전받데 되는 상황에 대한 불안에 기인하고 있다면서 그 책임의 일부가 서양에 있음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폭력성과 과격함은 이슬람의 원래 가치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드러나는 현상만으로 이슬람을 판단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들의 끊임없는 분쟁, 서로 핵무기를 겨누고 있는 파기스탄과 인도, 이러한 상황속에서 서양식 가치판단으로만 이슬람사회를 바라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쪽이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 앞서 일단 알아야 하지 않을까?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이슬람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이 책 한권만으로도 이슬람에 대한 폭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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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6-05-2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카렌 암스트롱의 저런 책도 국내에 번역돼 있었군요. 몰랐네요. :)
 
아인슈타인 피카소 - 현대를 만든 두 천재
아서 밀러 지음, 정영목 옮김 / 작가정신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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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과 피카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의 전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별로 공통점이 없을 것 같은데 놀랍게도 작가는 두 사람 사이에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아인슈타인과 피카소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들려준다. 그것도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는 20세기의 같은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다. 20세기는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발견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대였다.

과거 그 어느때보다도 빠른 속도로 과학이 발전하고 새로운 사상과 생각들이 봇물 터지 듯 터져 나오고 과거의 생활을 결정하던 많은 것들이 변화를 맞이하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발상과 변화의 욕구를 느꼈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는 그러한 변화의 흐름을 느꼈으며 과학과 미술에 있어서  새로운 관점, 새로운 시각을 창조함으로써 20세기 현대의 문을 열었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이란 그림에서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의 그림을 창조해 냈고,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그 전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꿨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각자 과학과 미술에 있어서 전통적 영역을 부수어 버리고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낸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제시한다.

당대에 유명하고 천재적인 화가와 과학자가 두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아인슈타인과 피카소 두 사람만이 남들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업적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두사람의 천재성은 어떤 조건에서 발현된 것일까?

사실 여기에 저자가 이 책을 쓴 목적이 있다.

저자는 두 천재의 창조성이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에서 일련의 법칙과도 같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이루어내는 시기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중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창조성이 발현되는 내적 메커니즘이 흥미롭다.

흔히 과학자들이나 시인들은 유레카와 같은 상태를 고백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즉 어떤 창조적인 사고나 문제 해결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된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고들 말한다.

저자는 이 갑작스런 깨달음의 경험이 사실은 무의식속에서 저장된 의문이 스스로 해답을 찾아 오랜시간 사유하고 고민해온 결과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 과정이 의식적 사고, 무의식적 사고, 깨달음, 증명이라는 사이클을 통해 발현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무의식속의 작업은 의식적인 작업의 시기가 없으면 진행되지도 않을 뿐더러 답을 얻을 수도 없다.

아인슈타인이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의 논문을 쓴 시기는 2주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구상은 이미 10년도 넘게 아인슈타인을 괴롭힌 문제였다.  일단 의식된 문제는 무의식속의 장기 기억센타에 저장된 후 계속 새롭게 얻는 정보들을 통해 조합되고 충돌하다 어느 순간 하나의 고리에 연결되듯 의식의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천재의 창조성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시간 사고의 숙성이 있은 다음 얻어지는 것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매우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사실 그러한 경험이야 천재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의식하고 있지 않더라도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고민들이 어느 한 순간 해결되는 그러한 순간의 경험 말이다.  재밌는것은 아인슈타인이과 피카소 자신은 이전의 사고방식을 깨는 혁명적인 업적을 이루었으면서도 그들 자신의 사고를 넘어서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미술에 있어서 입체주의를 넘어선 순수한 추상을 인정하지 못했고 아인슈타인은 양자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인슈타인과 피카소 모두 자신들의 혁명의 의미를 발전시켜나가는 흐름에는 동참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기엔 그들의 업적이 너무나 위대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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