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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이야기
다이안 세터필드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날은 어두워지고 창밖엔 흰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데 환한 불빛이 밝혀진 조그만 방에 나이든 할머니와 손자 손녀들이 오종종 모여 있다.
시골 밤은 길고 아이들은 심심하다. 아이들은 화톳불을 뒤적이며 밤을 굽고 있는 할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할머니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주세요. 아니 난 무서운 이야기가 좋아요. 손자들의 청에 할머니는 슬그머니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옛날 옛날 계모와 살게 된 착한 소녀가 있었는데...옛날 옛날 머리에 뿔 달린 무서운 도깨비가 있었는데... 할머니의 이야기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 되고 아이들이 하나 둘 이야기 속에 빠져들다 잠이 들면 못다 들은 이야기는 꿈속에서 계속 이어질 것이다.
지금은 이런 상황을 상상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요즘 아이들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얘기는 콧방귀도 안 뀌고 나쁜 계모얘기는 교육상 좋지 않다고 대들고 도깨비는 유치하다고 거들떠보지도 않을 테지만 예나 지금이나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사람들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는 법이다.
이야기의 힘 사실 그건 상상력의 힘이다. 이야기가 재미있을수록 작가의 상상에 의해 창조된 인물과 배경은 사실감은 얻고 구체화되어 마음속에 그려진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현실과 같은 힘을 얻는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재미와 매력을 넘치도록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책을 손에 놓을 때까지 재미와 흥미를 잃지 않는다. 600페이지 가까운 두께지만 하루 낮 하루 밤이면 충분하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옛날 옛날에, 유령이 사는 저택이 있었지!
옛날 옛날에, 책으로 둘러싸인 방이 있었어!
옛날 옛날에, 쌍둥이 소녀가 있었어.......
수십 개의 방이 있어 그 중에는 하인들도 잘 모르는 비밀스런 방이 한두 개쯤 있고, 구석진 다락방에선 밤이면 유령이라도 나올 것 같은 커다란 저택에, 괴팍한 주인이나 아름답지만 어딘가 모르게 이상한 여인이 나오고, 비밀스런 출생과 죽음, 괴기스럽고 음산한 음모와 비정상적인 관계들. 사람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수수께끼 같은 전모들이 하나둘씩 베일을 벗으면 그제야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들과 반전.
이런 유의 상투적인 배경과 인물들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절대 내 취향은 아니다. 차라리 숨 막히는 추리소설이나 스릴러물을 읽는 쪽이 더 낫다. 순전히 재미를 위해서라고 해도 별로 펼쳐 보지 않는 종류의 책이다.
그런데 한꺼번에 주문한 책속에 이 책이 들어 있었다. 분명 무언가에 끌려 구입도서 목록에 올려놓고는 그 무엇이 무엇인지 잊었던 게다.
그 무엇은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인간에 대한 혹은 삶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이나 주제의식이 있는 책도 아니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거나 읽고 나서 두고두고 마음에 여운이 남는다거나 하는 책은 분명 아니었지만 이 책은 일단 재미있다.
다행히 독자들의 섣부른 추리를 용납하지 않는 결말과 마지막까지 잃어버리지 않는 적절한 긴장감이 상투적일 수 있는 이야기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주고 있다. 게다가 주인공은 헌책방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딸이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작가다.
그럼으로 인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책에 대한 열정과 애정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또 하나의 덤이다.
긴 겨울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이 사방의 소음마저 삼키어 버린 밤, 책을 읽다 보면 커다란 저택의 숨겨진 방에서 소곤거리는 비밀얘기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저택의 일부가 되어 은밀한 음모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인물들, 그리고 좀처럼 공감이 가지 않는 주인공들의 심리상태. 그러나 한편으론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들, 있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 그리고 내 안에도 숨어 있을지 모르는 심리들.
소설을 읽다보면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기도 하고 때론 경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 그 이야기에 숨길을 불러 넣어 살아있는 생명을 지니게 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때론 죽어 있는 글을 만나기도 하고 화석이 되어버린 글들에 실망하기도 하지만 꿈틀 꿈틀 살아 움직이는 글을 만나면 세상이 그만큼 더 충만해진 것 같아 뿌듯해지고 배부른 느낌.
주말 내내 책 속에 파 묻혀 그런 글들, 그런 이야기들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했던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