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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고의 숲
로버트 홀드스톡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늘 신화를 창조해왔다.
태초의 인간이 태초의 하늘을 본 순간부터 인간은 자연과 사물 그 이면을 힐끗거리며 보이는 모든 것에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신화는 그러한 인간 상상력의 창조물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질서한 것에서 질서를 찾아내고 실체가 없던 것을 구체화 시킨다. 그리하여 꽃은 더 이상 단순한 꽃이 아니라 누군가의 넋이 깃든 것이 되고 나무는 시원의 지혜를 알고 있는 정령이 되고 하늘과 땅은 각각의 세상을 주관하는 신들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 된다.
인간의 상상력이 신화를 만들어 내고 신화적인 심상과 이미지들을 창조해 낼 때, 인간이 추구하는 삶의 원형은 구체화되고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인간은 완성된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류가 꿈꾼 이상적 인간의 모델이었던 셈이다.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시련을 극복해 보임으로써 신들과 대등한 자리에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인간은 신화적 삶을 잃어버렸다.
신화는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신화 속 영웅들은 힘을 잃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실체들로 가득 찼던 숲은 더 이상 정령도 요정도 사연도 없는 삭막한 곳이 되었고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경외하지 않는다. 신은 죽거나 지극히 높은 곳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해 낸 신화적 실체들은 아직도 우리의 의식 저편에 남아있다. 시대와 장소에 따라 외형은 끊임없이 변화해 왔지만 태곳적 심상들은 하나의 원형으로 자리 잡아 인간 의식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는 사라진 것 같았던 태곳적 원형과 심상들이 의식의 배경을 이루며 끊임없이 인간의 삶과 사고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태곳적 원형과 이미지들로 가득 찬 미사고의 숲은 사람의 무의식적인 사고를 실체화하는 불가사의한 힘이 존재하는 곳이다. 이 숲에선 인간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신화적 심상들이 여전히 실체를 유지하며 하나의 원형이 시대를 바꿔가며 달라지고 변형되면서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책 속에 등장하는 헉슬리 집안의 세 남자는 숲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처녀 귀네스에 사로 잡혀 미사고의 숲으로 빠져들어 간다.
결국 그들의 무의식의 심상이 실체화 된 것에 불과할 뿐인 귀네스는 헉슬리 집안 남자들의 무의식에 새겨져 대대로 내려온 이상적 여성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들이 잃어버린 낙원의 한 조각 꿈이었을 수도 있다.
귀네스를 찾아 미사고의 숲으로 들어간 세 남자들의 여정은 신화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여정과 닮아 있다.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며 결국 그들은 미사고의 숲에서 그들 자신이 하나의 신화적 인물로 변형되어 간다. 자신들이 꿈꾸던 미사고가 되어.
나는 꿈을 꾸는 기분으로 미사고의 숲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그 숲에서 나는 나의 미사고를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나의 미사고는 분명 길잡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한눈에 나의 미사고를 알아볼 테지.
그러면 나의 미사고는 내가 궁금해 하는 세상으로 나를 안내해 줄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생의 이야기꾼을 만나 잊혀진 다른 세상의 이야기를 들을지도 모르고 내 잃어버린 꿈 한 조각을 찾을지도 모르지.
책을 읽으며 나는 내내 이런 상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