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양장) - 히로세 다카시 반핵평화소설, 개역개정판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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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체르노빌’은 느낌일까, 사실일까? 


이성복 시인은 노래했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방향으로 진행 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일상적 삶을 사는 우리에게 1986년 체르노빌은 1945년 히로시마 원폭, 1945년 드레스덴 폭격과 같이 역사 속 ‘사실’ 일뿐이다. 그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의 거리가 멀면 멀수록 그렇다. 그곳의 피해자는 그저 ‘패전국 국민들’이고 세상에서 유일한 개체, Singularity는 인식되지 않는다.


문학의 책무가 그렇듯이 ‘체르노빌의 아이들’도 사실을 느낌으로 전달한다. 그때 그곳에서 일어났음직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서 개체로서 생명이 경험했던 고통스럽고 슬펐던 느낌을 전달하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방사능이 그들의 일상을 어떻게 구속하고 병들게 했는지 보여준다. 


체르노빌 핵 발전소 사고로 죽은 사람은 정확하게 집계되지 않았다. 유엔 원자방사선의 영향에 관한 과학 위원회(UNSCEAR)는 64명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숫자를 말하기도 하고 IAEA는 4,000명이라고도 하지만, 피해 규모를 공개하지 않은 소련 당국의 노력(?)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는지 정확하지 않다. 


어느 분인지 이런 말을 했다. “후쿠시마 사고로 죽은 사람은 몇만 명이다. 우리는 그저 ‘후쿠시마 지진과 핵 발전소 사고’라는 사건 하나만을 기억하겠지만, 사실 생명 하나하나를 생각한다면 몇 만개의 사건이 동일시간에 발생한 것이다.” 


체르노빌의 아이들, 사실을 느낌으로 전하려는 작품이지만 아직도 나는 사실에서 그리 깊이 가지 못했다. 체르노빌, 후쿠시마가 내 손톱에 박힌 가시보다 나에게 더 강력할지 여전히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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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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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내용의 소설과 영화를 여러개 보았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몇해 전 읽었던 '바디 The body'와도 비슷한 주제였다. 단지 SF적 요소의 강약 차이다. 인체 장기를 병들 때 마다 교체하거나 아니면 쇼윈도에 전시된 새로운 body를 선택해서 자신의 두뇌만을 옮기거나.. 장기 이식은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한 시기다. 자신의 복제인간-클론의 생성도, 아마도 머지 않아 가능하리라.


잠깐 생각해 본다. 먼 훗날 소수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 지금 보다 더 많은 권리를 박탈하지 않을까? 지금도 우리는 단지 먹고, 자고, 입는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바로 옆의 이웃들을 착취하고 동물들을 학대한다. 그런데 생명 연장의 욕구가 해소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희생될까? 


'클론에게도 인권은 있는가'라는 새로운 윤리 규범은 생각 할 필요없다. 지금 여기, 우리의 생존 댓가로 희생되는 동물들의 권리가 유린된다면, 그들은 말 할 필요가 없으리라. 인간 손을 거치지 않은 신의 영역 피조물도 가볍게 무시되는 현실에서 동물 공장과 인간 공장의 생산물은 그저 상품에 불과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봇과 클론의 경계는 애매모호하다. 소설에서 잠깐 비쳤듯이 클론에게 영혼이 있는 것이 증명되어 기본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면 로봇도 동일한 논리를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닐까? 생체 공학과 인공지능의 발달로 클론과 동일한 수준의 영혼이 로봇에서 발견된다면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로봇에게도 보장해야 할까? 


너무 멀리 나간 것 같다. 성장기의 우정, 사랑, 슬픔 등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런 우울한 생각은 어울리지 않는다. 또 한편, 나의 저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생명 연장의 욕구를 부정하지 못하며 가볍게 한숨 쉰다. 이건 단지 이기적 유전자의 농간이라고 핑계대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뻔뻔하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나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여기서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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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의 유토피아
김영종 지음, 김용철 그림 / 사계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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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겐 유토피아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꿈, 이상, 비전이 가장 많이 들리고 보이는 단어였다. 그리고 가장 자주 말하는 단어였다. 꿈이 없는 청소년은 나사 빠진 아이들 이고 비전 없는 직장인은 맥없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존재였다. 아빠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라며 부모는 아이에게 꿈을 강요했다. 학교와 사회에서도 꿈은 일찍 가질수록 좋은 것이라며 부추겼다. 


꿈은 원대하게, 이상은 높게, 비전은 명확하게..


그러나 현실은 팍팍했다. 몽상적인 꿈은 허용되지 않았고 구체적인 것만이 꿈으로 인정되었다. 학교와 학원에서 아이들은 구체적인 꿈을 강요 받았다. 중고등학생, 심지어 더 어린 초등학생이 의사, 법조인, 펀드매니저를 꿈꾸었다. 아이들은 부모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 받아 꿈을 ‘만들었다’. 그들은 병든 사람을 고치고,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고, 공익을 위한 돈벌이와 같은 그나마 희망적인 바램이 아니라 구체적인 ‘직업’을 말하는 요지경이 펼쳐졌다. 


꿈을 가장하여 직업이 초 절정으로, 조기에 선택되는 기적이 이 땅에 벌어졌다. 


그 직업은 한미 FTA 3대 핵심 시장과 최고 내신 등급 학생의 희망 학과가 겹쳐지는 영역이었다.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동일한 영역이었다. 영리 병원, 법무 법인, 금융 회사는 ‘자본과 권력’이라는 원천적 욕구에 가장 가까운 직업이었다. 그렇다. 그곳은 젓과 꿀이 흐르는 땅, 그들만의 유토피아 ‘라퓨타’였다. 


공중의 섬, ‘라퓨타’ 밑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그들에게 유토피아 ‘라퓨타’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곳으로 가지 못한 아이들은 학교에서, 사회에서 좌절했다. 자신의 현재는 미래를 위한 도약대에 불과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자는 게으르고, 나약하고, 엉뚱한 낙오자로 몰렸다. 꿈꾸는 자, 세상을 지배한다는 목소리는 세상 어디를 가도 지겹게 들을 수 있었다. 


빅브라더의 힘이 작용한 것일까, 그들에게도 꿈은 현실로 다가왔다. 높고 원대함을 반영한 듯이, 구현된 꿈에는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국민 요정 김연아, 국민 남동생 박태환, 국민 가수, 국민 아이돌 누구 누구.. 그 열망은 미디어에서 증폭되어 온 나라에 퍼져나갔다. 그들의 수입이 공개되고 자본가, 권력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결과 매체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그 정점을 향해 모든 이가 웃고, 우는 초 절정 Republic of Dreaming이 되었다. 그곳은 ‘발나바르비’였다.


그러나 꿈꾸는 나라를 의심한 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하늘로부터 떨어진 조명등을 발견했다. 우주와 빛만 존재하는 그곳에서 떨어진 그 조명등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물건이었다. 우주에서 평행한 빛이 우연히 조우 하듯이, 아주 우연히 그의 옆에 떨어진 그 물건은 그에게 의심이라는 단초를 제공했다. Contingent!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꿈꾸는 생활에 빠져 있었지만 그는 그 우연을 주의 깊게 지켜봤다. 


뜨고 지는 태양을, 푸른 하늘을, 넘실대는 바다를 다시 보았다. 정치권 보수와 진보의 주장인 자유•안정•성장•시장의 가치도, 평등•변화•분배•국가의 가치도 의심했다. 결국 자신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했고 또 다른 세상을 상상했다. 금지된 몸의 욕망과 본능의 배를 타고 그는 바다 끝까지 갔다. 거기에서 그는 쪽문을 발견했다. 


너희들의 유토피아는 트루만 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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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버, 세상을 비웃다 - 걸리버와 함께 하는 통쾌한 풍자 여행
박홍규 지음 / 가산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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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느 강연 영상에서 들었던 ‘바닥’과 ‘허상’이 연상된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 하려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자신의 비열한 바닥과 허상으로 포장된 천장을 확인하면 나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으로서 치졸하고 뻔뻔한 모습은 애써 외면하고 포장된 허상을 우리의 모습으로 인식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주체가 확대된 ‘우리’의 사회도 건조하고 차갑게 봐야 한다. 허상만을 바라보면 실현되지 않을 이상향만 꿈꾸다가 ‘나’는 사라져 간다. 한국 사회나 혹은 다른 어떤 사회도 그 바닥에는 저열함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와 국가에서는 역사나 교육을 통해서 이를 애써 포장한다. 사회에 저열함이 존재하는 것은 지배층에게 치명적 약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공포스럽게 바라본 것은 ‘Eating Babies’였다. 기근이 닥칠 때 인육을 먹었다는 그 내용은 어디까지 풍자이며 어디가 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 현실을 반영했으리라 유추해 본다. 실제로 아일랜드뿐 아니라 중국,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인육을 먹었다는 사례를 발견 할 수 있다. 


식인은 야만인의 습속인가? 생존을 위한 신성한 행위인가? 지금 2012년 한국에서 야만을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 아닐까?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그리고 방법이 없었다면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 자신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술과 문화를 추구하는 고매한 존재이기 보다 생명으로서 ‘생존’을 위한 존재이다. 우리 사회의 첫번째 바닥은 비열한 ‘생존’이다. 


아일랜드 철학자 키니(Richard Kearney)가 말했다는 잡종 아일랜드는 의외다. 영국 식민지로서 피해국인 아일랜드를 책망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가 앵글로이면서 켈틱이고, 카톨릭이면서 프로테스탄트이며, 토착적이면서도 식민적이고, 지방적이면서도 세계적이라는 주장으로, 그들이 잡종임에도 순종임을 고집하면서 고통이 배가되었다는 주장이다. 


'영국-아일랜드'의 식민지배 상황이 '일본-한국'에도 동일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이말을 수긍하기 어렵다. 오히려 ‘대동아 공영’이라는 동아시아 순종주의에 일본과는 다르다는 잡종 의식으로 대응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너는 나와 다르다는 의식이 없었다면 항일 투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잡종 의식이 강력한 순종주의로 승화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순종과 순혈을 누가 강조하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순종주의가 '마음은 하나, 그러나 몸은 따로'라는 선별적 순종주의, 결국 타자를 배격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교묘한 말장난이 아닌지 봐야 한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잡종’의식은 인식해야 할 두번째 바닥이다. 


세번째는 걸리버가 마인국에서 발견한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이다. 그러나 걸리버가 상상한 유토피아는 비관적이다. 그가 비판한 궁정의 허례, 황족의 교만, 고관대작의 아첨, 정부의 부패, 정당과 종교 파쟁, 학문의 편협, 교육의 무능, 재판의 불공평 등은 현대 국가에서 아직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지구상 어느 국가라도 300년 전 영국과 아일랜드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는 유토피아라는 지향점을 갖도록 욕구 되어 진다. 몸에서 발산한 본능적 욕망이 아닌 타자의 욕망으로 감싸여 있다. 그것의 정점은 정권 교체라는 열망이다. 탁월한 리더십을 선택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유토피아를 즐겁게 상상한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허상이다. 무한하게 돌고 도는 경제 성장이라는 궤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유토피아는 발견 할 수 없다. 


풍자와 장터의 유언비어가 사회의 건강을 평가하는 척도라면, 지금 한국은 300년전 영국과 아일랜드 보다 건강한지 궁금하다. 걸리버가 한국을 방문한다면 비웃음도 아닌 박장대소를 할 것 같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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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본능 - 불, 요리, 그리고 진화
리처드 랭엄 지음, 조현욱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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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는 채식이다. 요즘 건강 생각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어도 채소를 곁들여 먹으려 한다. ‘구석기 식단’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있었다. 가능한 원형 음식 재료 그대로, 즉 불에 익히지 않고 생식으로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내용이다. 식도락 프로그램에서도 비슷한 주장은 반복된다. 가공 단계가 적은 음식을 섭취하라!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칼로리’가 있다. 채식이나 생식이 주목 받는 이유는 같은 양의 음식이라도 적은 칼로리가 섭취되어 비만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현대인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높은 칼로리’라는 말과도 같다. 부유한 국가들의 중요 이슈가 ‘칼로리 전쟁’이 된지는 오래다.

 

먼 과거, 인류 조상은 열매를 따거나 뿌리를 캐는 수렵 채집 생활을 했었다. 그건 현대인의 말로 바꿔 보면 채식과 생식을 주로 했다는 의미다. 현대인의 고민과는 반대로 칼로리가 높은 음식은 거의 섭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의 조상이 육식을 하는 기회는 매우 드물었다.

 

‘요리본능’의 내용을 단순화 하면, 음식의 칼로리가 인류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신체 변화뿐 아니라 인류 문화 생성까지도 포함한다.

 

인류 조상은 유인원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겁 많고 약한 동물이었다. 낮에는 천적을 피해 나무 위에서 생활을 했고 밤이 되어야 땅으로 내려 올 수 있었다. 그때야 비로서 땅의 먹이 감을 구할 수 있었다. 가끔 죽은 동물의 고기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고기는 입으로 오랫동안 씹어야 했으므로 1 칼로리를 얻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시간과 기술이 필요했다.

 

유인원과 비슷했던 인류에게 극적인 변화는 ‘불의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동물들에게 불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류는 불을 후생의 도구로 ‘우연’히 재발견 한다. 불타고 있는 아프리카 초원을 상상해 보자. 불을 피해 동물들은 도망가고 인류도 마찬가지다. 그러다가 한 무리의 인류가 불에 타서 죽은 동물의 고기를 먹었다. 가끔 먹었던 생고기는 몇 시간을 씹어야 했지만 불에 익은 고기는 부드러워서 쉽게 넘길 수 있었다. 최초의 화식이 시작된 것이다. 더 적은 시간에 1 칼로리를 얻을 수 있었다.

 

1 칼로리를 얻기 위한 후생의 도구로서 불을 재발견하면서 인류는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음식물을 익히면 에너지량이 증가하고 칼로리 추가 없이 단순히 부드러워진 음식물로 체중이 증가한다.  부드러운 음식은 소화력이 높으므로 에너지 효율도 좋아진다. 내장이 작아진 인간은 유인원에 비해 10%정도 에너지가 절약되어 몸의 3%에 불과하지만 25%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뇌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여할 수 있었다. 또한 화식 요리법으로 남자와 여자의 노동 분업도 시작되었다.”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이다.

 

여기까지다. 1 칼로리를 얻기 위한 ‘요리 본능’은 종말을 고했다. 곡물 1 칼로리와 육류 1칼로리를 생산하기 위해서 다른 에너지 16칼로리, 70칼로리를 투입하는 폭력의 시대가 되었다.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자본 환상’은 폭력적인 칼로리 생산 메커니즘을 가동시켰고 세상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로의 진화에 필요했던 칼로리는 인류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역방향의 힘으로 재현되고 있다.

 

다시 돌아보면 인류의 진화, 그 기적은 누군가의 희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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