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세상을 비웃다 - 걸리버와 함께 하는 통쾌한 풍자 여행
박홍규 지음 / 가산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어느 강연 영상에서 들었던 ‘바닥’과 ‘허상’이 연상된다. 사람이 정신적으로 건강 하려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 자신의 비열한 바닥과 허상으로 포장된 천장을 확인하면 나를 투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으로서 치졸하고 뻔뻔한 모습은 애써 외면하고 포장된 허상을 우리의 모습으로 인식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마찬가지다. ‘나’라는 주체가 확대된 ‘우리’의 사회도 건조하고 차갑게 봐야 한다. 허상만을 바라보면 실현되지 않을 이상향만 꿈꾸다가 ‘나’는 사라져 간다. 한국 사회나 혹은 다른 어떤 사회도 그 바닥에는 저열함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와 국가에서는 역사나 교육을 통해서 이를 애써 포장한다. 사회에 저열함이 존재하는 것은 지배층에게 치명적 약점이기 때문이다. 


책에서 공포스럽게 바라본 것은 ‘Eating Babies’였다. 기근이 닥칠 때 인육을 먹었다는 그 내용은 어디까지 풍자이며 어디가 진실인지 분간하기 어렵지만, 그 당시 현실을 반영했으리라 유추해 본다. 실제로 아일랜드뿐 아니라 중국,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 세계 곳곳에서 인육을 먹었다는 사례를 발견 할 수 있다. 


식인은 야만인의 습속인가? 생존을 위한 신성한 행위인가? 지금 2012년 한국에서 야만을 주장하는 것은 무책임한 말 아닐까?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그리고 방법이 없었다면 내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 자신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술과 문화를 추구하는 고매한 존재이기 보다 생명으로서 ‘생존’을 위한 존재이다. 우리 사회의 첫번째 바닥은 비열한 ‘생존’이다. 


아일랜드 철학자 키니(Richard Kearney)가 말했다는 잡종 아일랜드는 의외다. 영국 식민지로서 피해국인 아일랜드를 책망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일랜드가 앵글로이면서 켈틱이고, 카톨릭이면서 프로테스탄트이며, 토착적이면서도 식민적이고, 지방적이면서도 세계적이라는 주장으로, 그들이 잡종임에도 순종임을 고집하면서 고통이 배가되었다는 주장이다. 


'영국-아일랜드'의 식민지배 상황이 '일본-한국'에도 동일했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이말을 수긍하기 어렵다. 오히려 ‘대동아 공영’이라는 동아시아 순종주의에 일본과는 다르다는 잡종 의식으로 대응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너는 나와 다르다는 의식이 없었다면 항일 투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잡종 의식이 강력한 순종주의로 승화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순종과 순혈을 누가 강조하고 있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순종주의가 '마음은 하나, 그러나 몸은 따로'라는 선별적 순종주의, 결국 타자를 배격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교묘한 말장난이 아닌지 봐야 한다.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잡종’의식은 인식해야 할 두번째 바닥이다. 


세번째는 걸리버가 마인국에서 발견한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이다. 그러나 걸리버가 상상한 유토피아는 비관적이다. 그가 비판한 궁정의 허례, 황족의 교만, 고관대작의 아첨, 정부의 부패, 정당과 종교 파쟁, 학문의 편협, 교육의 무능, 재판의 불공평 등은 현대 국가에서 아직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지구상 어느 국가라도 300년 전 영국과 아일랜드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는 유토피아라는 지향점을 갖도록 욕구 되어 진다. 몸에서 발산한 본능적 욕망이 아닌 타자의 욕망으로 감싸여 있다. 그것의 정점은 정권 교체라는 열망이다. 탁월한 리더십을 선택함으로써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유토피아를 즐겁게 상상한다. 그러나 유토피아는 허상이다. 무한하게 돌고 도는 경제 성장이라는 궤도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유토피아는 발견 할 수 없다. 


풍자와 장터의 유언비어가 사회의 건강을 평가하는 척도라면, 지금 한국은 300년전 영국과 아일랜드 보다 건강한지 궁금하다. 걸리버가 한국을 방문한다면 비웃음도 아닌 박장대소를 할 것 같아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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