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델핀 드 비강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뗄레야 뗄 수 없는 숙명 같은 존재.


 종이 위에 물감을 바르고 반을 접어 펴보면 같은 색상의 무늬가 똑같이 찍혀져 있다. 어릴 때 미술시간에 했던 놀이다. 일명 데칼코마니라 불리는 회화 기법은 다양하고 다채로운 효과를 볼 수 있다. 델핀 드 비강의 <실화를 바탕으로>를 읽고 책을 덮으면서 표지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 세계미술용어사전에서 일컫는 데칼코마니의 뜻과 예전에 놀이를 통해 했던 문양과 색감이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다. <실화를 바탕으로>를 읽기 전에 읽었던 <길 위의 소녀> (2016,비채) 역시 두 소녀가 처한 환경이 다르면서도 같은 색채를 드러내는 짠함과 그 사이의 모순이 드러났던 것처럼 이번 작품 역시 두 여자가 주인공이다.


"하지만 진실이란 건 없어. 진실은 존재하지 않아. 내 신작은 붙잡을 수 없는 어떤 것에 다가가기 위한 서툰, 그리고 도달할 수 없는 시도였을 뿐이야. 빛을 꺽는 프리즘을 통해 고통과 후회와 거부의 프리즘을 통해, 그리고 사랑의 프리즘을 통해 이야기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을 뿐이야. 너도 잘 알잖아. 우리가 생략하거나 늘이거나 압축하거나 구멍을 메우는 순간, 우린 이미 픽션 속에 있다는 걸. 나는 진실을 찾았어.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는 근거들, 관점들, 이야기들과 대면했어.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글쓰기는 소설이야. 이야기는 환상이야. 실재하지 않는 거라고. 다만 어떤 책에도 대놓고 그렇게 적는 게 용납되지 않을 뿐이지. - p.90


"난 결과를 말하는 게 아니야 의도를 말하는 거라고. 자극에 대해 말하는 거라고. 글쓰기는 진실을 추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야. 만일 네가 글쓰기를 통해 너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너에게 깃든 것을, 너를 이루는 것을 뒤지려 하지 않는다면, 너의 상처를 다시 열어 건드리고, 네 손으로 후벼파려 하지 않는다면, 네 인격과 뿌리와 환경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의미해. 글쓰기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어야 해. 그 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아. 그래서 내 책이 그만한 반향을 불러왔던 거야. 너는 소설의 영토를 떠났어. 너는 기교와 거짓말과 가신을 떠났어. 너는 '진실'로 돌아왔고 네 독자들은 그 점을 정확히 파악했어. - p.91


책을 읽는 내내 작가를 마주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이 작품은 소설의 화자가 '델핀' 자신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여자의 존재는 이니셜 'L'로 소개 되어 있다. 미스테리적인 기법이 가미되어 몇 권의 책을 출판하여 많은 독자들의 이목을 받은 델핀과 일명 유령작가로 불리는 대필작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L의 끈끈한 추적과 시선은 나도 모르게 L을 자꾸만 경계하게 만든다. 어딘가 모르게 델핀을 자신에게만 몰두하게끔 가두는 '집착녀'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데칼코마니처럼 델핀과 같은 색채와 문양으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여자의 모습으로 감쪽같이 가면을 쓴 것도 같다. 그러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것이 작가의 진짜 이야기인지 아니면 소설 속의 주인공인지 모를 착각에 빠져들쯤 L의 행동이 심상찮다. 더 깊은 심연속으로 빠져 든 것은 독자가 아니라 소설 속 델핀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진짜 델핀이 아니라 소설 속 델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델핀과 L이 주고 받는 실재와 허구의 치열한 공방이었다.


미저리처럼 달라 붙는 L을 자신의 생활에서 멀리 떨어 놓고자 할 때쯤 델핀은 어떠한 이유도 알지 못한채 무방비하게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고, 너무도 당연하게 옆에서 본 것처럼 L이 존재했다. 그때부터 델핀은 몸과 마음 모두 L과 함께 생활 했지만, 다리를 다치기 이전에 펜도 컴퓨터로 작업을 할 수 없을 때 보다 L을 더 믿었던 것 같다. 모순적이게도 델핀은 L의 삶들이 너무도 궁금했고, 두 사람이 함께 쿠르세유에 머물면서 L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글을 쓰고픈 욕망이 생기고, L을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조금씩 더 은밀하게 L을 캐치하려는 델핀과 델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가는 L의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된다.


나는 불현듯 그녀를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L이 처음부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매혹적이고 세련된 여자는 아니었으리라는 야릇한 직감에 사로잡혔다. 그녀 안의 뭔가가, 아주 잘 숨겨서 거의 지각할 수 없는 뭔가가 L이 먼 곳에서, 어둡고 질척한 땅에서 왔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특이한 변태變態를 겪었으리라는 것을 드러냈다. - p.59


나로 말하자면 무엇이든 미리 예측하고 최대한 계획대로 실행함으로써 불안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려 해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p.60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도, 이제는 나름 나답게, 평화롭게, 심지어 조화롭게 사는 것 같은데도, 나 자신의 일부 혹은 전부를 더 매력적인 여성과 맞바꾸고 싶다는 절대적 필요를 더는 느끼지 않는데도 여전히 나는 여자들에 대한 그런 시선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나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깃들었던, 타인이 되고자 하던 무의식적 욕망의 기억을, 마주치는 여자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더 아름답고 더 불순하고 더 빛나는 뭔가를 찾는 내 시선을 말이다. 하지만 어쨋거나 현재까지 내 성적 욕망은 남자들을 향해 있었다. 아랫배에 느껴지는 일렁거림, 떨림, 뜨거움, 가쁜 숨, 깨어나는 몸, 전류가 지나가는 살갗, 이 모든 것은 오로지 남자들과의 접촉으로만 일어났다. - p.76


L이 날큼하게 델핀의 삶을 치밀하게 파고든다면 델핀이 L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다소 느리다. 자신의 코 앞에 위험이 닥쳤을 때 비로소 자신의 위험을 알게되는 델핀의 생각과 행동은 자칫 외나무 다리를 건너듯 불안하고 위태롭다. 오롯하게 델핀의 시선으로 L을 바라보기에 델핀의 위험 수위가 끝에 다다랐을 때 이야기는 점점 더 고조되고, L은 무서운 속도로 델핀을 치받는 것 처럼 느껴졌다. 무서운 속도로 델핀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치밀함과 섬세한 가면이 벗길듯 벗겨지지 않는 무서움이 더해져 델핀을 압박한다.


책을 읽고 나면 L의 행동하는 하나하나가 실재인지 허구인지 헷갈린다. 과연 L이라는 여자는 존재했던가. 제목에서처럼 델핀은 실화를 바탕으로 쓴 글일까 아니면 그녀가 만난 어느 여자의 이야기를 각색해서 실재와 허구를 반반으로 섞어 쓴 이야기일까 하는 물음표어린 질문들이 새록새록 머릿속에 차올랐다. 더불어 델핀 드 비강이 쓴 글이야 말로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2009,민음사)처럼 두 여자의 존재가 아니라 쓰는 사람 즉, 소설가 글을 쓰는 '나'의 모습을 실명인 델핀이라는 여자와 L이라는 여자를 대변해 쓴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사실, 두 여자는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나'이고, 거울을 바라보듯 같은 모습을 하지만 실재와 허구 사이를 오가는 작가인 나를 투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다.


이전 작품에서도 그녀는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 주지 않았고, 서로의 환경이 다른 모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역시 델핀도 L도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는 인물의 특징적인 성격을 규정짓지 않았다. 그것이야 말로 두 사람이 갖는 모순적인 모습과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제약을 두지 않고 생각해 볼 수 있게 연관관계를 두며 작품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런 점이 델핀 드 비강이라는 작가의 작품을 빠르게 하나의 이야기로만 읽기 보다는 천천히 그녀가 만들어 놓은 방 하나하나를 두드리며 열어보고 무언가를 찾게 되는 것 같다. 무엇이라고 정의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실재와 허구 사이를 오가는 자신의 작품의 진의라는 것을 그녀는 글을 통해 명확히 드러내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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