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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ㅣ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6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평점 :
<반의반의반>
모성은 정말 한도 끝도 없을까? 모성은 굳이 비유하자면, 고무줄과 같지 않을까? 어느 한도까진 늘어나지만, 더 힘이 가해지면 끊어지기도 하고, 한도 이내의 힘이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탄성이 약해져서 길게 늘어지기도 하는. 이렇게 여러 유형이 존재할 수 있음에도 우린 최고 품질을 넘어서, 절대 끊어지지 않는 고무줄만을 상정한다. 어쩌면 모성을 너무 이상화시킨 나머지 거의 신격화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강요하기까지 한다. 엄마라면, 할머니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영실은 최근 수술을 받은 후 섬망 증세를 겪었고, 24시간 가까이 자다 깬 적도 있다. 혼자 살고 있으며 이제는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나이다. 은미는 영실의 하나뿐인 딸이다. 우유부단하고 다소 무책임했던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지금은 자기 앞가림은 하면서 산다. 현진은 영실의 손녀이자 은미의 딸이다. 엄마와 함께 살고 직장에 다니는 중이며, 큰 말썽 없이 살아왔다. 어느 날, 영실이 5천만 원을 도난당하면서 이들 사이에 잔잔한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은미와 현진은 저 5천만 원의 존재가 당혹스럽다. 자신들이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영실은 저 돈의 존재를 숨겼으니까. 서운할 만도 하다. 물론 서운함이란 감정 역시 당혹스럽다. 자신들이 속물처럼 느껴져서. 그들이 영실에게 투영했던 건 모성애였다. 모든 걸 베푸는 이상적인 모성애. 하지만 영실은 그러지 않았다. 과거 조금은 젊었을 땐 이 돈을 자식에게 써봤자 소용없다 여겼을 것이다. 은미가 자신에게 기댄 나머지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거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영실은 그럴 수 없었을 거다. 나이 들어 죽음과 혼자서 마주해야 한다는 건 그 세대만이 알 수 있는 엄청난 공포일 테니 말이다. 노화에 잠식당한 영실에겐 공포와 맞설 유일한 수단이 그 5천만 원뿐인 거다. 이제 은미와 현진의 '저 5천만 원'과 영실의 '그 5천만 원'은 같은 돈이지만 완전히 다른 개념이 되고 말았다. 희생을 수반한 모성애와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
자신을 보살피던 존재가 자신이 돌보아야 할 대상으로 전환될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난감해한다.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지만 물리법칙인 관성은 뜬금없게도 이곳까지 적용됨으로써 이전 잣대와 기대를 들이밀어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나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쳤고, 나이를 앞서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단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 중이다. 우린 나이와 나란히 걸으면서 그의 옆모습만 볼 뿐, 그의 앞모습은 절대 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설의 끝부분, 영실이 자신의 요양보호사였던 수경에게 보인 자기기만에 가까운 믿음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현진은 수경이 돈을 훔쳤다고 의심한다. 영실은 현진에게 그 얘기를 듣고서 수경을 두둔하며 역정을 낸다. 그리고,
수경이 정말 돈을 가지고 갔을까? 영실은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했다. 왜인지 그 애가 자신을 여기에 붙들어두려고 그런 것만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유력했다. 실버타운에 가지 말라고 그렇게 나를 말리더니, 바보 같은 것. - <본문 중>
이건 뭔지는 모르겠으나 믿음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그게 무엇이기에 영실이 수경의 입장을 헤아려 보려 하는 걸까? 애석하게도 난 지금 은미와 현진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바라본다. 그들의 나이가 내가 지나온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죽음을 더 가까이 마주하게 되면, 그땐 영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지금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영실의 고집스러움과 괴팍함이. 영실을 바라보는 은미와 현진의 실망하는 시선이. 그들의 해결되지 않을 갈등이.
<바우어의 정원>
저는 지난 삼 년 동안 세 번의 유산을 겪었습니다. -<본문 중>
배우란 직업은 주목과 관심을 받을 때만 의미가 있다. 배우의 내면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기의 바탕으로서만 그렇지 그 자체로 중요하진 않다. 외부로 드러난 부분만으로 평가받는 가장 대표적인 직업인 셈이다. 그런데 사람이라고 다를까? 우린 타인을 평가할 때 눈에 보이는 부분만으로 판단한다. 물론 그 사람의 내면이 일부 반영되었겠으나 그 정도로 만족할 뿐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진 않는다. 아주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세상이란 무대에서 공연하는 배우들일 수도 있겠다.
은화는 배우다. 늦깎이로 유명세를 치르기도 했지만 지난 3년간 임신과 유산을 세 번이나 겪으면서 자기 안으로 침전된 상태다. 그런 은화가 지금 모처럼 오디션을 받으러 간다. 여성으로서 겪었던 이야기를 독백으로 풀어내는 연극의 배역을 맡기 위해서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생각이다. 이 글의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내면의 상처를 고백한다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고름을 밖으로 짜내야 하듯 마음의 상처에서 비롯된 앙금들도 발산시켜야 하는 건 분명하다. 고통을 나누고 누군가의 공감을 얻는다는 것만큼 도움이 되는 일은 없으니까.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은화가 무명 시절 했던 드라마 치료 워크숍도 그런 방편의 일환일 것이다. 다만, 그 공감이 진실되어야 하고, 타인의 아픔을, 그 크기를 넘겨짚지 말아야 한다. 섣부른 위로는 마음의 문을 더 닫게 할 수도 있다.
실은 나 아까 속으로 선배 질투했어. 선배한테 아이가 있는 줄 알고…. 차 뒤에 붙은 스티커를 봤거든. -<본문 중>
그래서 은화는 오디션장에서 한 고백이 아닌, 그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후배 정림의 말에서 회복의 씨앗을 찾는다. 내면의 상처는 단순하지 않다. 원인만 해결된다면 끝일 거라 여기겠지만 그 또한 섣부른 오판이다. 은화가 배우 활동을 하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보자.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고 나온 은화는 크리스마스 풍경이 한창인 길거리에서 통쾌함이 아닌 비참함을 느낀다. 그 비참함의 원인은 자신 또한 그들과 똑같은 인물이 되었다는 모멸감에서 오지 않았을까?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던 은화의 심리는 직접 묘사되진 않았으나 미루어 보건대 정림과 다르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오디션이 끝나고 정림과 함께 있는 차 안에서 정림의 저 고백을 듣는 순간, 은화는 자신 내부에 깊숙이 숨어있던 커다란 상처와 마주한다. 동질감, 공감, 그리고 화해. 은화는 정림을 통해 은밀한 자아와 마주 섰고, 그로 인해 회복의 가능성을 찾는다. 그렇게 믿어본다.
상처, 공감, 회복을 얘기하는 이 소설은 은화가 자신과 비슷한 괴롭힘을 당한 초원이라는 학생과 만나봐야겠단 결심하면서 마무리된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이 만남을 주저했던 은화의 모습과 비교하면 은화는 분명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 모양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세상의 공감 능력은 여전히 떨어지고, 자기중심적이다. 관심을 가졌다가도 어쩔 줄 몰라 하고, 결과에 환호하나 그뿐이다. 정림이 했던 연극의 마지막은 상처 입은 자와 외부인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 아닐까 싶다.
<리틀 프라이드>
오스틴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토미를 다시 한번 보고 싶었어요. 우린 그러니까, 전우 같은 거잖아요." 나는 '전우'라는 말에 다시 어안이 벙벙해져 커튼이 둘러진 병실 내의 다른 침대들과 창 너머의 맞은편 건물을 바라봤다. "아니요...... 저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전혀 달라요." -<본문 중>
무언가를 써볼까 하다 그만뒀다. 그러니까... 난 소설 속 토미(회사에서 부르는 영어 예명)와 같은 트랜스젠더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도가 없다. 내 삶은 내게 주어진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잠식당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온 탓에 태생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에 일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는 내 이해력을 뛰어넘는 수준일 지도 모르겠다. 이런 상태에서 어떤 내용을 끄적인다? 그들의 근본적 욕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그다음에 뒤따르는 문제점들을 이야기한다?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오스틴의 저 말처럼 일부분만 붙잡고서 동질감을 호소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싶다. 그러니 난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그들 또한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갈 존재임이 분명하므로, 그래서 그런 존재로서 바라보고 인정하는 태도를 유지하려 노력할 뿐이다. 지금으로선.
<길티 클럽 : 호랑이 만지기>
작가 노트에서 쳇 베이커의 음악과 우디 앨런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작가의 고백을 읽었다. 그리고 예술가와 개인 사이의 간극을 매개로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다음 따라온 감정은 당혹함이었다. 뭐라도 써볼까 했는데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소설이 전달하려는 바가 너무 명확한가? 은유조차 비껴갈 수 없는 명확함에 내가 끼어들 틈이 없는 걸까? 뭘 써도 동어반복이나 설명이 될 거 같은 아득한 느낌에 어느 순간부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 작가, 뭐지? 30대 이후로 무언가에 덤벼든 적이 없었는데 묘하게 도전 의식을 자극하는 소설이다.
꼬리말)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 있는 부분이 세대 간 갈등과 개인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인데 하필 그 둘이 처음 두 편의 단편이었다. 글이 길어지면서 다른 단편들 역시 따라 길어졌다.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보다 감상을 적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던 기묘한 상황. 그래서 감상도 둘로 나눠 올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