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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햄릿 (한글) ㅣ 더클래식 세계문학 4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한우리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12월
평점 :
뒤틀린 시대로다.
(본문 중)
유럽 전체로 보면, 르네상스란 화려한 토양을 바탕으로 인본주의 문화가 활짝 피어나던 시기. 영국으로 좁혀보자면, 엘리자베스 1세 치하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 하지만 만개하던 꽃들이 고개를 숙이고 절정의 기세가 수그러들 때쯤, 셰익스피어는 감추어져 있던 또 하나의 시대상을 마주하게 된다.
정숙함이 미모를 정숙하게 만들기보다 미모가 정숙함을 음란하게 타락시키는 게 더 쉽지. 이전엔 이 말이 궤변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엔 상식이 되었네.
(본문 중)
그가 알게 된 건 인본주의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서 인간 중심의 사회와 문화를 이루어내겠다는 인본주의는 르네상스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즘으로 대표되는 현실은 인본주의를 한낱 이상에 불과한 것으로 추락시켰다. 앞에선 웃는 얼굴로 악수를 청하지만 그건 가면일 뿐 실제론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세상임을 깨닫게 된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짐작은 했었지만 이젠 확신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햄릿 이전의 셰익스피어 작품들에서 이미 갈등 관계로 인한 비극이 등장하고 있었으니까.
인간은 참으로 조화로운 걸작이 아닌가! 고결한 이성에 무한한 능력! 훌륭한 자태와 감탄할 만한 거동! 그 행동은 천사와 같고 신과 같은 지혜를 갖춘 인간! 이 세상 아름다움의 극치요, 만물의 영장! 그런데 이것이 나에게는 쓰레기처럼 보이니 인간이 흥미롭지가 않아.
(본문 중)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대사를 통해 인본주의를 앞세우는 세상(인간)이 보이는 그대로가 아님을 얘기한다. 현실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상(인본주의)은 그 현실의 들러리로 몰락한다. 만물의 영장이 쓰레기가 되는 순간 이상은 좌절하고 만다. 르네상스란 토양을 양분 삼아 화려한 꽃을 피우려 했으나 토양의 썩은 내를 맡고 쓰디쓴 열매만 맺은 셈이다.
레어티즈에게 난폭한 짓을 한 것이 햄릿인가? 그건 절대 햄릿이 아니야. 햄릿이 미쳐 자기가 자기가 아닐 때 레어티즈를 괴롭혔다면 그건 햄릿이 한 짓이 아냐. 햄릿이 스스로 부정을 하네. 그럼 누가 한 짓인가? 그의 광기네. 광기가 불쌍한 햄릿의 적이라네.
(본문 중)
뭐든 인정하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이 치부를 건드리는 일이라면 더욱더. 햄릿은 미친 척을 하며 자신의 진심을 숨기지만 그가 진정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은 광기를 가장했을 때 품어져 나온다. 게다가 저 대사를 보라. 타인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때 그는 자신의 광기를 핑계로 내세운다. 그의 광기가 '척'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그 시대를 사는 누구도 당당하게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방식이 세상의 핵심이 되어 있었다.
연극의 목적은 예나 지금이나 이를테면 자연에 거울을 비추듯이 선한 것은 선한 모습 그대로, 추한 것은 추한 대로, 이 시대와 이 시절의 참다운 모습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네.
(본문 중)
세상을 살피던 셰익스피어의 눈은 희망 가득한 세상에서 미묘한 균열을 감지했고 이 작품을 쓸 때쯤엔 그 균열의 정체를 알아차린 듯하다. 이상의 몰락과 좌절을 직시한 그는, 그 시대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이상과 현실의 갈등과 긴장 관계를 자신만 가능했던 개성 넘치는 글로써 표현한다. 그의 작품 속 상황이 현대인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도 겉과 속이 다른 세상에 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거 같다. 척하지 않고 대놓고 혐오하고 빼앗는다. 셰익스피어가 요즘을 살았다면, 햄릿은 미친 척하지 않았을 거다. 갈등하지도 않았을 거다. 르네상스의 갈등과 긴장 관계를 벗어던진 요즘을, 특히 대표 인물인 트럼프를 셰익스피어가 봤다면, 그는 햄릿에게 어떤 대사를 부여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