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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사랑과 결함
예소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우리 철봉 하자
너는 너를 돌봐야 해
(본문 중)
자신을 돌보지 못할 때가 있다. 주변 여건 때문에 그런 거라면 상황에 따라 개선의 여지가 있겠지만 그 태도가 나를 특정하는 성향이 되었다면 그때부턴 삶이 고달파질 따름이다. 나를 돌보지 못하는 자가 타인을 제대로 보듬을 리 없다. 그래도 석주는 좋은 친구를 뒀다. 맹지로 인해 석주는 자신을 돌아볼 수 있을 거고, 함께 조금씩 강해질 수 있으니까. 남한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아주 사소한 시절
어쩌자고 다 망가져버렸어
(본문 중)
IMF로 모든 게 무너져 내리던 시절. 그때는 내 의지나 노력과 무관하게 자신이 쌓아왔던 것들이 망가질 수 있는 시기였다. 어른들의 삶이 무너지면 그 그늘에 있던 아이들의 삶도 위태로워진다. 아직 영글지 못한 초등학생 희조의 사소한 오해와 사소한 객기. 그로 인해 평탄할 수 있었던 삶은 요동을 치고,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도 뒤틀린다.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공포가 팽배한 세상은 아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다.
우리는 계절마다
이제 나는 그것이 결코 해방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내던져짐 그 자체였다.
(본문 중)
중학생이 된 희조 앞에 몇 년 만에 다시 나타난 미정. 하지만 '일진'이란 비뚤어진 권력을 배경으로 둘의 관계는 또다시 꼬이고 만다. '우리'를 강요하는 가족은 희조에게 어떠한 심리적 울타리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우리'이고 싶은 미정은 희조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이번 일이 해결된다 해도 한번 찍힌 낙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다음 학기에도, 다음 학년에도.
그 얼굴을 마주하고
나는 내 서사에 완벽하게 가담한 인물이었다.
(본문 중)
희조는 이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다. 집을 나와 토킹바에서 일하면서 그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이 반복됨을 알게 된다. 내 관계는 왜 이렇게 되는 걸까? 그러다 깨닫는다. 자신이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내 욕심과 만족을 위해 타인에게 상처를 줬다.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을 혐오함으로써 자해를 한 꼴이 됐다. 희조는 그런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만 다가올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을 만큼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사랑과 결함
정신병도 유전이야. 유전.
(본문 중)
누군가의 삶을 가둬버리는 말들이 있다. 그 결과를 초래해야 했던 많은 상황을 말살해 버린 채 아주 간략하게. 20년만 살아도 수많은 관계 속에 부대끼면서 그 기억과 망각이 모여 한 사람을 형성하는데. 그런데 우리 인간은 지극히 이기적이라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는 것을 종종 간과하곤 한다. 그래서 나를 가뒀던 간략한 문장들에 치를 떨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타인을 간단한 문장으로 정의한다.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엔 펄펄 뛰면서 내가 남을 가리키는 손가락엔 태연하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이고 피곤할 뿐이다.
팜
세대에 따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다르다. 하지만 실패하거나 좌절했을 때, 또는 성공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별반 차이가 없다.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다를 게 없거든. 세대에 따라 서로에게 기대하는 바도 다르다. 그런데 '기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보니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신이 있다면, 그 신이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다면 마치 무한반복 재생되는 드라마를 보는 느낌일 거다.
그 개와 혁명
웃으면서 눈물을 글썽이게 만드는, 가족에 대한, 관계에 관한 이야기.
분재
어떤 삶에 관여하는 일은 정말 무서운 일이에요.
(본문 중)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러고 산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도블
바람이 불 때 해수면을 변형시키려는 교란력과 그 변형을 막으려는 복원력이 함께 발생하는데, 이 과정에서 바다가 부서지며 파도가 치는 것이라고.
(본문 중)
살면서 일관적이지 못할 때가 있다. 특히 남을 향한 기준과 나에 대한 기준에서. 우습게도 일관적이지 못한 그 태도는 삶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다. 반대로 삶을 고달프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면 바다에 파도가 치듯 우리 삶도 넘실거린다.
내가 머물던 자리
우리는 외따로 태어나서 홀로 자신을 길러낸 사람들이고 지금은 함께 살고 있어.
(본문 중)
세상에 존재를 알리는 순간부터 여러 관계를 맺고 살게 된다. 어떤 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맺어지고 어떤 것은 선택에 기반해 형성된다. 뭐가 됐든 우린 그 관계가 긍정적이길 바란다. '함께'란 단어가 갖는 좋은 의미만을 함유한 긍정적 관계. 함께 나누는 관계. 하지만 나 때문에, 또는 상대방 때문에 그런 관계는 쉽지 않다. 게다가 무엇을 하려 들면, 심지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조차 관계의 균형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세상 어렵지만 세상 쉽게 시작되는 그것, 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