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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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보 같은 소냐 


내가 하느님의 섭리를 어떻게 알겠어요…… 당신은 왜 해서는 안 될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일이 내 결정에 따라 이루어질 수 있지요? 누구는 살아야 하고, 누구는 죽어야 한다고 심판할 권리를 누가 내게 주었나요?(599) 

궤변이 이론인 줄 아는 라스꼴리니꼬프와 달리 소냐는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일찌감치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거리로 나가 몸을 팔았던 여자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어도 시궁창 쥐로 살지는 않았다. 더러운 연못에서 피지만 더러움이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매일 술에 절어 가족들에게 고통을 안기면서 스스로를 모욕하며 살았지만 소냐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밖에 살지 못하는 아버지를 이해하고, 생활고로 정신이 이상해져 가는 계모를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서 자책하는 여자. 착하지만 바보 같은 소냐. 그래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가 바보같은 성인 '유로지비'가 아닐까 생각한다. 라스꼴리니꼬프라면 없애버려야 마땅한 ‘이’들에게 소냐는 자진해서 제 몸을 내어주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여동생이 자기를 위해 희생하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데 소냐는 자기를 팔아먹은 부모인데도 원망하지 않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전당포 노파를 죽인 후 그는 무턱대고 소냐를 찾아간다. 그리고 소냐를 자극하고 괴롭힌다. 당신은 가족을 위해 한 일이지만 스스로를 죽이고 팔아먹은 일이 아니냐? 당신이 그렇게도 증오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런 짓으로는 아무도 도울 수 없고, 구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아는 게 무서운 일이 아닌가? 차라리 그들을 버리든가 스스로 죽어버리는 게 수 천 배 더 정당하고 이성적인 일이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은 음탕한 생활을 즐기는 건가?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의 입에서 “죽여라” 또는 “죽겠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 그녀가 회피하는 질문들을 집요하게 해댔다. 그러나 소냐의 입에서 그런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


소냐라고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일을 하고 싶었겠는가? 절망에 빠져서 단번에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여러 번, 아주 진지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았던 것은 어린 동생들과 미쳐가는 계모를 부양하기 위해서였다. 나마저도 없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될까? 아마도 소냐보다 어린 뽈랴가 매춘의 길로 나섰을지 모른다. 뽈랴를 구하기 위해 소냐는 죽지 않고 모욕을 견뎌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여동생 두냐는 한 남자에게 자신을 팔려고 했지만 소냐는 여러 남자에게 자신을 팔았다. 역사 이래로 전세계 수많은 딸들이 졌던 짐을 그녀들도 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의 발에 키스하며 온 인류의 고통에 절을 했다고 말한다. 고통스런 삶을 묵묵히 이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다.  


소냐가 시궁창에서도 영혼을 더럽히지 않은 것은 기도 덕분이었다. 그녀는 진정 간절하게 하느님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 믿었다. <나자로의 부활> 대목을 읽는 소냐는 부활 장면에서 정말로 기쁨에 겨워했다. 라스꼴리니꼬프의 가학적 질문에 어쩔 줄 몰라하는 소냐도 하느님을 부정하는 말에는 무섭게 화를 내고 정색했다. 나처럼 믿지 않는 사람은 눈 앞에서 부활이 일어나도 부활이 아니라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부활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다. 소냐는 정신 나간 살인자를 불쌍히 여기고 유형지까지 따라가서 결국엔 새로운 삶을 얻도록 해서 그를 부활시킨 신이었다. 하느님을 믿고 아버지의 말씀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사람들 옆에서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눠지는 사람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아니라 바보 같은 소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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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홍대화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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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상가, 라스꼴리니꼬프


아마도 뽈랴도 똑 같은 길을 걷게 되겠지.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니에요! 하느님이, 하느님이 그런 무서운 일은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실 거예요…!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오.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느님이 그 애를 보호하실 거예요…! 그래요? 어쩌면 하느님은 안 계실지도 모르잖소. (469) 




하느님은 안 계신다. 마치 잘되면 내 덕, 못되면 조상 탓 하듯 신을 욕한 적은 있어도 뭘 간절하게 바란 적도 없고 기도한 적도 없는 것 같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어쩌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나는 그런 단서도 달지 않은 채 하느님은 없다고 믿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이란 존재는 의지할 데 없는 인간의 정신이 만들어낸 영적인 허구라고 생각한다. 빼쩨르부르그의 대학생 라스꼴리니꼬프도 이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신이 있는데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가? 착한 소냐는 창녀가 되었고 소냐가 매춘으로 벌어 들이는 돈이 아니면 소냐의 동생 뽈랴도 창녀가 될게 뻔하지 않은가? 당신을 시궁창에 처박은 현실이 증오스럽지 않아? 널 그렇게 만든 아비와 계모가 원망스럽지 않아?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죄 없는 소냐를 추궁하지?) 하지만 나도 은연중에 라스꼴리니꼬프와 함께 소냐를 괴롭히고 있었다. “아니, 지금 니 처지에 하느님 타령하고 있니? 하느님이 널 구해 줄 것 같아?” 그렇다면, 하느님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는 걸 믿지 않는 나는 이 억울함과 불합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주인공 라스꼴리니꼬프는 빈곤한 대학생이다. 학비가 없어 학교는 그만두었고 좁고 더러운 골방에서 지내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낸다. 과외라도 하라는 하숙집 하녀의 빈정거림에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답하는 일종의 룸펜이다. 나름 정의롭고 인정도 많아서 자기도 살기 어려우면서 돈이 생기면 적선도 하고, 소냐의 아버지인 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의 신세한탄을 듣고 인사불성이 된 그를 집에 데려다주고, 죽었을 땐 장례비도 쾌척했다. 이 인연으로 소냐와 알게 되었고 라스꼴리니꼬프와는 전혀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는 소냐를 알게 된다.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하려는 여동생의 결심을 단호히 반대할 정도로 자존심은 강하지만 앞날이 보이지 않는 가난 속에 ‘생각’만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일까? 라스꼴리니꼬프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전당포 노파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한다. 은행이 서민 금융을 담당하기 전에 전당포는 만인의 인생을 전당잡고 만인의 저주를 받는 곳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해악만 끼치는 사람 하나 죽이고 여럿이 행복 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해야만 하는 일이 아닐까?) 결국 그는 사전답사까지 마치고 무더운 어느 여름날,  스스로 생각해도 혐오스런 그 일을 결행하고 만다.


주인공이 전당포 노인과 그의 여동생까지 우발적으로 살인한다는 것은 『죄와 벌』의 길고 긴 이야기 중에 하나의 에피소드다. 문제는 그의 윤리 의식을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이며 이 혼탁한 세상에서 도덕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는 특이한 범죄론을 쓴 적도 있는데, 매우 이성적인 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발각될 일이 없다는 것과 세상 사람들은 ‘평범한’사람과 ‘비범한’사람이 있어 평범한 사람들은 순종하며 살고, 비범한 사람들은 설사 그것이 범죄가 되더라도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는 장애물이라면 제거할 권리가 있다는 논리였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이 논리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매우 합리적인 이론이며 인류의 문명은 이러한 비범한 사람들이 불가피하게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에 의해 발전해 왔다고 믿는다. 그리고 자기가 그런 비범한 사람인지 확인해보고자 노파를 살해한다. 그러나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의 이런 생각이 아무 근거 없는 망상이자 궤변일 뿐임을 살인 전후에 벌어지는 그의 불안정한 심리와 환영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보여준다. 그는 노파를 이성적으로 죽이려고 했으나 이미 그 집에 들어 갈 때부터 정신이 없었으며 예상치 못한 여동생이 등장하자 당황해서 우발적으로 죽였으며, 증거를 남기지 않겠다며 노파의 집에서 훔쳐온 전당물을 강물에 던질까 말까 하다가 겨우 공사장 돌 밑에 숨겨놓고 남들이 알까 봐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등 말 그대로 제정신을 잃는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범죄 이론과 완전히 어긋난 채로, 그야말로 ‘심신미약’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다.  


도대체 노파는 왜 죽였는가? 돈을 훔치려고? 얼마 훔쳤는지도 자기도 몰랐다. 살인의 목적은 단지 내가 비범한 사람인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 내가 그런 혐오스런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강심장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힘 약한 노파에게 가서 도끼를 휘둘렀다. 면도날처럼 날카로워진 자기만의 ‘궤변’을 믿고 결행한 살인. 그런데 그의 이론이 은근히 매력적이지 않은가? 우리도 늘 뉴스를 보면서 한탄하지 않는가? 왜 한 사람 때문에 죄 없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저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인간들, 남의 피를 빨아먹는 저 ‘이’같은 존재들은 어째서 저렇게 죽지 않고 사는가? 왜 신이 있다면 저들에게 벌을 내리지 않는가? 왜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은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가? 누군가 저 악랄한 인간들을 골라내 이 세상에서 제거해 준다면 그는 영웅이 되지 않을까? 나는 살인까지 결행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조롱하면서도 그의 이론에 동조하는 이상한 ‘분열’을 겪고 있었다. 라스꼴리니꼬프만 분열증을 앓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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且夫水之積也不厚, 則其負大舟也無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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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부수지적야불후즉기부대주야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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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얕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어.

覆杯水於坳堂之上, 則芥爲之舟, 置杯焉則膠,水淺而舟大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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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배수어요당지상즉개위지주치배언즉교,수천이주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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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마루 위 얕게 패인 부분에 물 한 잔을 엎어 봐라. 풀잎은 띄울 수 있어도 잔을 그위에 놓으면 뜨는게 아니라 마루에 딱 붙어버리지.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야.

風之積也不厚, 則其負大翼也無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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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지적야불후즉기부대익야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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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바람이 많이 쌓이지 않으면 큰 날개가 타고 오를 수가 없어.

故九萬里, 則風斯在下矣, 而後乃今培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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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만리즉풍사재하의이후내금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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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구만리를가려면 바람이 아래에 많이 있은 후에야 바람을 탈수 있어.

背負靑天而莫之夭閼 者而後乃今將圖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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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청천이먁지요알자이후내금장도남                   펼친 부분 접기 ▲

그래서 푸른 하늘을 등에 이고 나면 거침 없지. 그런 후에야 남쪽으로 가는거야.


*********************


날개가 큰 새를 위한 위로!

앞서 장자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이 큰 새, "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큰 바람을 타고 간다는 얘기를 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제해"라는 기록도 인용했다. 이번에는 그 큰 새가 왜 날기 어려운지를 물리적으로 설명한다. 이 새는 한번 날려면 바람이 모이길 기다려야 하므로 우리는 그 새가 나는 것을 자주 볼 수 없다. 평생 못 볼 수도 있다!

날개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처럼 큰 붕은 그 날개를 띄워줄 바람이 없으면 날 수가 없다. (당연하다!) 그러니 평소에 날지 못하는 이 새는 얼마나 많은 모욕과 멸시를 당했겠는가? 지상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날개를 감출 수도 없이 질질 끌고 다녀야 했을 것이며, 사람들은 그런 쓸모 없는 날개를 가진 붕에게 "너도 새냐?"라고 비웃었을 것이다. 당장에 날 수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붕은 그 멸시를 오로시 감당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날개를 펼만한 바람이 모이면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유유히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게 될 것이다. 너희들은 갈 수 없는 곳에 나는 도달할 것이다. 붕이 받은 수모는 잊혀질 것이다.


이것이 날개가 커서 슬픈 새, 붕에게 주는 장자의 위로이다. 붕은 그 신체적 특징으로 인해 새가 아닌 듯 보이나, 그 새는 높이 날기 위해 기다리는 중이다. 모든 조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견디는 중이다. 


어쩌면 이 "붕을 위한 위로"가 장자가 스스로에게 주는 위로라고도 생각했다. 착실히 공부해서 각종 이론을 섭렵한 후 제후의 마음에 쏙 들만한 말솜씨를 갈고 닦아, 한 나라의 책사 노릇을 하고, 그래서 명예롭고 부유하게 사는 삶. 당시의 지식인들이 원하던 삶이었다.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다)

장자와 동시대를 살던 맹자는 그런 삶을 원해서 제후들의 스승이 되고자 했으나 기어이 이익보다 의로움을 앞세우다 받아들여지지 못한 사람이다. 진정 한 나라의 이익과 강함을 역설하던 소진과 장의 같은 유세가(외교관이자 정치인)들은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를 누렸다. 그들이 집에서 쉬면 천하가 조용하고 그들이 6국을 분주히 오가면 전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던 때. 모두가 공부해서 출세하길 바라던 그 때, 장자는 오히려 그런 삶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고, 행복을 방해하고, 수명을 단축시키는 일일 뿐이라고 역설했다. 


장자는 거리에서 사람들의 편협한 상식과 막연한 환상(이루어지지도 않을 소망)에 돌을 던지고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안되는 건 되게 하라"며 불구덩이로 뛰어들 준비를 할 때 "그렇게 뼈빠지게 고생하다 죽어"라고 외쳤다. 행복하고 싶다면서 불구덩이로 뛰어든다고? 제정신이야? 말로는 유유자적 평온한 삶을 원한다지만 그런 삶은 소수의 사람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착취해서 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장자는 꿰뚫어보았다. 모두 부자가 되어 남의 서비스를 제 것인양 누리고 사는게 불가능하지만 마치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위선과 거짓. 그걸로 누가 이득을 보는가? "행복"을 다시 정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유용한 노예가 될 뿐임을 장자는 이미 알았다. 유용한 노예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우리, 장자의 말에 귀기울여 봐야 하지 않는가?

 

남들이 모두 행복이라 말하는 것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는 장자를 사람들은 날지 못하는 붕새 취급을 했을 것이다. "아니, 공부는 해서 뭐해? 저렇게 가난하게 살걸? 가족 고생만 시키잖아. 사람이 밥값은 해야지? 무슨 말같잖은 소리만 저렇게 하고 다녀?" 평온함과 행복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장자에게 쏟아졌을 비난들, 공부해서 출세는 커녕 취직도 어려운 요즘 세대가 견뎌야 할 모욕이었을지도 모른다. 

장자는 새가 날려고 해도 조건이 갖춰져야 함을 말한다. 아무리 높이 나는 새도 바람이 없으면 날지 못한다. 반대로 작은 새들은 큰 바람이 불면 날지 못한다. 바람에 날아가 버릴 뿐.... 그런데 바람만 모이면 뭐하나? 아무리 큰 날개를 가지고 태어났어도 날기를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마침 불어오는 태풍에 작은 새들처럼 두려움에 딸면서 그 큰 날개로 눈을 가리고 몸을 감싸고 숨어 버릴 것이다. 불가능한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현실을 직시하지도 못하는 법이다. "나의 꿈은 왜 여기서 불가능한 걸까?" 이런 질문에 답을 찾는 노력에서 환상이 깨질 수도 있다. 불안과 두려움. 그걸 이기고 바람이 모일 때까지 날 준비를 하느냐? 아니면 달콤한 안락을 약속하는 곳으로 숨어 버릴 것인가?


장자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의 욕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담배를 피우고 자기가 좋아하는 위스키를 마시기 위해 집을 포기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젊은 여자 "미소"의 삶은 여전히 불안해 보이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영화 "소공녀") 어쩌면 내 생에 붕의 비상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성공과 출세를 욕망하는 회로가 어디 그리 쉽게 변하는가? 역사가 시작한 이후로 면면히 공고히 이어진 욕망이다. 하지만 그런 강렬한 욕망 아래로 비난 받으면서도 매력적인 장자의 사상도 사라지지 않고 이어져오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장자의 사상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는 출세를 위한 삶이 다가 아니란 걸 믿는 사람을 위한 바람이 되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의 무의식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는 전역사시대의 흔적이라고 해야할까? 세상에 평지돌출하는 사상은 없다. 장자의 책으로 전해지는 장자의 사상도 그 당시 비주류들의 사상이 종합되어 전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도가의 소박한 삶, 양주의 위아주의, 농가의 자립적인 생활 추구 등의 사상이 장자라는 사람을 키웠고, 그의 입으로 전해지는 사상은 대량 노예를 생산하는 역사적인 삶의 구조에 의심을 품도록 했을 것이다. 장자도 왜 그런 삶에 의심을 품었을까? 나는 장자도 역사 이전의 기억, 인류의 무의식이 꿈틀거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역사시대보다 더 오래 계급과 차별없는 전역사의 시절을 겪었음에도 까맣게 잊고서 피라미드식 계급사회를 열었다. 이것이 역사시대다. 계급 사회는 봉건사회나 지금 민주주의 사회나 다를 게 없다. 모두가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가려고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이건 뭔가 잘못 된 것이 아닌가? 싶을 때 오랜 무의식은 깨어날 수 있다. 이런 삶만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심이 우리 눈을 가리는 투명한 유리창에 금을 낸다. 그 금을 따라가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장자 같은 사상가들이 무수히도 많다. 출세를 가르치는 스승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스승들도 무수히 많다는 사실. 그것이 붕새의 비상을 떠받치는 바람들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서도 불가능한 꿈을 꾸는 사람들을 떠 받치는 바람. 너만 바라는 바람이 아니란다. 영화 <소공녀>의 미소가 자기 짐을 끌고 이 집 저 집 전전함에도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것,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상상"이라며 불가능한 꿈을 꿀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사실은 붕새의 비상이라고 하고 싶다. 정말 붕새가 날아오른다면, 그게 현실이라면 이제 붕새는 또 다른 꿈을 꾸어야 한다. 그래야 붕새다. 그래야 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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齊諧者, 志 怪者也. 諧之言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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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해자, 지, 괴자야. 해지언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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鵬之徙於南冥也, 水擊三千里, 搏扶搖而上者九萬里.去以六月息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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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지도어남명야, 수격삼천리, 박부요이상자구만리. 거이유월식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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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해라는 책은 신기한 이야기들을 적어놓은 책인데, 그 제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있어.

"붕이 남쪽 깊은 바다로 떠나갈 때 물방울은 3천리까지 튀고, 붕의 날갯짓으로 생기는 회오리 바람은 9만리까지 솟구쳐 오른다. 떠날 땐 6월 달에 부는 거대한 바람을 탄다."


장자는 시작하면서 거대한 뻥을 치고 시작한다. 크기를 알 수 없는 곤이라는 물고기와 그 물고기가 심지어 "변신"까지 해서 새가 된 후에는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이야기. 평생 바다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너무 황당한 얘기라서 믿겨지지 않을 얘기다. 그리하여 이런 이야기가 뻥이 아님을 "제해"라는 책에 적혀 있다고 증거를 대는 것이다.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구! 사실 <제해>는 사람이라고도 하고 책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당시에 "세상에 이런 일이"정도를 모아놓은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매우 상식적으로, 사회 통념에 맞는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초상식적인, 초사회적인 일들을 꿈꾸고 이야기하고, 내심 바라고 있다는 사실을 이런 일들로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야 말로 북명과 남명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아닐까? 마음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 곤이 붕으로 변하는 심경변화를 겪고 있는 건 아닌지


野馬也, 塵埃也, 生物之以息相吹也. 天之蒼蒼, 其正色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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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야, 진애야, 생물지이식상취야. 천지창창, 기정색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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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 亦若是則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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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이무소지극야? 기시하야, 역약시즉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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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랭이, 먼지 같은 것은 생물들이 서로 숨을 불어준거야. 하늘은 저렇게 푸른데, 저게 하늘의 본래 색일까? 너무 멀리 있어서 끝도 없는 걸까? 붕이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아마 이럴거야.


<제해>라는 책까지 들먹이며 자기 말이 뻥이 아님을 강조하던 장자는 문득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눈에 먼지나 아지랭이로 보이는 것들은 생명의 숨결이며 하늘은 높고 높아 푸른 색으로 보이는데 그게 원래 그런 색일까?라는 질문. 하늘은 푸른 지붕일까?  생물들의 숨결이 아지랭이 먼지로 보이듯, 우리 눈에 하늘은 푸른 지붕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끝도 없는 공간이며 붕처럼 높이 나는 새가 그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저 푸른 색으로 보일 뿐이라는 말.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거기 어디 사람이 보이던가? 문명이라고 부리는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어디 보이던가? 그저 행성 중 하나가 아니던가? 

장자는 관점의 전환을 유도한다. 애초 곤과 붕의 얘기가 그걸 촉발하던 것이었다. 우리가 감각하는 공간은 사방 끝이 있지만 사실 그 끝의 끝은 끝이 없다. 그 끝의 끝으로 가도 우리의 상식이 상식일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늘을 바라볼 때 그저 푸르게 보이는 것처럼, 이곳의 상식과 질서도 그저 푸르게 보일 뿐일걸! 

자~장자는 이렇게 사방 질서의 공간을 벗어나고자 한다. 사람들이 기괴한 이야기에 끌리는 이유는 사방 질서 내의 공간이 너무 좁고 편협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상상 그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장자를 통해 알게 된다. 늘 상식적으로 살고자 하면서도 언제나 그 상식을 벗어나고픈 욕망이 있는 인간. 장자는 그 욕망을 어떻게 사유하는 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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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篇         

1篇 逍遙遊(소요유)

有魚,其名爲鯤. 鯤之 不知其幾千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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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명유어, 기명위곤. 곤지대 부지기기천리야.

북쪽 깊은 바다에 물고기가 사는데, 그 이름은 "곤"이라고 해. 곤의 크기는 너무 커서 몇 천리인지도 알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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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爲鳥, 其名爲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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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위조, 기명위붕. 붕지배,부지기기천리야.

확~변해서 새가되는데, 그 새 이름은 "붕"이야. 붕의 등도 너무 커서 몇 천리인지 알 수 없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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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飛其翼若天之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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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비, 기익약수천지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 펼친 게 구름이 하늘에 드리운것 같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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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天池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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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야, 해운즉장사어남명. 남명자, 천지야.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쪽 깊은 바다로 옮겨가려고 해. 남쪽 깊은 바다의 이름은 "천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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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면, 느닷없이 변신이야기가 등장한다. 장자가 직접 지은 걸로 간주하는 <내편>의 1편 제목은 "소요유"다. "한가로이 이리저리 거닐다"라는 뜻이다. 이 빡빡한 세상에서 "한가하다"라든지, "여유롭다"라는 소중한 말은 리조트 광고에나 나올법하다.장자는 사람들에게 자기 얘기를 들려주기 전에 먼저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이 세상의 질서에 충실히 복무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황당해서 말도 안된다고 하며 당장에 책을 덮어 버릴 그런 이야기들..철학적인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는 사람도 장자밖에 없을 듯...마치 미끼를 던지고 물리는 사람들에게만 자기 얘기를 들려줄 것 같다. "이 얘기 안 믿어지지? 그럼 계속 그렇게 살든가!" 아니면 "놀랍지?신기하지? 재밌을거 같지? 따라와봐. 정말 재밌는 얘기를 해줄게..."라고 매혹하는 첫 장면.

곤이 붕으로 변신하는 장면은 "배우고,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하던 <논어>의 첫 장과 너무나 비교된다. 장자는 우리를 동네 서당에 머물게 하는게 아니라 북쪽 깊은 바다(북명)과 남쪽 깊은 바다(남명)로 안내한다. 멀리, 멀리 가보자. 거기엔 본적도 없는 동물들이 살고 있어. 길이가 몇 천리인지 알 수도 없는 물고기 곤. 이것도 장자가 지어낸 이름이다. 장자는 송나라 사람으로 북극해나 남극해는 가본적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으로 우리가 갈 수 없는 그곳에 사는 물고기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나! 실제로 북극에는 그렇게 큰 동물들이 산다. 북극곰, 바다사자, 일각고래 그 추운 데서 어떻게 그렇게 큰 몸집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인 북극 동물들... 그의 곤 이야기를 들으면 북극에 사는 "외뿔고래(일각고래)" 생각이 난다. 북극, 남극도 "탐험"이라는 명목으로 다 헤집어놓은 와중에 아직 "외뿔고래"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거의 없다는 희한하게 크고 긴 뿔을 가진 고래. 인간 덕분에 멸종위기종이 된 슬픈 짐승.


이에 대해서는 다큐멘터리 <북극의 눈물>이나 베리 로페즈의 책 <북극을 꿈꾸다>를 추천함.


장자는 이런 동물을 보고 쓴 얘기가 아니다. 북극이나 남극에 갔다 와서 쓴 여행기도 아니다. 마음껏 누리는 상상. 어마어마한 크기의 물고기가 새로 변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거대한 스케일의 상상. 쪼잔하게 마을에만 머물지 말라는 이야기. 


나는 이 구절의 핵심어가 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말로는 변화라고 하지만 사실 變은 점진적의 변화. 내 눈에 보이는 자라남과 늙음 같은 것이고, 化는 심신의 완전한 전환, 개체의 달라짐을 말한다. 누에고치에서 나비로 변하는 순간도 化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 것 전체를 변變하다가 化한다고 할 수 있다. 곤충박물관에서 고치에서 나오는 나비를 본 적이 있는데, 좀 전에 같이 매달려 있던 고치들이 이제 옷을 벗고있는 나비를 보면 죽었겠다 생각하겠구나..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비도 좀 전에 같이 매달렸던 벌레들을 "넌 누구냐" 하겠다.. 싶었다. 化란 이런 것이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 


장자처럼 생각하기의 기본이 化라고 생각한다. 배우고 익히고, 출세하고, 유세하고, 부와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화化보다는 변變이다. 차근차근 착실히 단계를 밟아 올라 가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인정받는 길이다. 균질하게 정해진 길. 그러나 장자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참 다양하다는 사실, 평균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장자를 통해 깨닫게 된다. 누구나 출세 원하지 않아? 다들 부자되고 싶어하잖아? 누구나 남자 아니면 여자고 남녀가 사랑해서 애낳는거 아니야? 이런 "상식"적인 사람들만 있는게 이 세상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나도 아주 상식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세상에 원래 그러한 것은 없다는 것, 우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느끼고 원래부터 그렇다고 느끼는 것들조차 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제도이고, 풍습이었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이득을 보고, 누군가는 차별받고 억압받는다. 차별과 억압은 다른게 아니라 그들의 "언어"가 없다는 것. 말하고 싶어도 단어가 없다는 사실. 장자가<곤>과 <붕>을 만들어내고 물리적인 신체의 변화를 거론하는 것은 장자가 살던 그 당시에도 배척받았던 수많은 "소수자"들의 언어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하고 싶다. 도무지 당신들의 세상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그걸 어떻게 아냐고? 당신들의 사고를 뒤집어 보면 알 수 있지... 세상 끝으로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밖에는 또다시 세상 밖이 있어 무한해!라고, 죽지 않아, 거기 곤과 붕도 사는걸! 걱정마!라고, 절벽위에서 한걸음 떼어 보라고 한다. 혹시 아는가? 붕의 날개가 솟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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